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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대

환희대(歡喜臺)는 1926년 창건된 비구니 도량으로 수덕사 중심 예불 영역에서 남서쪽으로 약 150m 떨어져 있는 본래 절과 가장 가까운 암자이다. 만공(滿空月面, 1871~1946) 스님이 처음 자리 잡고, 지금의 환희대 원통보전(圓通寶殿) 뒤 바위에 앉아 ‘환희대’라 이름 지었다고 한다. 환희대는 한국 최초의 비구니 선원(比丘尼禪院)으로 알려진 견성암(見性菴)이 창건된 곳이다. 1910년 비구니 도흡(道洽, 1800년대 후반~20세기 중반)이 여성 선원을 처음 연 이래[1]『덕숭산 정혜사(德崇山定慧寺)』에 실린 「산내 말사 속암 약사(山內末寺屬庵略史)」(시기미상)에 비구니(比丘尼) 도준(道俊)이 1908년 개인 가옥으로 지었던 집을 비구니 도흡(道洽)이 사서 고쳐 짓고 1910년 여성 선원을 창설하였는데, 1938년 만공 선사(禪師)가 다시 새로 고쳐 지어 대방(大房) 등의 시설을 갖춘 한국 유일의 비구니 모범 선원이 되었다고 견성암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1966년 견성암이 지금의 자리[2]옛 정혜사 자리(『덕숭산 정혜사』 「산내 말사 속암 약사」). 로 옮겨가기[3]〈덕숭산 수덕사 사적비(德崇山修德寺事蹟碑)〉(2002)에 1966년 견성암을 수덕사 서쪽으로 이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전까지 일엽(荷葉一葉, 1896~1971) 스님을 비롯한 많은 여성 수행자들의 수행처가 되었다. 일엽 스님은 출가 전 근대기 신여성으로서 여성운동과 문필활동을 하며 이름을 날린 인물이었지만, 출가 뒤 1933년경부터 환희대의 견성암 선원에서 수행하며 후학을 지도하였다. 1960년부터 입적할 때까지 만년(晩年)을 환희대에서 보냈는데, 이때 일엽 스님의 대표적 저술인 『어느 수도인의 회상』(1960), 『청춘을 불사르고』(1962) 등이 발간되었다.[4]출가 시 ‘수행과 깨달음이 완성되기 전까지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버리라.’는 만공 스님의 당부에 따라 문학 활동을 중단하였으나, 깨달음을 얻은 후 포교와 교화의 방법으로 27년간 중단하였던 집필 활동을 재개하였다. 일엽 스님이 지도한 제자들은 하나의 문중을 형성하였는데, 지금 환희대 입구에 세워놓은 〈이니보탑(二尼寶塔)〉(2007)의 표지석과 원통보전 서쪽에 위치한 〈환희대 원통보전 창건비(歡喜臺圓通寶殿創建碑)〉(1985)의 기록을 통해 일엽 스님의 손상좌(孫上佐) 월송(月松, 1956~)과 정진(淨眞, 생몰년 미상) 스님을 비롯한 문도들에 의해 환희대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2010년에는 환희대에서 ‘김일엽문화재단(이사장 월송)’을 출범하여 만공 스님으로부터 이어지는 일엽 스님의 선 사상과 문학을 계승해나가고 있다.
지금 환희대에는 남향으로 앉은 원통보전을 중심으로 9동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원통보전 전면 계단 아래에 보광당(普光堂), 후면에 용왕단(龍王壇)과 요사(寮舍) 2동이 배치되어 있고, 서쪽에는 창고나 화장실 등 생활 편의시설로 사용되고 있는 요사가 여러 동 들어서 있다. 원통보전과 보광당은 1985년경 일엽 스님 문도들에 의해 지어진 건물이다. 원통보전 전면에 〈원통보전(圓通寶殿)〉 편액(扁額)이 걸려있고, 내부 법당에는 〈관음보살좌상(觀音菩薩坐像)〉(1985)과 〈아미타불회도(阿彌陀佛會圖)〉(1984)를 비롯한 불화 9점, 〈소종(小鐘)〉(1988)이 봉안되어 있다. 원통보전 뒤편에는 용왕단과 1980년대 지어진 요사가 뜰을 갖춘 작은 공간을 형성하고 있다. 요사는 2동을 연결한 ‘┌’ 모양이며, 전면에 〈환희대(歡喜臺)〉 편액을 걸었다. 요사 앞, 뜰에는 〈오층석탑(五層石塔)〉(1974)이 세워져 있다. 환희대에는 〈원통보전〉·〈환희대〉 편액 외에도 〈죽림재(竹林齋)〉 편액이 전한다. 이 편액 3점은 모두 1985년경 환희대에서 큰 불사(佛事)가 일어날 때 증명(證明)[5]증명(證明)은 불교 의식이 원만히 성취되었음을 증명하는 스님을 말한다. 환희대 원통보전을 지을 때 증명은 혜암(惠菴玄門, 1886~1985), 벽초(碧超鏡禪, 1899~1986), 원담(圓潭眞性, 1926~2008) 스님이었다.을 맡았던 원담(圓潭眞性, 1926~2008) 스님 글씨로 제작되었다.
관련주석
  • 주석 1 『덕숭산 정혜사(德崇山定慧寺)』에 실린 「산내 말사 속암 약사(山內末寺屬庵略史)」(시기미상)에 비구니(比丘尼) 도준(道俊)이 1908년 개인 가옥으로 지었던 집을 비구니 도흡(道洽)이 사서 고쳐 짓고 1910년 여성 선원을 창설하였는데, 1938년 만공 선사(禪師)가 다시 새로 고쳐 지어 대방(大房) 등의 시설을 갖춘 한국 유일의 비구니 모범 선원이 되었다고 견성암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 주석 2 옛 정혜사 자리(『덕숭산 정혜사』 「산내 말사 속암 약사」).
  • 주석 3 〈덕숭산 수덕사 사적비(德崇山修德寺事蹟碑)〉(2002)에 1966년 견성암을 수덕사 서쪽으로 이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 주석 4 출가 시 ‘수행과 깨달음이 완성되기 전까지 글쓰기에 대한 욕망을 버리라.’는 만공 스님의 당부에 따라 문학 활동을 중단하였으나, 깨달음을 얻은 후 포교와 교화의 방법으로 27년간 중단하였던 집필 활동을 재개하였다.
  • 주석 5 증명(證明)은 불교 의식이 원만히 성취되었음을 증명하는 스님을 말한다. 환희대 원통보전을 지을 때 증명은 혜암(惠菴玄門, 1886~1985), 벽초(碧超鏡禪, 1899~1986), 원담(圓潭眞性, 1926~2008) 스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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