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혜석(羅蕙錫, 1896~1948)은 호는 정월(晶月)이며,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이다. 18세에 일본 유학을 떠났다. 유학 시절 첫사랑 최승구(崔承九, 1892~1917)를 비롯하여 이광수(李光洙, 1892~1950), 염상섭(廉想涉, 1897~1963), 허영숙(許英肅, 1897~1975), 김일엽 등과 교유하였다. 이 시기 여성 해방과 자유주의 운동에 눈을 떴으며, 문학에도 심취하여 잡지 『학지광(學之光)』·『여자계(女子界)』에 시와 수필·소설을 기고하였다. 1918년 귀국 후에는 서울과 함흥에서 교사로 근무하였으며, 1919년 3·1운동에 가담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뤘다. 1920년 김우영(金雨英, 1886~1958)과 결혼하고, 다음 해인 1921년 매일신보 내청각(來靑閣)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는 한국 최초의 여성 작가 유화 개인전이었는데, 2일간 5천여 명이 다녀가고 70여 점의 작품이 팔리는 대성황을 이루었다. 《조선미술전람회》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927년 프랑스 파리에서 당시 유행하던 야수파 미술을 공부하였다.[1]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부터 1932년 제11회까지 총 18점을 출품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남편 김우영을 따라 세계여행길에 올랐다. 이들은 1927년 7월 파리에 도착하여 제네바, 벨기에, 네덜란드 등을 관광한 뒤, 남편은 법률 공부를 위해 독일로 떠나고 나혜석은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에 남았다. 1927년 연말 남편이 있는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까지 파리 야수파 작가의 화실을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귀국 후 수원 용주사 포교당에서 《나혜석 여사 구미 사생화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나혜석은 잡지의 삽화나 판화, 유화 작품을 창작하였는데, 진위 논란으로 남아 있는 확실한 작품이 많지는 않다. 다만, 파리에서 야수파 화풍을 경험하기 전에는 후기인상주의나 자연주의 화풍의 유화 풍경화와 인물화를 주로 그렸다. 문필가로서는 수필 「이상적 부인(理想的夫人)」(1914), 소설 「경희(瓊姬)」(1918) 등 여성의 삶을 소재로 쓴 산문과 여행기 같은 글을 잡지에 기고하였다.
나혜석이 수덕사와 깊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35년경부터이다. 이혼하고, 서울 수송동에 살 때부터[2]파리에서 최린(崔麟, 1878~1958)과의 불륜으로 1930년 이혼하였다. 이후 1935년경 수원으로 낙향하기 전까지 수송동에 살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 각황사(覺皇寺, 현 조계사)와 선학원에 드나들며 불교에 귀의하였다. 1934년 여자미술학사를 열었다. 같은 해 자신의 연애·결혼·이혼과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은 「이혼고백서」를 발표하고, 최린에게 위자료 청구 소송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나혜석은 스캔들의 중심이 되었으며,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파장은 그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사람들이 작품을 폐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김일엽(金一葉, 1896~1971)의 권유로 불교와 가까워졌다. 이 무렵부터 전국 명승과 사찰을 다니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썼는데, 1933년 수덕사, 1934년에는 해인사에 머물렀다. 김일엽(荷葉一葉)의 입산 출가는 그녀의 삶의 근거지를 수덕사로 이끈 것으로 보인다. 1935년 이미 스님이 된 김일엽을 찾아와 두 달을 수덕사 승방(僧房)에 머무르더니, 1937년 고향 수원을 떠나 해방 직전까지 대부분 수덕사 주변에서 살았다.[3]『삼천리(三千里)』 「객담실(客談室)」에 따르면, 나혜석은 1937년 초여름 수원을 떠나 해인사에 머물다 부산 동래를 거쳐 다시 수덕사로 돌아왔다. 나혜석이 만공 스님(滿空月面, 1987~1946)께 출가를 거절당하자, 수덕사 바로 문밖 수덕여관에서 생활하였다는 일화는 유명하다.[4]이때 만공(滿空月面, 1871~1946) 스님께 받은 나혜석의 법명이 고근(古根)이다. 만공 스님이 출가할 그릇이 아니라며 거절했다고도 하고, 스님이 출가를 권했지만 자식에 대한 그리움과 세속을 향한 미련 때문에 스스로 출가를 거부했다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한다. 1938년에는 수덕사 환희대에 머물렀다. 1939년부터의 행적은 부분적으로만 확인되는데, 1940년경 예산 덕산면의 한 가정집에 찾아가 작품을 팔았다. 이 시기에 일본 유학 중 고향에 온 이응노(李應魯, 1904~1989)를 만났던 것으로 보인다. 1943년에는 수덕여관 인근의 농가에서, 이응노가 수덕여관을 사들이던 1945년경에는 수덕사 아래 주막에서 잠시 생활하기도 하였다. 나혜석의 삶은 1948년 12월 10일 서울 자혜병원 무연고자 병동에서 막을 내렸다.
관련주석
- 주석 1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부터 1932년 제11회까지 총 18점을 출품하여 우수한 성적을 거두었다. 1927년 6월부터 1929년 3월까지 남편 김우영을 따라 세계여행길에 올랐다. 이들은 1927년 7월 파리에 도착하여 제네바, 벨기에, 네덜란드 등을 관광한 뒤, 남편은 법률 공부를 위해 독일로 떠나고 나혜석은 그림 공부를 위해 파리에 남았다. 1927년 연말 남편이 있는 베를린으로 떠나기 전까지 파리 야수파 작가의 화실을 다니며 그림을 그렸다. 귀국 후 수원 용주사 포교당에서 《나혜석 여사 구미 사생화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 주석 2 파리에서 최린(崔麟, 1878~1958)과의 불륜으로 1930년 이혼하였다. 이후 1935년경 수원으로 낙향하기 전까지 수송동에 살며 작품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 각황사(覺皇寺, 현 조계사)와 선학원에 드나들며 불교에 귀의하였다. 1934년 여자미술학사를 열었다. 같은 해 자신의 연애·결혼·이혼과 가부장제 사회에 대한 비판 의식을 담은 「이혼고백서」를 발표하고, 최린에게 위자료 청구 소송을 하였다. 이 사건으로 나혜석은 스캔들의 중심이 되었으며, 사회적으로 매장 당하였다. 당시의 사회적 파장은 그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던 사람들이 작품을 폐기할 정도였다고 한다.
- 주석 3 『삼천리(三千里)』 「객담실(客談室)」에 따르면, 나혜석은 1937년 초여름 수원을 떠나 해인사에 머물다 부산 동래를 거쳐 다시 수덕사로 돌아왔다.
- 주석 4 이때 만공(滿空月面, 1871~1946) 스님께 받은 나혜석의 법명이 고근(古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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