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학 자초는 조선 전기 제1대 태조의 왕사로서 지공, 나옹과 함께 삼대화상이라 불린다.
〈그림1〉무학대사(통도사 성보박물관)
선사의 법명은 자초(自超, 1327-1405)이며 법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이다. 무학은 삼기군[경남 합천군 삼가면]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라 배움으로 그를 뛰어넘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18세에 출가하여 소지(小止) 선사에게 구족계를 받고, 용문산 혜명 법장(慧明法藏) 국사에게 법을 인가받아 부도사(浮圖寺)에 머물며 선정에 몰입하였다. 여기서 20세 겨울에 『능엄경』을 읽고 홀연히 깨달은 것이 있었다. 이후 진주 길상사를 거쳐 묘향산 금강굴에 머물렀는데, 어느 날 수행 중에 깜빡 졸다가 크게 경책하는 종소리를 듣고는 그동안의 의문을 풀고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무학은 1353년(공민왕 2) 중국 원나라 연경(燕京)에 이르러 서천(西天) 지공의 제자가 되었다. 이듬해 정월에는 법천사(法泉寺)에서 나옹을 만났는데, 나옹은 무학의 법기(法器)를 단번에 알아보았다. 무학은 오대산 등 산천을 유력(遊歷)하다가 서산 영암사(靈巖寺)에서 다시 나옹을 뵙고 몇 년 동안 그곳에 머물렀다. 이때 무학은 선정에 들면 공양하는 것도 잊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1356년에 귀국한 무학은 3년 후 천성산에 머물고 있던 나옹을 만나 불자(拂子)를 받았다. 1361년에 칙령을 받은 나옹이 신광사에 주석하게 되어 무학도 그곳에 머물며 사사(師事) 받았는데, 시샘하는 무리로 인해 그곳을 떠나 은둔하였다.
무학은 나옹의 주도로 진행된 지공의 추모불사(追慕佛事, 1372)에 참여하면서 불교계에 알려졌다. 이후 송광사(松廣寺) 주지를 지냈으며, 3년 후에는 나옹에게 의발(衣鉢)을 받았다.
그러나 나옹이 입적(1376)하게 되자, 무학은 자취를 감추고 명산대찰을 두루 다니다가 석왕사(釋王寺) 토굴에서 이성계(李成桂)를 만나 조선 왕조창업에 참여하게 되었다. 무학은 1392년에 조선 태조의 칙령을 받아 송경(松京)에 이르렀다. 태조의 생일에 ‘조선왕사대조계종사선교도총섭전불심인변지무애부종수교홍리보제도대선사묘엄존자(朝鮮王師大曹溪宗師禪敎都摠攝傳佛心印辯智無碍扶宗樹敎弘利普濟都大禪師妙嚴尊者)’에 봉해졌다. 『동사열전』의 「무학왕사전」에 태조 이성계와 무학의 인연 이야기가 상세히 전해진다. 저술로는 『불조종파지도(佛祖宗派之圖)』, 『인공음(印空吟)』 등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또한, 불서(佛書)인 『장승법수(藏乘法數)』, 『인천안목(人天眼目)』, 『주심부(註心賦)』 등을 간행하였으며, 『대장경(大藏經)』을 인간(印刊)하여 봉안하였다.
묘엄존자 무학은 1405년(태종 5) 9월 11일 삼경에, 금장암(金藏庵)에서 열반하였다. 세수는 79세이고 법랍은 61년이었다.
〈그림2〉무학대사 승탑과 쌍사자석등(혜운)
· 집필자 : 전통수행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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