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하엽 일엽(1896~1971)

하엽 일엽(荷葉一葉) 스님은 일제강점기 여성운동가, 언론인, 시인 겸 수필가이며, 근세 수덕사 견성암의 비구니 스님이다. 속명은 김원주(金元周), 법명은 일엽(一葉)[1]일본 유학 중에 만난 친구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가 일본의 여성작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 1872~1896)의 이름에서 따와 조선의 한 잎사귀가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아호(雅號)였는데, 출가 후 만공(滿空月面, 1871~1946) 선사로부터 받은 법명이다., 법호는 하엽(荷葉), 필명이 김일엽(金一葉)이다. 1896년 6월 9일 평안남도 용강에서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20세까지 가족과 함께 교회 다니며 성장했다. 1904년 기독교 이념의 구세(救世)학교에 입학하고, 1912년 함경북도 진남포 삼숭보통여자학교, 1915년 이화학당, 1918년 이화전문학교를 졸업했다. 서대문구 아현동 소학교와 동대문 간호원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하였다. 1920년 일본에 유학하여 동경의 일신여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하여, 한국 최초의 여성 잡지 『신여자(新女子)』를 창간했다. 스님은 이화학당 시절부터 종교에 대한 회의를 가지고 있었으며, 1928년 봄에는 『불교』지 문예란에 글을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나중에 권상로(權相老, 1879~1965)에게 한문을 불교를 통해 배우면서 불교를 이해하게 되었고, 백성욱(白性郁, 1897~1981) 박사와의 만남을 통해 불교에 대한 이해가 깊어지면서 불교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가졌다. 1928년 33세 때 금강산 건봉사 산내암자 서봉암(瑞鳳庵)을 찾아가 이성혜(李性惠, 생몰년 미상) 비구니를 은사(恩師)로 스님이 되었다. 1930년 초 서울의 선학원 등에서 참선을 하고, 1933년 만공(滿空月面, 1871~1946) 선사를 계사(戒師)로 사미니계를 받고, 수덕사 견성암에서 정진하고 오도송[2]‘고인(古人)의 속임수에 헤매고 고뇌한 이 예로부터 그 얼마인가. 큰 웃음 한소리에 설리(雪裏)에 도화(桃花)가 만발하여 산과 들이 붉었네.’을 읊었다. 1934년 만공 스님으로부터 법호 ‘백련도엽(白蓮道葉)’을 받았다. 1936년 일봉 경념(一鳳敬, 1923~1936 활동) 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았다. 1960년부터 수덕사 환희대에 주석하고, 1966년 덕숭산에 비구니총림 견성암(見性菴) 건립의 원력을 세워 기공식을 봉행, 1967년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 원작 〈이차돈의 죽음(死)〉을 포교 법극으로 각색하여 국립극장에서 공연하고 비구니총림원 건립 기금을 충당하였다. 평생을 여성의 지위 향상과 개방을 촉구하였다. 수덕사 환희대(歡喜臺)에서 1971년 1월 28일 세수 76, 법랍 44세를 일기로 입적하였다.
관련주석
  • 주석 1 일본 유학 중에 만난 친구 춘원 이광수(李光洙, 1892~1950)가 일본의 여성작가 히구치 이치요(桶口一葉, 1872~1896)의 이름에서 따와 조선의 한 잎사귀가 되라는 뜻으로 지어준 아호(雅號)였는데, 출가 후 만공(滿空月面, 1871~1946) 선사로부터 받은 법명이다.
  • 주석 2 ‘고인(古人)의 속임수에 헤매고 고뇌한 이 예로부터 그 얼마인가. 큰 웃음 한소리에 설리(雪裏)에 도화(桃花)가 만발하여 산과 들이 붉었네.’

관련기사

관련자료

지리정보

    • 내용
  • 위로
  • 불국토
    문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