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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1904~1989)

이응노(李應魯, 1904~1989)는 충청남도 홍성 출신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유럽 미술계에서 활동한 작가이다. 호는 ‘고암(顧菴)’, ‘죽사(竹史)’, ‘용몽자(龍夢子)’이고, 때로는 ‘용(龍)’을 자신을 가리키는 글자로 사용하였다.[1]‘고암(顧菴)’은 36세부터 사용한 호이다. 1933년 한학자 규원(葵園) 정병조(鄭丙朝, 1863~1945)가 지어준 것으로 중국 동진시대 ‘고개지(顧愷之)처럼 되라’는 의미에서 고개지의 ‘고(顧)’자를 따와 지었다. ‘죽사(竹史)’는 20세 때 스승 김규진으로부터 ‘대나무처럼 항상 푸르러라’는 의미로 받은 호이다. ‘용몽자(龍夢子)’라는 호와 ‘용(龍)’자를 쓰는 이유는 이응노가 용의 해에 태어났으며, 태몽 또한 용 꿈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응노는 나무, 철, 한지, 도자기 등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였는데, 특히 동아시아 서화(書畫) 전통을 활용한 추상(抽象) 작품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다. 3만여 점의 작품을 남겼으며, 대표 작품은 〈문자추상〉과 〈군상〉 시리즈이다. 이응노의 유럽 진출은 1957년 미술평론가 자크 라세뉴의 파리 초청이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2]자크 라세뉴(Jacques Lassaigne, 1911~1983)는 당시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프랑스 지부장이었다. 이응노가 프랑스의 한국인 유학생에게 보낸 그림을 보고, 이응노의 개인전을 파리에서 열고자 초청하였다. 이에 이응노는 1958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1주일가량 머물면서 라세뉴를 만난 뒤 독일로 떠났다. 독일에서는 1959년 1월부터 1년간 세 개 도시를 순회하며 전시회를 열었다. 1960년 초 파리에 정착한 후, 전 유럽과 미국으로 활동 영역을 넓혔다. 1964년에는 파리 세르누시 미술관 내에 ‘파리동양미술학교(L’Académie de Peinture Orientale de Paris)’[3]이응노와 세르누시 미술관(Musée Cernuschi) 관장 엘리세프(V.Elisseeff)가 설립하였다. 설립을 위해 자크 라세뉴, 세계적인 작가 아르퉁(H.Hartung), 미술평론가, 역사학자, 철학자, 언어학자 등 14명의 국제적인 인사들이 후원하였다. 이 학교는 유럽에 설립된 최초의 동양미술 교육기관으로 동양미술을 서구에 보급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를 설립하여 동양 문화에 대해 이해가 없던 유럽인들에게 동양화와 서예를 가르쳤다. 1989년 1월 10일 파리에서 86세의 나이로 서거하였다. 파리의 페르 라셰즈(Père Lachaise) 묘지에 안장되었다. 이후 그의 삶과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추모전이 세계 각지에서 열렸다. 이응노에게 수덕사 일대는 고향 같은 곳이었던 듯하다. 1939년 무렵부터[4]1935년 제98회 《일본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하는 등 일본 활동의 기반을 준비한 후 1936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45년 3월 귀국할 때까지 일본 남화(南畵)와 서양화를 배우며 일본 미술계에서 활동하였다. 홍성, 예산, 공주 등 충남 지역을 여행하며 스케치 작업을 하였고, 귀국 후에는 아예 수덕사 아래 수덕여관을 사들이고, 해방될 때까지 살았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서울에서 돌아와 휴전할 때까지 머물렀다. 1959년 프랑스로 건너가기 전에도 수덕여관에 머무르며 수덕사 일대의 풍경을 화폭에 담았다. 동백림 사건[5]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은 1967년 7월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중앙정보부는 독일·프랑스 유학생과 교민이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과 평양에 드나들면서 간첩 활동을 하였다고 하며, 이응노를 비롯한 작곡가 윤이상, 시인 천상병 등을 간첩으로 지목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응노는 1969년 3월까지 2년 6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였다. 같은 해 5월 프랑스로 떠났으며, 1988년 사건의 혐의가 풀릴 때까지 한국 입국과 활동이 금지되었다.으로 옥고를 치른 직후 역시 수덕여관으로 돌아와 지친 몸을 추스르며, 여관 입구의 넓고 큰 너럭바위에 〈문자추상〉 작품을 새겼다. 『덕산향토지』(2020)에 따르면, 이응노는 충남 홍성군 홍북읍 중계리에서 태어났으나 7세에 예산군 덕산면 낙상리로 이사하여 20세가 될 때까지 살았다. 지금도 낙상리에는 이응노 일가의 선산이 있다. 후손들이 파리에 안장된 이응노의 유골을 선산에 모시려 하였으나, 사정상 그의 머리카락만 매장하였다고 한다.
관련주석
  • 주석 1 ‘고암(顧菴)’은 36세부터 사용한 호이다. 1933년 한학자 규원(葵園) 정병조(鄭丙朝, 1863~1945)가 지어준 것으로 중국 동진시대 ‘고개지(顧愷之)처럼 되라’는 의미에서 고개지의 ‘고(顧)’자를 따와 지었다. ‘죽사(竹史)’는 20세 때 스승 김규진으로부터 ‘대나무처럼 항상 푸르러라’는 의미로 받은 호이다. ‘용몽자(龍夢子)’라는 호와 ‘용(龍)’자를 쓰는 이유는 이응노가 용의 해에 태어났으며, 태몽 또한 용 꿈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 주석 2 자크 라세뉴(Jacques Lassaigne, 1911~1983)는 당시 국제미술평론가협회(AICA) 프랑스 지부장이었다. 이응노가 프랑스의 한국인 유학생에게 보낸 그림을 보고, 이응노의 개인전을 파리에서 열고자 초청하였다. 이에 이응노는 1958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1주일가량 머물면서 라세뉴를 만난 뒤 독일로 떠났다. 독일에서는 1959년 1월부터 1년간 세 개 도시를 순회하며 전시회를 열었다.
  • 주석 3 이응노와 세르누시 미술관(Musée Cernuschi) 관장 엘리세프(V.Elisseeff)가 설립하였다. 설립을 위해 자크 라세뉴, 세계적인 작가 아르퉁(H.Hartung), 미술평론가, 역사학자, 철학자, 언어학자 등 14명의 국제적인 인사들이 후원하였다. 이 학교는 유럽에 설립된 최초의 동양미술 교육기관으로 동양미술을 서구에 보급하는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 주석 4 1935년 제98회 《일본미술전람회》에 출품하여 입선하는 등 일본 활동의 기반을 준비한 후 1936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다. 1945년 3월 귀국할 때까지 일본 남화(南畵)와 서양화를 배우며 일본 미술계에서 활동하였다.
  • 주석 5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은 1967년 7월 중앙정보부에서 발표한 간첩단 사건이다. 중앙정보부는 독일·프랑스 유학생과 교민이 동베를린의 북한대사관과 평양에 드나들면서 간첩 활동을 하였다고 하며, 이응노를 비롯한 작곡가 윤이상, 시인 천상병 등을 간첩으로 지목하였다. 이 사건으로 이응노는 1969년 3월까지 2년 6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였다. 같은 해 5월 프랑스로 떠났으며, 1988년 사건의 혐의가 풀릴 때까지 한국 입국과 활동이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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