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숭산수덕사사적비(德崇山修德寺事蹟碑)」는 문화해설사의 집과 일주문을 지나 금강문에 이르기 전 왼편 공터에 자리하고 있다. 비신의 전액은 〈德崇山修德寺事蹟碑〉이고, 비문은 비신의 나머지 3면에 적혀 있다. 비문은 지관 스님이 찬하였고, 글씨는 허재 이규찬(虛齋 李奎粲, 1921~2014)이 썼다. 비는 받침돌 귀부(龜趺)와 본체인 비신(碑身), 앞뒤로 큰 용이 새겨진 이수(螭首)로 이루어져 있다.
비문은 먼저 덕숭산과 수덕사의 이름을 해석하고,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과정을 간략히 정리하였다. 그리고 지명법사를 수덕사의 시초로 밝히고 이후 정혜사의 창건, 숭제법사의 기도정진, 현재 남아있는 대웅전의 창건, 그리고 만공선사의 행장과 수덕사의 대규모 중창을 상세하게 기록하였다. 이후 비석이 건립된 2002년까지 수덕사의 역사를 정리하여 선풍의 진작을 다짐하였다.
번역문
선禪의 근본이고 으뜸가는 사찰인 덕숭산 덕숭총림 수덕사 사적비
삼계를 이끌어 주시는 스승이시고, 뱃속에서 자라서 나오는 태생, 알로 태어나는 난생, 물속에서 부화하는 습생, 나비와 같이 변화하는 화생 즉 사생(四生)의 자비로운 어버지이신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동쪽으로 우리나라까지 전해져서 진리의 빛을 높이 밝히고, 만대에 길이 중생을 이익되게 하는 부처님의 참된 도량을 건설하였으니 덕숭산에 자리한 수덕사이다. 동방의 성지 덕숭德崇과 수덕修德이 덕으로 이름한 것은 완전한 해탈과 열반의 미묘한 마음을 체득하고 통달해서 올바른 법의 지혜로운 안목으로 진리보배를 전함에 있어서는 조사의 안목과 중생의 본래 마음이 둘이 아닌 자비와 지혜가 평등하고 원만한 가풍을 드러낸 것이다. 산세를 살펴보면 백두산을 중심으로 함경과 장백의 두 산맥이 나누어진다. 그 장백산의 기상이 길게 이어져서 묘향산, 송악산, 삼각산을 만들고 다시 차령의 한 자락 왕자산을 지나 솟아난 덕숭산은 그 연원이 수려한 만큼 자태가 웅장하고 아름답다. 북쪽의 가야산을 배경으로 하고 서남쪽의 오서산, 동남쪽의 팔봉산이 마치 병풍처럼 둘러싸고 연꽃같은 지형의 중심에 웅장하게 자리한 덕숭산은 청룡백호가 그림같이 화려하다. 사찰 안에서 보는 산등선은 부채살처럼 유연하며 멀고 가까운 주변의 산들은 마치 신하가 왕을 향하여 몸을 굽힌 모습이고, 기암괴석과 울창한 소나무와 흰돌이 서로 어우러져서 호서의 금강산으로 불린다
백제 때 덕숭산에 사찰을 처음 지은 것은 침류왕 원년 9월에 해외에 불교를 전하고자 원력을 세운 마라난타(摩羅難陀)가 인도에서 중국의 동진을 거쳐 384년 9월 광주(廣州)에 도착함으로부터 기원한다. 마라난타가 백제에 오자 침류왕이 궁중으로 영접하고 정성을 다해 공양하며 법문을 듣고 385년 봄에 한산(漢山)인 광주에 절을 지어 계시도록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열 분의 스님이 출가하여 흙으로 탑을 세우고 선실을 지어서 수행하게 되었는데, 이것이 호서에 불법의 등불이 켜지게 된 시초이다. 세상의 빼어난 명당 덕숭산에 호서의 제일가는 사찰인 수덕사가 본격적으로 문을 연 것은 지명법사가 585년 수나라에 유학하고 귀국하여 전법할 곳을 물색하던 중 법왕 1년(599)에 이곳 덕숭산이 불교가 길이 전해질 곳임을 알고 절을 지어 수덕사라 이름한 후부터이다. 이 땅에 전래된 불교가 무르익어 독실한 불자인 법왕이 그해 12월 전국에 살생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리고, 사냥하는 매를 풀어주고 고기 잡는 그물을 불태우게 하는 등 불살생의 자비행으로 국가 정책으로 삼으니 전 국민이 불교의 덕화를 알게 되었다. 지명법사는 대웅전을 짓고 고구려의 화성(畵聖) 담징(曇徵)을 초빙하여 벽화를 그리니 수덕사의 사격이 완전히 갖추어졌다. 지명의 뒤를 이어 제자 혜현이 2대 주지가 되어 일체 중생이 모두 부처가 되는 가르침을 담고 있는 『법화경』을 강설하며 중생들을 교화하였다. 법문을 들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도량에 끊이지 않았으나, 어느 날 문득 달라산으로 은둔하여 법화정진을 계속하다가 당나라 정관 초에 세수 58세로 입적하였다. 호랑이에게 육신을 보시한 스님의 유해는 오로지 혀만 남아 3년이 지나도록 적홍색을 띄었고 유연하여 살아있을 때와 같았으니 법화의 일불승(一佛乘)에 대한 묘리를 강설한 공덕이 아니겠는가. 지명법사가 수덕사의 뒤쪽에 수선장을 마련하고 정혜사(定慧寺)라 하였으니, 덕숭산은 이미 일승의 참된 이치를 지관하는 수행제일의 도량이 되었다. 제3대 주지 숭제법사(崇濟法師)는 의자왕 7년 백제 말에 국가와 민족을 위해 법화경 법회를 열고 기도정진하였다. 통일신라 문무왕 때에는 원효대사가 이곳 수덕사와 정혜사에서 수도하며 가야산 남쪽에 토굴을 지어 정진하였다고 해서 원효봉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고려시대에는 1308년 퇴락한 대웅전을 비롯하여 사찰을 크게 중창하였다. 이때 중수한 대웅전은 백제의 아름다운 목조건축을 계승한 그대로 현재까지 전해져서 우리나라 목조건물 중에서 가장 오래되어 국보 제49호로 지정되었다. 고려말의 무학대사도 수덕사와 간월도를 왕래하면서 선풍을 진작하였다. 조선시대는 세종 2년 전체의 당우를 중수하였고, 중종 23년에도 보수하고 단청하였다. 영조 46년에 당우를 새롭게 중수하였고, 순조 3년에도 전각과 당우를 중수하며 사격을 유지하였다. 헌종 11년에 흥선대원군 이하응이 아버지의 묘지터를 구하던 중 가야산 아래의 가야사 터가 2대에 걸쳐 왕이 나올 명당이라는 지관의 말을 듣고 1846년 충청도관찰사를 시켜서 가야사의 스님들을 협박하여 쫓아버리고 빈 절이 되자 이듬해 3월 18일 새벽 사찰을 불태우고 석탑 자리에 아버지 남연군(南延君)과 어머니의 묘를 이장하여 합장하고 선산의 위엄을 과시하기 위하여 가야산 일대와 덕숭산 부근까지 권력을 써서 제멋대로 왕가의 소유로 편입시켰다. 이로 인하여 사찰 부지만 남은 수덕사는 60여년 동안 인적조차 없어진 적막한 지경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부처님과 보살님의 가호로 광무 2년 35세의 젊은 도인이 부처님과 조사의 법등을 높이 들고 수덕사를 찾아오니 그가 바로 을사보호조약을 반대하고 항일독립투쟁에 앞장 서서 사악한 무리들을 꺽어 이기고 정법을 펴는 일에 진력한 초인적인 대장부 만공선사이시다. 스님은 근세 한국불교의 중흥조인 경허선사(鏡虛禪師)의 제자로서 부처님의 제 76세손이요, 임제선사의 39세손이며, 청허대사의 14세 법손이시다. 스승인 경허선사는 약관의 나이에 8만대장경과 노장과 유교의 사상에 정통하여 핵심을 잘 알고 잘 설명하는 종통과 설통을 겸비하신 대종장으로서 그 명성이 높았으나 확철대오한 조사의 선법을 널리 펼치기 위해 세간의 명망을 초연히 버리는 귀감을 후학들에게 보이셨다. 스님께서 서산 연암산 천장사에 계실 때 월면(月面)스님에게 “하늘의 구름과 달이 계곡 물 속의 구름과 달이 같은 것이, 수산선자의 대가풍이로다. 은근히 무늬 없는 도장을 부촉하나니, 일체의 방편 능력은 깨달음 가운데 있다.”는 전법게와 만공(滿空)이라는 호를 전해주었다. 경허스님의 법을 전해 받은 만공스님은 민족의식 각성과 국권회복 만이 이 나라 국민들의 행복과 기쁨을 위한 당면 불사임을 자각하고 그 불사를 성취시킬 민족 자주 본산으로서 덕숭산을 선택하였다. 선사는 1890년 15세에 출가하시고, 1895년 7월 25일 새벽 “마땅히 법계의 성품을 관찰해 보라, 일체가 오직 마음이 인연 지었음이다.”는 종송(鐘頌)을 하시면서 확실하게 깨달으시고 “깨달음의 세계는 이치와 현상, 옛과 지금을 벗어났구나. 흰 구름과 시원한 바람은 스스로 가고 오네. 무슨 일로 달마는 서천을 넘었나? 축시에 닭이 울고 인시에 해가 뜨네.”라는 오도송을 노래하였다. 선사는 법안이 밝고 철저한 종사일뿐 아니라 늠름한 기상과 풍모는 하늘을 찌를 듯 하였고, 일반적인 사중의 일을 처리함과 도의 일에 있어 자유자재하였다. 마치 사명스님이 임진왜란 때 울산 서생포(西生浦)에서 왜장 가등청정(加藤淸正)이 “조선에 보물이 있느냐”는 물음에 “당신의 머리가 바로 조선민족의 보배”라하여 적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한 것처럼 선사 또한 국권을 잃은 조선 자립과 자주의 상징이었다. 1911년 3월 11일 조선총독부는 조선에 대한 식민지 정책에 가장 큰 장벽이었던 조선 전통불교의 뿌리 깊은 혼을 말살하기 위해 많은 음흉한 계략을 도모하였다. 전국 사찰의 통제권을 장악하려는 음모로 조선사찰령을 공포하고, 서울에 어용총본산(御用總本山)인 박문사(博文寺)를 짓고, 31본산 주지회의를 주도하려고 회의를 소집하였다. 그때 친일에 아부하는 대처승 주지들이 조선불교를 융창하게 한 총독부의 은혜와 노력이 크다면서 왜곡하고 아첨하니, 이 자리에 참석한 만공스님은 남차랑(南次郞) 총독을 야단치고 대중을 슬픈 눈으로 돌아보면서 “우리는 청정비구를 강제 결혼시킨 죄로 무간지옥에 떨어진 역대 총독을 구출하는 자비 밖에 남은 일이 없다.”고 크게 꾸짖고 반대하여 박문사의 총본산제도를 무산시키기도 하였다. 민족을 각성시키는 일이 불성을 깨달음과 다름이 없음을 깨달아 국민들을 계도하였으니, 참으로 스님은 자비가 원만한 보살이요. 기개가 하늘에 닿은 파사현정(破邪顯正)의 벽안종사(碧眼宗師)로서 한민족과 한국불교의 자랑이요, 덕숭산의 영원한 긍지이다. 정혜사 능인선원(能仁禪院) 밑에 초가집을 지어 금선대(金仙臺)라 이름하고 주석하면서 동쪽 바위에 나가대정(那伽大定)이라 새기고 납자를 제접(提接)하니, 스님의 명성이 전국에 떨쳐 그의 선풍이 천하를 진동하였다. 한편 비구니 수행환경 개선을 위해 정혜사 뒤 북쪽 등 너머에 견성암을 짓고 산내 비구니를 모두 모아 수행하게 하니, 황해도 연백산 출신 비구니가 80여석의 전답을 선량답으로 헌납하여 오늘날 호서제일의 비구니 수선도량이 되었다. 1910년 한일합방이 강행되자 능인선원에서 구국광복을 위한 용맹정진결사를 시작한 이후 1980년까지 무려 132회의 안거동안 방함록(芳御錄)에 나타난 스님이 3,300여명에 달하였을 뿐만 아니라, 스님의 법향에 배우고 깨달은 고승대덕이 많이 나왔으니 한국 불교를 상징하는 선사로 보월(寶月), 고봉(古峯), 금봉(錦峯), 전강(田岡), 금오(金鳥), 효봉(曉峯), 용음(龍吟), 벽초(碧超), 정동산(鄭東山), 하동산(河東山), 혜암(惠菴), 고송(古松), 인곡(仁谷), 석주(昔珠), 춘성(春城), 성월(惺月), 학몽(鶴夢) 등이다. 1921년 백용성(白龍城), 오성월(吳惺月) 등과 함께 서울 안국동에 선학원을 창립하여 조실로 추대되었고, 1934년에 재단법인으로 인가받아 초대 이사장에 피선되어 선의 대중화를 통한 일본을 이겨내고 극복하자는 극일각성도량을 일구기도 하였다. 1935년에는 전국수좌회의에서 선종종정(禪宗宗正)으로 추대되었고, 같은 해 수덕사에 25자 높이의 석조관음보살입상을 조성하였으며, 이어 창덕궁으로 이강 의친왕을 찾아가 대원군이 왕가 소유로 편입하였던 가야사 소유 임야 750정보와 수덕사 소유 임야 150정보를 돌려받았을 뿐 아니라, 고려 공민왕으로부터 전래된 왕실의 비보(秘寶)인 거문고까지 하사받았으니, 이는 “단지 하나의 구멍 없는 피리를 잡고 그대를 위하여 태평가를 불어주리라.”는 선사의 일 없이 태평스러운 도인의 면모를 흠모한 선물인 것이다. 1941년에는 무학대사가 수도하던 간월암 터에 지방토호인 안씨 집안에서 쓴 묘를 이전시키고 간월암을 복원하고 “부처님과 조사도 사귀지 않는 나그네. 어찌 푸른 파도와 친하겠는가, 나는 본래 반도사람이라, 자연히 이와 같이 산다.”고 탄식하며 국권회복기도를 계속하였다. 1945년 8월 12일 기도를 마치고 전월사(轉月舍)로 돌아온지 3일만인 15일에 한용운 선생이 그의 아들을 시켜 전해준 광복 소식을 듣고 기쁨에 넘쳐 춤을 추다가 뜰 앞에 떨어진 무궁화 꽃잎으로 “세계일화(世界一花)”라고 휘호하였으니, 선사에게 있어 광복의 염원은 한민족의 순수한 애정과 왜적의 증오를 넘어선 무적의 자비심에 의한 만민의 평화였음을 알 수 있다. 1946년 10월 21일 세수 76세, 법랍 62하로 단정히 앉아 입적하였다. 용암혜언(龍岩慧彦), 경허성우(鏡虛惺牛)로 이어지는 스님의 법은 혜암현문(惠菴玄門), 벽초경선(碧超鏡禪), 원담진성(圓潭眞性)으로 계승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7세에 출가하여 만공선사를 25년간 시봉하면서 1934년에 주지가 된 손상좌 벽초 선사가 만공스님을 보필하여 500여 두락의 농지를 스스로 경작하여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는 백장선사(百丈禪師)의 선농일치사상을 실천하였다. 1936년부터 중창불사를 시작하여 대웅전 앞마당의 토탑이 있던 자리에 조인정사(祖印精舍)를 창건하고, 소림초당(少林草堂), 향운각(香雲閣), 백련당, 견성암 등도 건립하였으며, 1940년에는 전월사를 지어 주석하였다. 수덕사 초대주지를 거쳐 3대 주지를 맡은 이후 1962년 마곡사 수말사에서 수덕사를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로 승격시켰고, 1966년 견성암을 수덕사 서쪽으로 이전하고, 1968년 소실된 극락암(極樂庵)을 인법당(人法堂)으로 복원하였다. 수덕사에서 정혜사에 이르는 1080계단 및 전답을 개간하고 조성하는 등 전체 산중을 위해 큰 업적을 남겼고, 1985년 덕숭총림 2대 방장으로 추대되었고, 1986년 3월 세수 87세, 법납 80세로 입적하였다. 1971년 원담선사(圓潭禪師)가 주지로 취임하여 경허와 만공대선사의 법어집을 발간하고 선종의 종찰의 가풍을 선양하면서 범종을 주조하고 동쪽의 명부전, 청련당, 범종각, 법고각 등의 창건과 진입로와 주차장을 신설하는 등 사세를 크게 확장하였다. 1978년 설정(雪靖) 송원화상(松原和尙)이 주지에 취임하여 전답 7,500평이 부당하게 개인 명의로 되어 있는 것을 사찰 소유로 환수하고 2,400평을 매입하였으며, 사하촌 정비계획을 수립하여 착수하였고, 명부전 지장보살상과 시왕목탱화를 조성하였다. 1983년 원담선사의 뜻을 받들어 대한불교조계종 덕숭총림(德崇叢林)을 발의하니, 근대의 선풍을 진작하고 중흥한 곳임을 인정한 중앙종회의 결의로 그 뜻이 성취되어 초대방장에 혜암선사(惠菴禪師)가 추대되어 선의 종찰의 위상이 더욱 높아졌다. 1985년 건평 108평의 황하정루(黃河精樓)의 신축 기공을 하였고, 1986년 견성암을 확장하였으며, 또 수덕사에서 정혜사 간의 운송로를 개설하였고, 1987년 215평의 요사를 중건하였다. 1985년 임야 144,000평을 매입하면서 대내외적으로 수행도량으로서의 내실이 확고해졌다. 1984년 초대방장으로 추대된 혜암선사는 1976년 조실로 추대된 이래 후학을 제접하다가 1985년 세수 101세 법납 89하로 입적하였다. 1988년 12월 법성화상(法城和尙)이 주지에 취임하여, 환희대(歡喜臺)에서 진행 중이었던 원통보전(圓通寶殿)과 요사를 준공하였으며 황하정루의 낙성을 보게 되었다. 1992년 4월 인곡법장화상(仁谷法長和尙)이 주지에 취임하여 각 분야 전문가의 자문을 받아 덕숭총림 성역화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획기적인 불사를 전개하여 개창 이래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가람으로 일신되었다. 즉 1993년 백련당 84평을 개축하고, 대웅전 앞마당을 확장하여 선 수행의 요람으로 정돈하였으며, 1994년에는 대웅전의 전망과 환풍을 장애하는 황하정루를 해체, 중건하니 반지하 228평은 성보박물관으로, 지상 1층 120평과 지상 2층 108평은 현대식 강당으로 활용하되 주변과의 조화를 위해 외관을 장엄하였다. 청련당도 지상 72평은 요사로 쓰고, 지하 108평은 대중식당으로 개조하였으며, 조인정사를 동쪽으로 옮기고, 그 동북쪽에 염화실(拈花室)을 신축하였다. 일주문을 옮기고 금강문과 천왕문도 높이 세웠으며, 서쪽에 무이당(無二堂)과 서북쪽에 심우당(尋牛堂)을 신축하여 전통가람의 면모를 갖추었다. 제 3대 방장 원담선사를 정점으로 42개의 말사와 5개의 산내암자를 거느리고 선풍을 진작하고 있는 오늘의 수덕사는 전통의 가람배치와 원형보전 그리고 실용적 가치를 겸한 안목으로 일신되기에 이르렀으며, 나아가 가람외장에 그치지 않고 유구한 수덕사 가풍을 계승할 것을 엄숙히 발원하여 선종의 으뜸가는 사찰이라는 명칭에 걸맞게 한국불교 선학연구원을 설립하여 경허와 만공대선사의 선사상은 물론 한국불교의 자랑과 덕숭총림의 진면목을 국내외에 널리 선양하여 일체중생의 이고득락(離苦得樂)을 부단히 실천하고 있다. 이것은 위로는 삼보의 가호와 경허, 만공, 벽초, 원담 등 대종사의 음덕, 그리고 법장 주지의 깊은 원력과 굳은 신념의 결정이라고 하겠다. 밖으로 장엄하고 안으로 엄숙히 하며,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겸비한 오늘의 대작불사(大作佛事)를 토대 삼아 민족과 함께 모든 중생이 귀의할 대선지식(大善知識) 이 끊임없이 배출되는 대가람으로 영원히 존속되기를 기원하는 바이다.
불기2546 임오 서기2002년 월 일
가야산 귀로굴 가산지관 삼가 찬하다
허재 이규찬 삼가 쓰다
수덕사 주지 법장 건립
석공 안병수
방장 진성원담
수좌 송원
유나 우송
성호, 혜우, 혜안, 법현, 법정, 법안, 법찬, 법광, 법룡, 선광, 인행, 지운, 정묵, 보정,
흥법, 효성, 시조, 수암, 보제, 정암, 영도, 정효, 효정
시회상주합원 대중 일동
원문
德崇山修德寺事蹟碑
三界導師요 四生慈父이신 釋迦世尊의 가르침이 東漸하면서 傳燈의 빛을 높이 밝히고, 萬代에 길이 衆生을 利益케하는 實相金地를 建設하였으니 德崇山에 자리한 修德寺이다. 東方의 聖地 德崇과 修德이 德으로 이름한 것은 涅槃妙心을 體達하고 正法眼藏을 傳함에 있어 祖師의 眼目과 衆生의 心地가 둘이 아닌 悲智圓滿의 家風을 드러냄이다. 山勢를 살펴보건대 白頭山을 主峰으로 咸鏡과 長白의 兩大山脈이 흐르고 그 長白의 氣象이 邐迤하여 妙香과 松嶽과 三角을 연이어 占坐한 後 車嶺의 한 자락 王字山을 지나 安坐한 德崇山은 그 淵源이 秀麗한 만큼 姿態 또한 雄麗하다. 北쪽의 伽耶山을 背景으로 西南의 烏棲山, 東南의 八蓬山이 마치 屛風처럼 둘러싸고 그 中心部 蓮心에 雄壯하게 자리한 德崇山은 靑龍白虎가 그림같이 華麗하고 內局의 嶝線은 부채살처럼 柔軟하며 遠近의 案山은 마치 臣下가 王을 향하여 鞠躬하는 모습인양하고 奇岩怪石과 松蘿白石 또한 어우러져 湖西의 金剛으로 일컫는다. 百濟佛敎의 開創은 枕流王 元年 九月 海外傳法에 願을 세운 摩羅難陀가 印度에서 中國의 東晋을 거쳐 三八四年 九月 廣州에 到着함으로부터 紀元한다. 百濟의 枕流王이 宮中으로 迎接하고 精誠을 다해 供養하며 法門을 듣고, 三八五年 봄 漢山인 廣州에 절을 지어 住錫토록 하였다. 이때 처음으로 열 분의 스님이 得度하여 土塔을 세우고 蘭若를 얽어 修行하였으니 비로소 湖西에 佛法의 燈불이 밝았다. 天下勝地 德崇山에 湖西의 第一伽藍 修德寺가 本格的으로 開山된 것은 法王一年(五九九)에 智明法師가 五八五年 隋에 留學하고 歸國하여 傳法道場을 물색하던 中 이곳 德崇山이 法輪常轉할 道場임을 알고 절을 짓고, 修德寺라 이름하면서 부터이다. 때는 이미 東漸의 德化가 무르익어 佛敎에 歸依한 法王이 그해 十二月 全國에 禁殺令을 頒布하고 사냥하는 새매를 풀어주고 고기 잡는 그물을 불태우게 하는 등 不殺生의 慈悲行으로 國是를 삼았으니 民生은 벌써 佛敎의 德化를 입게 되었다. 智明法師는 뒤이어 大雄殿을 짓고 高句麗의 畵聖 曇徵을 招聘하여 壁畵를 그리게 하니 이로써 修德寺의 面貌가 完全히 갖추어졌다. 智明의 뒤를 이어 그의 弟子 惠顯이 二代 住持가 되어 一乘妙法의 法華經을 講說하며 衆生을 敎化하니 밀려오는 聞法大衆의 자취로 桃李成蹊를 이루었으나 어느 날 문득 達拏山으로 隱遁하여 法華精進을 계속하다가 貞觀初에 世壽五八歲로 入寂하였다. 호랑이에게 布施한 스님의 遺骸는 오로지 혀만 남아 三年이 지나도록 赤紅色으로 柔軟하여 生時와 같았으니 法華一乘의 妙理를 講說한 功德이 아니겠는가. 智明法師 또한 修德寺의 뒤쪽에 修禪場을 마련하 고 定慧寺라 하였으니 德崇山은 이미 一乘의 實相妙理를 止觀하는 修禪第一道場이 되었다. 第三代 住持 崇濟法師는 義慈王 七年 百濟末의 國家와 民族을 위해 法華經法會를 열고 祈禱하였다. 統一新羅 文武王 때에는 元曉大師가 이곳 修德寺와 定慧寺에서 修道하였으며 伽倻山 南쪽에 土窟을 짓고 精進하여 元曉峰이라는 이름을 남겼다. 高麗時代에는 一三0八年 頽落한 大雄殿을 비롯하여 一新重修하였는데 이때 補修한 大雄殿은 百濟의 아름다운 建築美를 傳承한 우리나라 木造建物 中 가장 오래된 國寶 第四十九號이다. 이즈음 無學大師 또한 修德寺와 看月島를 往來하면서 禪風을 振作하였다. 朝鮮時代에는 世宗 二年 全堂宇를 重修하고, 中宗 二十三年에도 補修하고 丹靑하였으며, 英祖 四十六年에는 堂宇를 一新重修하였고 純祖 三年에도 殿堂을 重修하며 寺格을 維持하여 왔으나 憲宗 十一年 興宣大院君 李昰應이 아버지의 墓터를 구하던 중 伽倻山 下의 伽倻寺 터가 二代에 걸쳐 王이 나올 名堂이라는 地官의 말을 믿고 一八四六年 忠淸道觀察使로 하여금 伽倻寺의 스님들을 脅迫하여 逐出하고 빈 절이 되게 한 다음 이듬해 三月 十八日 새벽 寺刹을 全燒케하고 鐵尖石塔 자리에 아버지 南延君과 어머니의 墓를 옮겨 合葬하고는 先山의 威嚴을 誇示하기 위해 伽倻山 一帶와 德崇山 附近까지를 任意로 王家所有로 編入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寺刹敷地만 남은 修德寺는 六十餘年 동안 人跡조차 끊어진 寂寞한 地境에 이르렀다. 그러나 佛·菩薩의 加護로 光武 二年 三十五歲의 젊은 道人이 佛祖의 法燈을 높이 들고 修德寺를 찾아오니 그가 바로 乙巳保護條約을 반대하고 抗日獨立鬪爭에 앞장선 摧邪顯正의 超人 丈夫 滿空禪師이시다. 스님은 近世韓國佛敎의 中興祖인 鏡虛禪師의 弟子로서 世尊의 第七十六世요, 臨濟의 三九世이며, 淸虛의 十四世法孫이시다. 스승인 鏡虛禪師는 弱冠에 八萬藏經과 老莊儒典에 正統하여 宗說을 兼通한 大宗匠으로서 그 名聲이 높았으나 廓徹大悟한 法의 闡揚을 위해 世間의 名望을 超然히 떨쳐버리고 後學의 빛나는 龜鑑이 되었다. 스님께서 瑞山 燕巖山 天藏寺 祖室로 있을 때 月面스님은 雲月溪山處處同 叟山禪者大家風 慇懃分付無文印 一段機權活眼中이라는 傳法偈와 滿空이라는 號를 전해 받았다. 鏡虛스님의 法을 이어받은 滿空스님은 民族意識覺醒과 國權回復이 이 나라 民生福樂을 위한 當面佛事임을 自覺하고 그 佛事를 成就시킬 民族自主本山으로써 德崇山을 選擇하였다. 禪師는 一八九0年 十五歲 때 得道하셨으며, 一八九五年 七月 二十五日 새벽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鐘頌을 하시면서 豁然大悟하고는 空山理氣古今外 白雲淸風自去來 何事達磨越西天 鷄鳴丑時寅日出이라는 悟道頌을 읊었다. 禪師는 法眼이 明徹한 宗師일뿐 아니라 늠름한 氣風은 하늘을 찌를 듯 하였으니 家襄事와 道中事에 自由自在하였다. 마치 泗溟스님이 壬辰倭亂 때 蔚山 西生浦에서 倭將 加藤淸正이 朝鮮에 寶貝가 있느냐는 물음에 당신의 머리가 바로 朝鮮民族의 寶貝라하여 敵將의 肝膽을 서늘하게 하였음과 같이 禪師 또한 國權을 잃은 朝鮮自主의 象徵이었다. 一九一一년 三月 十一日 朝鮮總督府는 日帝의 植民地 政策에 가장 큰 障壁이었던 朝鮮傳統佛敎의 굳은 魂을 抹殺하고자 갖은 兇策을 圖謀하였다. 全國寺刹의 統制權을 掌握하려는 陰謀로 朝鮮寺刹令을 公布하는 한편 서울에 博文寺를 지어 御用總本山으로 하고 三一本山住持會議를 主導하려고 會議를 召集하였다. 그때 親日阿附派 帶妻住持들이 朝鮮佛敎를 隆昌케한 總督府의 恩功이 至大하다며 歪曲阿諂하니 보다 못한 當時 이 자리에 參席하였던 滿空스님은 南次郞總督을 크게 叱咤하고 大衆을 슬픈 눈으로 돌아보면서 우리는 淸淨比丘를 帶妻토록 한 罪로 無間地獄에 떨어진 歷代總督을 救出하는 慈悲 밖에 남은 일이 없다고 大喝하여 博文寺의 總本山制度는 水泡로 돌아갔다. 民族의 覺醒을 主導함이 佛性을 體達함과 둘이 아님을 깨달아 民生을 啓導하였으니 참으로 스님은 慈悲圓滿의 菩薩이요 氣槪衝天한 破邪顯正의 碧眼宗師로서 韓民族과 韓國佛敎의 자랑이요, 德崇의 永遠한 矜持이다. 能仁禪院(定慧寺) 밑에 草屋을 지어 金仙臺라 이름하고 住錫하면서 東쪽 岩壁에 那伽大定이라 標識하고 衲子를 提接하니 스님의 名聲이 全國에 떨쳐 그의 禪風이 天下를 風靡하였다. 한편 比丘尼 修行環境 改善을 위해 定慧寺 뒤 北쪽 등 너머에 見性庵을 짓고 山內 比丘尼를 모두 모아 修行케하니 黃海道 延白山出身 比丘尼가 八十餘石의 所有畓을 禪糧畓으로 獻納하여 오늘에 湖西第一의 比丘尼 修禪道場이 되었다. 一九一0年 韓日合邦이 强行되자 能仁禪院에서 救國光復을 위한 勇猛精進結社를 맺은 以後 一九八0년까지 무려 一三二回의 安居동안 芳啣錄에 나타난 스님이 三千三百餘名에 達하였을 뿐 아니라 스님의 法香에 薰習된 高僧大德이 많았으니 韓國佛敎를 象徵하는 大禪師로 寶月·古峯·錦峯·田岡·金鳥·曉峯·龍吟·碧超·鄭東山·河東山·惠菴·古松·仁谷·昔珠·春城·惺月·鶴夢 등이다. 一九二一年 白龍城·吳惺月 등과 함께 서울 安國洞에 禪學院을 創立하여 祖室로 推戴되었고, 一九三四年 財團法人으로 認可받아 初代 理事長에 被選되어 禪의 大衆化를 通한 克日覺醒道場을 일구기도 하였다. 一九三五年 全國 首座會議에서 禪宗宗正으로 推戴되었고, 同年 修德寺에 二十五尺 높이의 觀音立石像을 造成하였으며, 이어 昌德宮으로李堈 義親王을 찾아가 大院君이 王家 所有로 編入하였던 伽倻寺 所有 林野 七百五十町步와 修德寺 所有林 一百五十町步를 돌려받았을 뿐 아니라 高麗恭愍王으로부터 傳來된 王室의 秘寶인 거문고까지 下賜받았으니 이는 只把一枝無孔笛 爲君吹起太平歌를 부르는 禪師의 無事太平道人의 面貌를 欽慕한 膳物인 것이다. 一九四一年에는 無學大師가 修道하던 看月庵터에 地方土豪인 安氏家의 墓를 移轉시키고 看月庵을 復元하여 佛祖不友客 何事碧波親 我本半島人 自然如是止라 嘆息하며 國權回復祈禱에 餘念이 없었다. 一九四五年 八月 十二日 祈禱를 마치고 轉月舍로 돌아온지 三日만인 十五日에 韓龍雲先生이 그의 아들을 시켜 傳해준 光復消息을 듣고 기쁨에 넘쳐 춤을 추다가 뜰 앞에 떨어진 無窮花 꽃잎으로 世界一花라 揮毫하니 禪師에게 있어 光復의 念願은 國粹의 愛情과 倭敵의 憎惡를 넘어선 無敵의 萬民平和였음을 알 수 있다. 一九四六年 十月 二十一日 世壽 七六歲, 法臘 六十二夏로 端正히 앉아 入寂하였다. 龍岩慧彦·鏡虛惺牛로 이어지는 스님의 法은 惠菴玄門·碧超鏡禪·圓潭眞性으로 繼承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七歲에 出家하여 滿空禪師를 二十五年間 侍奉하면서 一九三四年에 住持가 된 孫上座 碧超禪師가 滿空스님을 輔弼하여 五百餘斗落의 農地를 自耕하여 一日不作이면 一日不食이라는 百丈禪師의 禪農一致思想을 實踐하였다. 一九三六年부터 重創佛事를 始作하여 大雄殿 앞마당의 土塔이 있던 자리에 祖印精舍를 創建하고 少林草堂·香雲閣·白蓮堂·見性庵 등도 建立하였으며 一九四0年에는 轉月舍를 지어 住錫하였다. 修德寺 初代住持를 거쳐 三代住持를 맡은 以後 一九六二年 麻谷寺 首末寺에서 修德寺를 大韓佛敎曹溪宗 第七敎區 本寺로 昇格시키는 한편 一九六六年 見性庵을 修德寺 西쪽으로 移轉하고 一九六八年 燒失된 極樂庵을 人法堂으로 復元하였으며 修德寺에서 定慧寺에 이르는 一千八十 階段 및 開畓 造成 등 全體 山中을 위해 큰 業績을 남겼으며 一九八五年 德崇叢林 二代方丈으로 推戴되어 一九八六年 三月 世壽 八十七歲 法臘 八十歲로 入寂하였다. 一九七一年 圓潭禪師가 住持로 就任하여 鏡虛와 滿空大禪師의 法語集을 發刊하고 禪之宗刹의 家風을 宣揚하면서 梵鐘을 鑄造하고 東쪽의 冥府殿·靑蓮堂·梵鐘閣·法鼓閣 등의 創建과 進入路와 駐車場을 新設하였고 寺勢를 크게 擴張하였다. 一九七八年 雪靖 松原和尙이 住持에 就任하여 田畓 七千五百坪이 不當하게 個人名義로 된 것을 寺刹所有로 還收하고 二千四百坪을 買入하였으며 이어서 寺下村 整備計劃을 樹立하여 着手하였고, 冥府殿 地藏菩薩像과 十王木幀畵를 造成하였다. 一九八三年 圓潭禪師의 뜻을 받들어 大韓佛敎曹溪宗 德崇叢林을 發議하니 近代禪風을 振作한 中興處임을 認定한 中央宗會의 決議로 그 뜻이 成就되어 初代方丈에 惠菴禪師가 推戴되었고 禪之宗刹의 威嚴은 더욱 높았다. 一九八五年 建坪一百八十坪의 黃河精樓의 新築을 起工하였고 一九八六年 見性庵을 擴場하였으며, 繼續하여 修德寺에서 定慧寺 間 運送路를 開設하고 一九八七年 二百十五坪의 寮舍를 重建하였고 一九八五年 林野 十四萬四千坪을 買入하였다. 이때 對內外的으로 修行道場으로서의 內實이 다져졌다. 一九八四年 初代方丈으로 推戴된 惠菴禪師는 一九七六年 祖室로 推戴된 以來 後學을 提接하다가 一九八五年 世壽 一百一歲 法臘 八十九夏로 入寂하였다. 一九八八年 十二月 法城和尙이 住持에 就任하였고 歡喜臺에서 進行 中이었던 圓通寶殿과 寮舍를 竣工하였으며 黃河精樓의 落成을 보게 되었다. 一九九二年 四月 仁谷法長和尙이 住持에 就任하여 各 分野 專門家의 諮問을 받아 聖域化 綜合計劃을 樹立하고 劃期的인 佛事를 展開하여 開創 以來 가장 雄壯하고 아름다운 伽藍으로 一新되었다. 즉 一九九三年 白蓮堂 八十四坪을 改築, 大雄殿 앞마당을 擴張하여 行禪의 搖藍으로 整頓하였으며, 一九九四年에는 大雄殿의 前望과 換風을 障碍하는 黃河精樓를 解體重建하니 半地下 二百二十八坪은 聖寶博物館으로, 地上 一層 一百二十坪과 地上 二層 一百八坪은 現代式 講堂으로 活用하되 周邊과의 調和를 위해 外觀을 莊嚴하였다. 靑蓮堂도 地上 七十二坪은 寮舍 地下 一百八坪은 大衆食堂으로 改造하였으며 祖印精舍를 東쪽으로 옮기고 그 東北쪽에 拈花室을 新築하였으며 一柱門을 옮기고 金剛門과 天王門도 높이 세웠으며, 西쪽에 無二堂과 西北쪽에 尋牛堂을 新築하여 傳統伽藍의 面貌를 갖추었다. 第三代 方丈 圓潭禪師를 頂點으로 四十二個의 末寺와 五個의 山內庵子를 거느리고 禪風을 振作하고 있는 오늘의 修德寺는 傳統의 伽藍配置와 原形保全 그리고 實用的 價値를 兼한 眼目으로 一新되기에 이르렀으며, 나아가 伽藍外莊에 그치지 않고 悠久한 修德寺 家風의 內嚴을 發願하여 禪之宗刹이라는 名稱에 걸맞게 韓國佛敎 禪學硏究院을 設立하여 鏡虛·滿空大禪師의 禪思想은 물론 韓國佛敎의 자랑과 德崇叢林의 眞面目을 國內外에 널리 宣揚하여 一切衆生의 離苦得樂을 不斷히 實踐하고 있으니 이는 위로 三寶의 加護와 鏡虛·滿空·碧超·圓潭 등 大宗師의 陰德, 그리고 法長住持의 깊은 願力과 굳은 信念의 結晶이라고 하겠다. 外莊內嚴하며 雄雅兼備한 오늘의 大作佛事를 土臺 삼아 民族과 함께 모든 衆生이 歸依할 大善知識이 不斷히 輩出되는 大伽藍으로 永遠히 存續되기를 祈願하는 바이다.
佛紀二五四六 (壬午) 西紀二00二年 月 日
伽倻山 歸老窟 伽山智冠 謹撰
虛 齋 李 奎 粲 謹書
修德寺 住持 法長 建立
石工 安 秉 秀
方丈 眞性圓潭 首座松原 維那愚松 性浩 慧雨 慧眼 法賢 法定 法眼 法贊 法光
法龍 善光 仁行 只耘 正默 普靜 興法 曉惺 翅鳥 秀岩 菩提 頂菴 映都 淨孝 曉
精 時會常住合院 大衆 一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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