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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공 월면(1871~1946)

만공 월면(滿空月面) 대선사는 경허 성우(鏡虛惺牛, 1846~1912)의 선맥(禪脈)을 이어받아 예산 수덕사에서 선풍(禪風)을 크게 떨쳤으며,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정책에 정면으로 맞서서 한국불교의 주체성을 유감없이 발휘하며 조국 광복에 헌신했던 스님이다. 스님의 속성은 송(宋)씨, 본관은 여산(廬山), 속명은 도암(道巖), 법호는 만공, 법명은 월면이다. 전라북도 태인에서 부친 송신통(宋神通)과 모친 김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1883년 13세 되던 해 김제 금산사(金山寺)에서 불상을 처음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공주 동학사(東鶴寺)로 출가하여 진암(眞巖, 생몰년 미상) 문하에서 행자 생활을 하다가 이듬해, 경허 스님을 따라 서산 천장사(天藏寺)로 와서 태허(泰虛, 생몰년 미상) 스님을 은사(恩師)로, 경허 스님을 계사(戒師)로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법명을 월면(月面)이라 하였다. 25세 되던 계묘년에 '만법귀일(萬法歸一)하니 일귀하처(一歸何處)오.' 라는 화두를 참구하여 깨달음을 얻고 오도송(悟道頌)을 읖었다.[1]높은 산 그 정기는 시공을 초월하였고(空山理氣古今外) / 흰 구름 맑은 바람 스스로 오가는데(白雲淸風自去來) / 달마는 무슨 일로 동토에 왔던가?(何事達磨越西天) / 닭은 축시에 울고 해는 인시에 뜨네(鷄鳴丑時寅日出) 덕숭산에 와서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수년 동안 정진하면서 전국에서 모여든 납자들을 제접하며, 수덕사와 정혜사(定慧寺)·견성암(見性菴)을 중창하고 많은 사부대중을 거느리며 선풍을 드날렸다. 스님은 일제 강점기 선학원(禪學院)의 설립과 선승(禪僧)들의 경제적 자립을 위한 선우공제회 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지도자로 참여하였고, 1937년 3월 조선총독부가 개최한 31본산 주지 회의에 참석하여 조선 총독 미나미(南次郞, 1874~1955)에게 직접 일본의 한국불교 정책을 힐책하였다.[2]1937년 3월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전국 31본산 주지와 13도지사가 함께 모여 미나미(南次郞, 1874~1955) 총독 주재하에 불교진흥책을 논의하였다. 이 때 미나미가 전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 1852~1919)가 조선불교에 끼친 공이 크다고 하자 만공 스님이 단에 나아가, “데라우치는 조선 승려로 하여금 일본 승려를 본받아 파계하도록 하였으니 큰 죄인이다. 마땅히 무간 지옥에 떨어져서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한 뒤 정교분리론을 주장하였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이는 일제 치하의 치욕스런 불교정책을 쇄신하는 계기가 되었다. 말년에는 덕숭산 정상 가까이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초가집을 짓고 지내다가 입적하니, 1946년 10월 20일 그의 나이 75세, 법랍 62세였다. 1947년 제자들이 정혜사 아래에 만공탑(滿空塔)을 세우고, 1936년 제작한 스님의 진영(眞影)을 경허 성우, 혜월 혜명(慧月慧明, 1861~1937) 스님 진영과 함께 금선대(金仙臺)에 봉안하였다. 덕숭문중의 법맥을 형성하여 많은 후학을 배출한 스님의 문하에는 비구(比丘) 보월 성인(寶月性印, 1884~1924), 용음 법천(龍吟法泉, 1887~1951), 고봉 경욱(古峰景昱, 1890~1961), 금봉 주연(錦峰周演, 생몰년 미상), 서경 금우(西耕金牛, 생몰년 미상), 혜암 현문(惠菴玄門, 1886~1985), 전강 영신(田岡永信, 1898~1975), 금오 태전(金烏太田, 1896~1968), 춘성 춘성(春性春城, 생몰년 미상), 벽초 경선(碧超鏡禪, 1899~1986), 원담 진성(圓潭眞性, 1926~2008) 등과 비구니(比丘尼) 묘리 법희(妙理法喜, 1887~1975), 만성(萬性, 1897~1975), 하엽 일엽(荷葉一葉, 1896~1971) 등 뛰어난 제자들이 있다.
관련주석
  • 주석 1 높은 산 그 정기는 시공을 초월하였고(空山理氣古今外) / 흰 구름 맑은 바람 스스로 오가는데(白雲淸風自去來) / 달마는 무슨 일로 동토에 왔던가?(何事達磨越西天) / 닭은 축시에 울고 해는 인시에 뜨네(鷄鳴丑時寅日出)
  • 주석 2 1937년 3월 조선총독부 제1회의실에서 전국 31본산 주지와 13도지사가 함께 모여 미나미(南次郞, 1874~1955) 총독 주재하에 불교진흥책을 논의하였다. 이 때 미나미가 전 총독 데라우치(寺內正毅, 1852~1919)가 조선불교에 끼친 공이 크다고 하자 만공 스님이 단에 나아가, “데라우치는 조선 승려로 하여금 일본 승려를 본받아 파계하도록 하였으니 큰 죄인이다. 마땅히 무간 지옥에 떨어져서 큰 고통을 받을 것이다.”라고 한 뒤 정교분리론을 주장하였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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