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전기 봉은사 주지, 선종판사를 역임하고 『허응당집(虛應堂集)』을 저술한 승려이다.
〈그림1〉허응당보우 진영(불교신문)
법명은 보우(普雨)이고, 법호는 허응(虛應, 1509-1565)또는 나암(懶庵)이다. 1509년 태어나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유학공부를 하다가 15세에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의 말사인 마하연암(摩訶衍庵)에서 출가하였다. 그 뒤 양주 용문사(龍門寺) 견성암(見性庵), 금강산 일대의 장안사(長安寺), 표훈사(表訓寺) 등에서 수행하였다.
1548년에 봉은사(奉恩寺) 주지 명곡대사(明谷大師)가 보우(普雨)에게 주지직을 물려주었고, 중종의 왕비였던 문정대비도 여러 차례 간청한 끝에 봉은사에 주석하기로 하였다. 문정왕후는 일찍부터 보우대사의 명성을 듣고 설법을 듣고 싶어했으며 억불숭유 정책 아래 박해당하던 불교를 중흥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금유생상사지법(禁儒生上寺之法)’을 두어 봉은사에 아무나 출입하는 것을 금지하여 유생들의 횡포를 막았다. 뿐만 아니라 선(禪)·교(敎) 양종의 승과고시를 실시하였는데 보우대사가 이를 체계화 시키며 불교중흥을 위해 앞장서게 되었다.
1555년에 불교중흥운동의 결실로 종단이 안정된 기반을 갖자 보우 대사는 판사직과 봉은사 주지직을 내려놓고, 춘천의 청평사(淸平寺)에서 5년간 머물렀다. 1560년에 다시 선종판사와 봉은사 주지직을 맡았으나, 선·교 분열을 계기로 승직이 박탈되어 봉은사 세심정(洗心亭)에 머물다 같은해 다시 선종판사로 임명되어 봉은사에 머물렀다.
보우스님은 『허응당집(虛應堂集)』에서 “선(禪)은 부처님의 마음이요, 교(敎)는 부처님의 말씀이니 선과 교가 절대로 다른것이 아니다”라는 선교일치(禪敎一致)를 주장하였다. 또한 일정론(一正論)』을 통해 “하늘은 곧 사람이요 사람이 곧 하늘이다”라 하여 불교의 유교의 융합을 강조하였다.
〈그림2〉허응당집 1(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그림3〉허응당집 2(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그러나 문정왕후가 죽은 이후에 유생들의 상소로 인하여 보우는 제주도로 유배갔는데, 그곳에서 제주목사 변협에게 타살되어 1565년 57세에 입적하였다. 『허응당집(虛應堂集)』에 임종게를 남겼다.
허깨비 같은 사람이 와서 허깨비 같은 사람의 고장에 들어가
50여 년을 미치광이 놀음을 하였도다.
인간세상 영욕을 모두 다 버리고
중의 탈을 쓴 꼭두각시 벗어나.
저서로는 시 문집인 『허응당집(虛應堂集)』을 비롯하여 『나암잡저(懶庵雜著)』, 『권념 요록(勸念要錄)』 등이 있으며, 봉은사에 허응당 보우대사 순교비가 세워져있다.
· 집필자 : 전통수행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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