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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건판: 고려시대 벽화

수덕사 대웅전의 고려시대 벽화는 1937년 대웅전 수리를 시작할 당시 내부 벽면에 그려진 조선시대 벽화의 보존과 보수를 시행하는 과정에서 확인되었다. 조선시대 벽화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벽면의 안과 겉이 이중으로 되어 있다는 사실이 밝혀져, 그 내부 벽화를 조사하던 중 겉에 그려진 벽화와 화법이 전혀 다르고 오래된 솜씨로 그려진 또 다른 벽화가 발견되었다. 이 벽화가 그려진 벽체는 중간에 한 번도 개수한 흔적이 없는 것으로 확인되어, 결국 이는 건립 당시에 그려진 벽화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 벽화들은 개채(改彩) 당시 긁어 없애지 않고 그대로 둔 채 그 위에 새 벽지를 바르고 벽화를 그린 덕분에 보존되어 왔던 것이다. 이 벽화는 수덕사 대웅전 내부 네 벽의 고주중방(高柱中枋) 윗벽과 창방(昌枋) 위의 포벽(包壁) 등 공간에 그려진 것으로, 40점이 모사되었다. 벽화의 내용을 살펴보면 대부분이 건물의 결구 사이에 생긴 작은 공간을 이용한 장엄용 벽화로, 야생화도, 수생화도, 사체불도, 육체불도, 이체불도, 비천도, 연화만초도, 나한도, 치성광여래도 등이 있다. 이 벽화들은 조선시대 벽화와 함께 임천(林泉, 1908~1965) 선생에 의해 모사작업이 시행되었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것은 고식을 띠는 전대의 단청 중 하중도리장여초에서 각기 다른 세 개의 화문(花文)을 당초가 감싼 문양이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이 당초문(唐草文)이 건축에 사용된 사례는 사신총, 쌍영총 등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찾을 수 있으며, 고려시대 건축인 봉정사(鳳停寺) 극락전(極樂殿) 단청에서도 확인된다. 당초문은 조선 후기에도 단청에 빠지지 않고 사용되지만 주로 화반(花盤)이나 보야지 등에 도채되는 부속문양으로 정착하게 된다. 따라서 단청의 머리초 주문양으로 당초문을 베푸는 형식은 고구려에서 시작되어 고려시대까지 이어졌고, 조선 전기까지 그 전통이 이어졌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하중도리장여 머리초에 여의두초를 나란히 배치한 형식은 1145년에 편찬된 『영조법식(營造法式)』에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이는 중국 단청이 당시 우리나라에 직·간접적으로 수용되었을 가능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의두문(如意頭文)을 단청에 사용한 예는 고려시대 관경변상도에 묘사된 건축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와 같이 수덕사 대웅전에서 발견된 고려시대 벽화는 한국 회화와 단청의 역사를 살펴보는데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라 할 수 있으며, 함께 발견된 고려시대 묵서명을 근거로 건축 당시의 장엄 형태와 당시 사원 벽화의 양상을 단편적으로나마 알려 주는 작품이다. 1937년 벽화 발견 이래, 수리 공사는 벽체 분리 작업과 고벽화 보존을 위한 약품처리 계획 등의 새로운 방법을 고안하면서 해체보수 기간이 연장되고 이를 위한 국고 보조 증액 등의 계획 수정이 있었다. 당시 모사작업 종료 후 벽체 분리 작업이 완료된 것으로 추정되지만, 2차 세계대전이 심해짐에 따라 벽화 보존처리 작업은 중단되었고 해방 후 벽화는 모두 파손된 것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 벽화 자료는 유리건판 사진과 모사도를 통해서만 확인할 수 있으며, 현재 임천이 그린 모사도 일부는 국립중앙박물관과 일본 사가현립 나고야성박물관(佐賀縣立名護屋城博物館) 오가와 케이키치(小川敬吉, 1882~1950) 자료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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