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불교계를 중흥한 인물로 청허휴정의 법맥을 이은 승려이며, 전란 중 의병을 일으켜 국난 극복의 선두로 활약하였다. 저서로는 『사명당대사집』, 『분충서난록』등이 있다.
〈그림1〉사명당 유정 진영(泗溟堂 惟政 眞影)(통도사 성보박물관)
법명은 유정(惟政)이고, 호는 사명(四溟) 또는 송운(松雲, 1544-1610)이다.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黙)화상의 제자가 되었다. 팔공산·금강산 청량산 태백산 등지를 다니면서 선(禪)을 닦던 중 1586년 옥천사 상동암(上東庵)에서 오도(悟道)하였다. 청허 휴정의 문하에서 3년간 수도하며 『선가귀감(禪家龜鑑)』에 발문을 쓰기도 하였다.
1592년 금강산에서 안거하던 4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의승병 2천명을 이끌고 전란에서 큰 공을 세워 선조로부터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 받았다. 1592년 임진왜란 때,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이르러 삼강동에서 손판서(孫判書)·노승지(盧承旨)·박효자(朴孝子)와 함께 의병을 일으켰다.
1593년에는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가 하였고, 1594년에는 경상도 선종 총섭에 임명되었다. 1593년에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크게 전공을 세워 선조로부터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 받았다. 전후 네 차례에 걸쳐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와 회담을 가졌는데, 네 차례 회담에서 강화5조약으로 제시된 여러 조항을 하나하나 논리적인 담판지어 왜장을 물리쳤다. 1594년 사명이 의령에 주둔했을 때, 군량을 모으기 위하여 각 사찰의 전답에 봄보리를 심도록 하고, 산성 주위를 개간해 정유재란이 끝날 때까지 군량미 4000여 석을 비장했다. 선조는 그의 공로를 인정해 ‘가선대부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同知中樞府事)’ 벼슬을 내렸다.
1604년 사명유정은 청허 휴정이 입적했을 무렵에도 선조의 부탁으로 일본에 들어갔다. 사명은 일본에 가서 성공적인 외교성과를 거두고, 전란 때 잡혀간 3000여 명의 동포를 데리고 1605년 4월에 귀국했다. 선조는 왜란이 종결된 뒤 몇 고승들에게 벼슬을 내렸다. 이 가운데 유정을 도성 가까이 두고자 요청해 사명은 잠시 도성에 머물렀고, 영의정 벼슬을 받았지만 사양하고 승려의 본분으로 돌아가 세속나이 67세, 법랍 51년에 입적하였다. 저서로는 문집인 『사명당대사집』 7권과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 1권 등이 있으며, 입적후 제자들이 다비하여 합천 해인사 홍제암(弘濟庵)에 부도와 사명대사탑비를 세웠다.
삶이란 한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오.
죽음이란 한조각 구름이 스러짐이다.
뜬 구름은 본래 실체가 없는 것.
죽고 살고 오고감이 모두 그와 같도다.
· 집필자 : 전통수행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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