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조사선의 전개

조사선은 하택신회(何澤神會)가 ‘보리달마남종(菩提達摩南宗)’을 선언하며 북종선(北宗禪)과 남종선(南宗禪)으로 분리되고, 이후 선가오종(禪家五宗)은 임제종(臨濟宗)과 조동종(曹洞宗) 양대로 나뉘어 간화선(看話禪)과 묵조선(默照禪)으로 수행법이 발전되었다.
1. 중국의 불교와 선의 전래 이 글에서는 조사선의 전개를 논의하기 위해 먼저 중국의 불교전래와 선법의 전래를 간단히 언급하고 난 뒤, ‘조사선’이란 무엇인가와 함께 조사선의 전개를 논해갈 것이다.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후한 명제(明帝) 영평 10년(65) 명제가 꿈에 금인(金人)을 보고 대월지국(大月之國)에 구법하는 사절을 보내 『사십이장경(四十二章經)』을 베껴오라고 했다는 것이 최초라고 한다. 하지만 이에 앞서 명제의 아우인 초왕楚王 영英이 이미 불교를 알고 있었다고 하는 연대가 영평 8년(65)이므로 불교는 아마도 그 이전에 이미 전래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중국선불교의 시초는 기록상 황제로서 최초로 불교를 신봉한 사람인 후한(後漢)의 환제(桓帝, 147-176년 재위) 때로 본다. 환제의 재위시기인 건화(建和) 2년(146) 안식국에서 안세고가 낙양으로 들어와 이후 20년 동안 『안반수의경』과 『음지입경』등 선관에 관한 경전을 번역하고, 또 직접 사념처(四念處)나 삼십칠조도품(三十七助道品) 등을 실천한 것이 중국 선불교의 시초라고 보는 것이다. 김 태완, 『조사선의 실천과 사상』, 아난다총서 4, 장경각, 2001, p.34 참조. 이처럼 달마이전 중국 선불교의 동향은 안세고가 번역한 『안반수의경[현재의 『대안반수의경』]에 의거한 소승의 수식관과 지루가참 · 구마라집에 의해 소개된 대승의 선관들이 광범위하게 두루 수행되었으며 특정 학파나 종파의 소유물이 아니었다. 이런 경향은 『고승전』에 천태(天台)의 혜문(慧文)이나 혜사(慧思) · 지의(智顗)뿐 아니라, 화엄의 두순(杜順)과 지엄(智嚴), 밀교의 일행(一行) 등도 ‘선사’로 불린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6세기가 되면, 선은 천태종의 성립과 달마의 등장으로 이 두 계통이 점차로 중국 선불교를 주도하게 된다. 그 뒤, 당대(唐代)에는 달마계통에서 선종이 성립하고, 송대(宋代)에 이르면 오가칠종으로 융성하게 되어 중국 불교는 선종이 주도하게 되는 것이다. 김 태완, 『조사선의 실천과 사상』, 아난다총서 4, 장경각, 2001, p.35 참조. 2. 중국의 조사선(祖師禪)과 그 전래 ‘조사선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조사’란 어떤 인물을 말하는지 먼저 살펴보자. ‘조사’와 ‘조사선’이란 용어는 선을 탐구하는 연구자들에 의해 언제나 쓰이고 있는 말이지만, 그 정의와 해석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여기서는 국내에서 지금까지 수용하고 있는 대체적 논의를 중심으로 서술해나가기로 한다. 2.1 조사란 어떤 인물인가? ‘조사’라는 명칭은 여러 전적에 많이 보인다. 하지만 그 포함하고 있는 의미는 시대에 따라 변화를 거듭해왔음을 알 수 있다. 우선 조사라는 명칭이 쓰인 예를 몇 가지만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본래 조사라는 명칭은 중국고유의 말로서 『한서(漢書)』권97에 보이는 말이다. ‘한 문파의 학문의 창시자’로서 존경의 의미가 포함된 호칭이다. 이런 칭호가 초기선종의 불이나 여래의 의미와 같이 불교의 이상적 인격을 의미하는 말로서 쓰이기 시작한 것은 당(唐) 초기 선종계의 사람들에 의한 것으로 본다. 용어의 쓰임을 살펴보면, 『속고승전』권16 「석승조전(釋僧稠傳)」에 승조(480-560)가 북위를 대표하는 명승 불타선사에 ‘조사삼장(祖師三藏)’이라고 부른 예가 있고, 달마계의 선종에 있어서는 「중당사문법여(中唐沙門法如行狀)」의 법여(法如, 638-689)의 비문에 보리달마를 남천축삼장법사라 하고, 홍인(弘忍)에 대해서는 두 번이나 ‘조사’라고 부르고 있다. 또 북종선계의 선종사서인 정각(正覺)의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서문에는 현색(玄賾)의 약전에 ‘전등(傳燈)’이나 ‘조사(祖師)’, ‘수기(授記)’ 등의 초기선종의 독특한 고유한 명칭이 홍인과 그의 제자들의 활약에 의해 하나씩 정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8세기 초의 선종사서인 『능가사자기』 · 『전법보기(傳法寶紀)』등에 ‘부촉(咐囑)’, ‘인가(認可)’등의 선종용어가 홍인과 그의 제자들 사이에 사용되고 있다. 이와 같이 달마계통의 초기선종에서 쓰는 ‘조사’라는 호칭은 동산법문의 개창자인 홍인에 의해 ‘단순한 존경의 의미’로 쓰인 것이다. 그 뒤에 중국선종에서는 ‘여하시조사선래의(如何是祖師西來意)’라고 하는 정형구의 공안처럼 ‘인도에서 래조(來朝)하여 전법한 보리달마를 지칭한 대명사’가 되었다. 말하자면 홍인에게서 보리달마로 옮겨진 호칭이 된 것이다. 초기선종에서 보리달마의 모습은 일찍이 능가사(楞伽師)들과 북종선의 조(祖)에서 신회(神會)가 주장하는 남종 여래선(如來禪)의 조(祖)를 거쳐, 『보림전(寶林傳)』 「달마전達磨傳」의 재편과 함께 새로운 조사선(祖師禪)의 ‘조’로서 정착하게 될 때까지 각각 그 시대의 요청에 응하여 다양하게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선종에서 인식된 새로운 조사는 ‘남종의 조인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이다. 실제 불교의 이상적인 인격인 부처와 여래에 대신하는 조종(祖宗)의 이미지는 하택신회의 남종선언과 육조현창(六祖顯彰)운동으로부터 돈황본 『육조단경』이 출현하기까지의 성위(聖位), 즉 성스러운 자리로서 형성되고 있는 것이다. 전대(前代)의 조사가 다음 대의 조사를 인정하는 증거물인 전의설(傳衣說)과 전법게(傳法偈)의 정수는 초기선종의 조사의 위치와 이미지를 고조시키는 요인이 됨과 동시에 중요한 작용이 되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돈황본 『육조단경』에 이르러 ‘조사’라는 말은 한층 더 표면화된 발전을 보여, ‘부처와 여래처럼 성스러운 위치’로 인정하게 된다. 즉 돈황본 『육조단경』에는 조사의 위치가 범부의 차원에서 얻을 수 없는 높고 성스러운 위치로 생각하게 된 것이다. 육조혜능의 설법집을 『육조단경』 또는 『법보단경』이라 한 것도 조사라고 하는 위치를 부처나 여래처럼 성스러운 성위로서 선종의 이상적 인격으로 생각한 결과인 것이다. 조사의 어록을 ‘경’이라고 한 것은 부처와 조사를 동격으로 보고 있는 선불교, 즉 선종의 특색이기도 하다. 그러나 강서(江西)와 호남(湖南)등의 지방을 중심으로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90)과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1)등이 리더가 된 새 시대의 선종에 이르면, 종래와 같은 전법상승자로서의 권위 있는 성위의 조사상의 관념과 이상적 인격으로서의 조사의 이미지를 탈피하여 다시 새 시대의 조사의 개념을 내세우고 이른바 최협의의 조사선의 시대를 열고 있는 것이다. 『보림전』권8의 「보리달마장(菩提達磨章)」에는 기성(期城)태자 양현지(楊衒之)가 달마에게 묻기를, “서국의 오천축에서 사(師)로부터 상승하는 사람을 조사라고 부르고 있는데, 그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무슨 의미입니까?”라고 묻자, 달마가 답하기를, “師曰 明佛心宗 寸無差寤 行解相應 名之曰祖”라고 하였다. 즉, 달마는 불타의 심원(心源)인 근본을 분명히 밝히고 그것과 조금도 깨달음의 차이가 없으며, 또한 실행과 이해가 상응하기 때문에 이를 ‘조(祖)’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서 달마의 이와 같은 대답은 실로 조사선의 정신을 가장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조사의 정의이다. 또한 이어 사(師) 달마는 양현지에게 게송으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악을 보아도 미워하지 않고 선을 보아도 닦으려 하지 않는다. 또 어리석음을 버리고 현명함을 좇지도 않으며 어리석음을 내던지고 깨달음을 취하려 하지도 않는다. 대도(大道)에 통달하여 사량을 초월하고 불심에 통함에 사량을 뛰어넘었으니 범부와 성인 그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고 초연한 사람을 조사라고 부른다.”라고 한 것이다. 『보림전』은 마조계의 사람들에 의해 편집된 조사선의 선종사서다. 『보림전』이 달마에게 ‘조(祖)’의 의미를 이야기하게 하는 것은 마조로부터 시작되는 조사선의 의의와 그 역사적인 원류를 밝히려고 한 의도로 보인다. 여기서 조사선이란 ‘마조계 홍주종의 별칭’이 된 것이다. 또 마조는 새로운 조사선의 선구자로서 『보림전』에서 말하는 ‘조(祖)’의 전형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보림전』 이후의 조사선에 있어서 조사의 이미지는 더 이상 ‘불조의 전법상승자로서의 특정한 인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며, 또한 ‘권위 있고 성스러운 위치로서 이상적인 인격’으로서도 보지 않고 ‘불타의 교지, 그 참된 뜻을 깨닫고 불심에 통하는 사람들의 통칭’이며, ‘평상심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모두 조사’ 하지만 이 때의 ‘평상심’이란 그 해석에 따라 잘못된 해석을 할 수도 있다. 즉, 적어도 평범한 범부의 삼독에 물든 평상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라고 부르는 의미로 변천한 것이다. 2.2 조사선이란 무엇인가? 달마의 문하 또는 혜능의 문하가 행한 선을 어찌하여 조사선이라 하는가? 그 첫 번째의 대답은 ‘조사선’이란 단어가 ‘여하시조사선(如何是祖師禪)’처럼 사용될 때, 조사선이란 단어에 ‘조사서래의(祖師西來意)’와 같은 일련의 특수한 의미가 부여되어 있어서 그것이 바로 ‘선종에서 행한 특수한 선’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둘째는 조사선이란 말은 ‘단순히 조사가 행한 선’, 또는 ‘조사에게서 전래된 선’으로 보는 관점이다. 오늘날 학계에서 조사선을 논하는 시각은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보리달마로부터 시작하는 중국선 전체를 조사선의 역사로 보는 가장 광의에 해당하는 시각이다. 두 번째는 중국선의 중국선 다운 새로운 전개의 시작으로 보는 육조혜능(六祖慧能, 638-713) 이후의 선의 전개를 가리키는 협의의 조사선이다. 세 번째는 가장 협의의 이해라고 볼 수 있는 것으로 중국선의 완전한 토착화를 이루었다고 보는 강서(江西)와 호남(湖南) 두 지방을 중심으로 새롭게 전개된 마조(馬祖)와 석두(石頭)계의 선불교운동으로부터 이어진 선을 말한다. 이 세 가지의 관점 아래서 각자의 편의상 조사선을 논하고 있는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조사선이란 일반적으로는 중국의 선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지만, 조사선이란 명칭이 정착하게 된 것은 801년 작 『보림전』이 등장한 9세기 이후의 일이다. 『경덕전등록』권11의 「앙산혜적장仰山慧寂章」의 앙산이 향엄지한(香嚴智閑, ?-898)의 깨달음을 평가하기를, “그대는 여래선을 얻었을 뿐, 조사선을 체득하지 못했네.”라고 함으로써, 조사선이란 말의 등장과 함께 조사선이 여래선보다 우월한 것으로 생각되어 실제로 그렇게 해석하는 경향도 있다. 하지만 이는 여래선보다 우월함을 논하는 것이 아니라 성격의 차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즉, 조사선은 본질에 있어서는 여래선과 같되 특별한 방법적 기용(機用) 기용이란 할 · 봉 · 불자의 사용을 비롯해 눈썹을 찡그리거나 발로 차거나 원상을 그리거나 꾸짖고 욕하는 등등의 중국의 선사들이 사용한 다양한 행위 작법을 말한다.으로 수행자의 본분사(本分事)를 깨닫도록 촉발시키는 선종 조사들의 선이라 봄이 적절할 것이다. 이에 대해 중국의 학자 동군(董群)은 ① 조사선은 돈오적이고 당하에 바로 이루어 수행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② 언어문자를 초월하여 직지인심(直指人心)한다. ③ 언어의 모순에 대한 어려움을 해결하기위해 ‘이사구절백비(離四句絶百非)’를 강조한다. ④ 초불월조(超佛越祖)하여 구체적이고 완선(完善)한 인간의 성취를 이상으로 삼는다. ⑤ 조사선에서 말하는 부처는 중생의 자심(自心) 가운데 있다.’라는 등의 성격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2.3 조사선의 전개 위에서 밝힌 조사선을 보는 세 가지의 관점 가운데 어느 것을 취할 것인가 하는 것은 논술자의 관점에 따라 다를 것이다. 여기서는 가장 광의(廣義)의 관점에서 중국조사선의 전개를 논하고자 한다. 중국조사선의 전개는 바로 중국선의 전개와 같고, 넓게는 중국선종의 전개와도 닿아있다. 중국의 조사선은 그 전개의 과정에서 발현되는 성격이 6조 혜능(慧能, 638-713)과 마조도일(馬祖道一, 709-788)을 거치면서 몇 차례 변화를 거쳐 왔음을 미리 밝혀둔다. 가장 광의의 조사선은 인도의 28대 조사이며 중국의 초조인 보리달마로부터 시작한다. 2조인 혜가(487-593), 3조 승찬(僧璨, ?-606), 4조 도신(道信, 580-651), 5조 홍인(弘忍, 601-674), 6조 혜능(慧能, 683-713) 등 인도의 마하가섭으로부터 이어져 중국의 6조에 이르기까지 33명의 조사를 삽삼조사(卅三祖師)라고도 한다. 달마조사가 면벽(面壁) 9년으로 마음자리를 보이고 역대조사들 또한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왔으므로 이를 조사들의 선 즉, 조사선이라 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국적 성격을 띤 조사선을 정착시킨 인물은 6조 혜능이다. 혜능은 모든 사람이 본래 지닌 자성(自性)을 직시하여 바로 그 자리에서 깨치는 돈오견성(頓悟見性)을 천명하였다. 8세기 당대(唐代) 스님인 혜능의 제자 하택신회(荷澤神會, 670-762)는 5조 홍인의 밑에서 활대의 무차대회를 통해 대통신수(大通神秀, 606-706)와 그의 문하 숭산보적(崇山普寂,651-739)이 가르친 선을 북종선(北宗禪)이라 규정하고, 북종선의 성격을 점차적 닦음을 통해 깨달음에 이르는 점수법(漸修法)이라 하며 이는 조사선의 방계라고 폄하하였다. 나아가 혜능으로부터 이어지는 선정법을 돈오법(頓悟法)이라 하여 조사선의 적통이라고 천명하였다. 위와 같은 하택신회의 활대 무차대회 선언 이후, 혜능의 남종선은 양자강 남쪽 강서와 호남지역에서 크게 흥성하게 된다. 그 중심인물은 남악회양(南嶽懷讓, 677-744)으로부터 법을 전수한 마조도일과 청원행사(靑原行思, ?-741)로부터 법을 이은 호남의 석두희천(石頭希遷, 700-790)이다. 그들의 스승인 남악회양과 청원행사는 각자 개당(開堂)을 하지 않았지만, 마조와 그 문하의 선사들은 활발하게 법을 펼쳐 활동지역에 따라 홍주종이라 불리고, 석두와 그 문하는 석두종이라 불렸다. 마조와 석두 문하의 많은 선사들은 중국뿐 아니라 동아시아에 그 선법이 널리 확산되게 하였다. 그 가운데 유명한 선사로 선원의 청규(淸規)를 제정한 백장회해(百丈懷海, 749-814)가 있다. 그는 수행에 전념하는 선원 공동체의 기틀을 확고하게 다져 선종의 역사를 반석 위에 우뚝 서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9-10세기 중반에 이르면, 석두계에서는 조동종(曹洞宗) · 운문종(雲門宗) · 법안종(法安宗)으로 발전하고, 마조계에서는 임제종(臨濟宗)과 위앙종(潙仰宗)으로 발전하여 이른바 선종의 5가가 탄생한다. 11세기 중반에 이르면, 다시 임제종에서 황룡파(黃龍派)와 양기파(楊岐派)라는 두 종으로 나뉘어 발전하여 중국의 오가칠종(五家七宗)이 성립함으로서 중국선종의 황금기가 열리게 된다. 이후 5가 7종은 점차로 쇠퇴하고, 12세기에 이르면 임제종 계통의 양기파에서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가 간화선을 체계화시켜 확산시키고, 조동종 계통에서는 굉지정각(宏智正覺, 1091-1157)이 묵조선을 선양하게 된다. 따라서 조사선은 다시 간화선과 묵조선이라는 두 갈래의 선법으로 나뉘어 발전함으로서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전개된 조사선은 새 시대의 선불교로서 종래 장안과 낙양의 두 수도를 중심으로 한 중앙귀족불교와 권위주의, 나아가 이론적인 교학불교 및 신비적 명상의 수정(修定)주의 입장을 모두 다 탈피해 인간의 꾸밈없는 참 모습에 투철한 생활불교가 중국의 대지 위에 펼쳐지게 된 것이다. 즉, 『보림전』 의 ‘조(祖)’의 정의와 마조의 ‘즉심시불(卽心是佛)’ 및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라고 하는 명구名句가 철저한 인간적 불교로의 종교운동을 가장 선명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흔히 『임제록』의 기본정신을 ‘인(人)의 사상’이라고 한다. 임제가 말하는 명구인 ‘무위진인(無位眞人)’은 마조로부터 출발한 조사선의 인간성 회복운동의 결정이라 볼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 이러한 인간의 종교로서의 조사선의 세계에서는 일찍이 석존 당시와 같은 문답의 세계, 응병여약(應病與藥)의 대기설법(對機說法)이 다시 행해졌으며, 더구나 그것은 일상의 편범한 말이나 당시의 생활풍경을 그대로 담은 진실의 세계를 바로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여기서 이러한 문답의 대화는 불타와 보살의 경과 논에 이어 조사들의 언행을 모아 편집한 중국선종의 독자적인 ‘어록(語錄)’이라고 하는 장르를 출현시켜 조사선의 세계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다. 즉 조사선에서의 ‘조사’라는 의미는 이미 종래와 같은 협의의 한 사람에서 한 사람으로 이어지는 ‘전법상승자(傳法相承者)’라는 의미를 넘어서 ‘불심(佛心)에 통한 모든 사람’을 가리키는 통칭으로 변하게 된다. 조사선의 불교는 불립문자나 교외별전을 주장하는 종래의 수당(隋唐) 종파불교의 하나라는 선종의 입장에 그치지 않고, 5조 홍인이 말하고 있는 것처럼 ‘삼세제불의 조’로서 불교제종(佛敎諸宗)의 근원적 입장에 서있는 것이다. 또 불교의 이상적 인격인 인도의 불타나 여래에 대신하여 중국불교의 풍토가 만들어낸 ‘가장 인간적인 친밀감 넘치는 중국불교의 인격’으로 변한 것이다. 그리하여 임제의 시대에 이르러, ‘조사’에 대신하는 말로서 ‘불조(佛祖)’ ‘조불(祖佛)’이라고 하는 새로운 명칭으로 변화하면서 폭넓은 조사선의 불교가 중국 천하에 확산되고, 중국인의 종교로서 그 뿌리를 튼튼히 내리면서 이른바 선불교의 전성시대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이는 중국인이 지닌 현실을 중시하는 인생관과 지혜와 언어를 가진 새로운 인간적인 불교, 중국이라는 풍토에 적합한 새로운 중국불교로의 일대혁신운동이 바로 조사선이라고 하는 평가를 받기에 이른 것이다. 3. 한국조사선의 전개 한국조사선의 전개를 논하는 것은 중국조사선을 바라보는 세 가지 관점 가운데 중국의 6조 혜능으로부터 시작되는 조사선, 즉 협의의 조사선의 전개를 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의 초기 선법은 그 내용과 성격이 대체로 중국의 6조 혜능이 정착시킨 조사선을 당시 중국으로 유학한 구법승들의 다양한 구법경로를 통해 그대로 받아들여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의 구산선문(九山禪門)을 지나 고려의 불일보조국사(佛日普照國師) 지눌(知訥, 1158-1210)이후 후기로 갈수록 한국선법의 주류를 이루는 선법은 중국의 조사선 가운데 대혜종고(大慧宗杲, 1089-1163)와 고봉원묘(高峰原妙, 1238-1295), 몽산덕이(蒙山德異, 1232-1308)로 이어지는 간화선이다. 지금부터 한국조사선의 전개를 논하면 다음과 같다. 한국에 선법이 최초로 들어온 것은 신라 말, 고려 초기다. 당시 중국의 당(唐)으로 유학하던 구법승들이 중국에서 선법을 받아와 이 땅에 하나 둘 전파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구산선문이라 불리는 것으로서 대부분은 6조 혜능의 제자들로부터 받아온 선법이다. 고려에 이르러 이 구산선문은 조계종(曹溪宗)이라 부르게 되는데, 이는 중국 6조 혜능의 선법을 이은 선종이란 의미이다. 당송시대부터 6조 혜능을 조계(曹溪) 혜능이라 부른 것으로 볼 때, 혜능의 선법을 이었다는 의미에서 조계종이라 부른 것은 충분히 짐작가능하다. 구산선문의 개조(開祖)를 밝힌 것은 1600년 팔공산 부인사에서 개판(開板)한 『선문조사예참문(禪門祖師禮懺文)』이다. 조계종의 종조인 도의(道義)국사는 혜능의 4세 후손인 서당지장(西堂智藏, 735-814)으로부터 법을 받았다. 도의국사는 서당지장을 모시고 화두를 참구하여 의심덩어리인 의단을 풀고 드디어 깨달음을 얻었다고 한다. 서당은 “진실로 이런 사람에게 법을 전하지 않고 누구에게 전하랴!”라고 하고, 법명을 ‘도의’라고 고쳐주었다고 한다. 이는 우리나라 스님으로선 최초의 조사선 전래이다. 이때의 조사선의 수행법은 간화선이 체계화되기 이전의 것인데 이때도 화두참구와 같은 간화선의 수행방식이 이루어지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성종 이후 대각국사 의천은 문벌귀족과 결탁한 왕권강화라는 왕실의 정책에 부응하여 경전을 수집하고 속장경을 조판하며 천태종을 개창하였다. 왕실의 강력한 후원을 받는 천태종의 출현으로 선종은 어느 정도 위축된 것 같았지만 12세기에 접어들어 교단을 정비하면서 새로운 기반을 다져나가게 된다. 가지산문의 원응학일(圓應學一, 1052-1144)국사와 사굴산문의 묵암탄연(默庵坦然, 1070-1159)국사는 당시 선종의 부활을 위해 활약한 인물이다. 또한 선승들과도 폭넓게 교류하면서 당시의 선에도 사상적 영향을 크게 미쳤던 거사 이자현(李資賢, 1061-1125)은 거사불교의 꽃을 피운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중국의 송나라에서는 『능엄경』이 유행하였는데, 중국에 유학했던 의천은 이 『능엄경』을 들여와 능엄도량을 개설하고 크게 펼쳤다. 이자현은 처음에는 선사상을 기본으로 『능엄경』을 받아들였으나, 그 뒤 설봉(雪峰, 822-908)선사의 어록을 보다가 깨닫고 그 당시의 탄연 같은 선사들과 활발히 교류하였다. 고려의 선승을 대표하는 선사로는 중국 송나라에서 3년 동안 유학하며 임제종 선사인 부산법원(浮山法遠, 991-1067)으로부터 선법을 받고 북송 선종계의 동향과 사상적 흐름에 깊은 영향을 받은 담진(曇眞)을 들 수 있다. 당시 담진의 법을 이은 제자들이 왕사와 국사가 되면서 담진 문하의 선승들이 불교계를 이끌고 주된 흐름을 형성하였다. 다음으로 눈에 띄는 인물은 탄연(坦然, 1070-1159)이다. 그는 중국 임제종 황룡혜남(黃龍慧南, 1002-1069)의 법을 이은 개심(介諶, 1080-1148)선사로부터 서신을 통해 인가받고 그 제자들과 활발하게 교류하였다. 선사가 개심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은 일은 『五燈會元』에 수록되어있다. 이와 같이 담진과 탄연, 학일 등의 선사들이 북송의 선사들과 교류하면서 고려에는 새로운 선적(禪籍)들이 들어와 송의 선문학이 도입되었고, 공안선이라는 새로운 선풍이 자리를 잡게 된다. 그러던 것이 고려 무신집권기의 보조국사 지눌에 의해 다시 한 번 크게 일어나게 된다. 보조국사가 수선사(修禪社, 현재의 송광사)에서 선정을 함께 닦는 정혜결사(定慧結社)를 일으키자 선 수행에 참여하려는 납자들이 사방에서 몰려들었다. 이때 중국 임제종 대혜종고의 간화선법이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도입된다. 국사는 그의 나이 40세에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대혜어록』을 보다가 깨달음을 얻은 후 수행으로 들어가는 문으로 성적등지문(惺寂等持門)· 원돈신해문(圓頓信解門)·간화경절문(看話徑截門)이라는 세 가지 수행문을 세우고 그 가운데 뛰어난 근기의 수행으로 간화선을 제시한다. 그의 저서 『간화결의론(看話決疑論)』과 『절요사기(節要私記)』를 통해 간화선 수행의 필요성과 우수성, 무자화두참구의 주의점 등을 자세히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간화선을 고려불교에 본격적으로 수용한 인물은 지눌의 제자인 진각혜심(眞覺慧諶, 1178-1234)선사다. 혜심은 우리나라 최초의 공안모음집인 『선문염송(禪門拈頌)』을 편찬한 인물이다. 이 공안집은 수행자들이 화두로 공부할 수 있는 실제적인 길을 열었다. 또 혜심은 『구자무불성화간병론(狗子無佛性話揀病論)』을 지어 수행자들이 무자화두를 들어 공부할 때 생길 수 있는 구체적 병통과 증상에 대해 자세히 밝히고 있다. 혜심 이후 간화선의 수행법과 가풍은 수선사의 16국사에 의해 계승되었다. 1270년 무신정권이 무너지고 왕정복고가 이루어지면서 고려는 본격적으로 원의 간섭기에 들어가게 된다. 이때 수선사와 백련사 계통은 퇴조하고 충렬왕 이후에는 선종의 가지산문과 천태종의 묘련사 계열 법상종 계통이 고려불교역사의 전면에 새롭게 떠오르게 된다. 이때 간화선의 흐름은 수선사가 퇴조하고 일연선사(1200-1289)를 중심으로 한 가지산문이 주도하게 되었다. 일연은 젊은 시절 밀교와 관음신앙에 뜻을 두었으나 그 뒤 사상적으로 변화하여 보조의 법을 잇고, 1249년에는 남해 정림사에서 『선문염송』을 열람한 뒤 『선문염송사원(禪門拈訟事苑)』을 저술했다. 이 무렵 고려에서는 많은 선승들이 중국 원나라에 들어가 구법활동을 하였다. 이들을 통해 많은 전적들과 선법이 도입되면서 고려의 선종은 또 한 번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간화선이 우리나라에 확고하게 정착되도록 한 인물은 태고보우(太古普遇, 1301-1389)와 나옹혜근(懶翁慧勤, 1320-1376), 백운경한(白雲景閑, 1299-1375)등 세 선사다. 이들은 모두 직접 중국에 들어가 선문의 종사들과 법의 거량을 통해 임제종의 법맥을 이은 뒤 고려로 돌아왔다. 이들 세 선사는 당시 고려 선문의 새로운 가풍으로 형성된 남송(南宋) 말 원(元) 초기 몽산덕이(蒙山德異, 1231-1308)선사의 가르침대로 깨달음을 얻은 뒤 본분종사를 찾아가 인가를 받는 엄정한 전통을 세웠던 것이다. 이들 가운데 태고보우는 20년 동안 수행하여 서른일곱에 오매일여를 이루고 서른여덟에 활연히 크게 깨달았다. 그는 원의 하무산霞霧山에 머물던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선사를 찾아가 임제종의 정맥을 이었다. 나옹혜근은 27세에 깨달음을 얻고 원에 들어가 10년간 머무는 동안 평산처림(平山處林, 1279-1361)으로부터 선법과 함께 가사와 불자를 전해 받았으며, 그 후 인도에서 건너온 지공(指空)선사로부터 가사와 불자, 범어로 쓴 서신 등을 받아왔다. 마지막으로 백운경한은 어려서 출가해 크게 깨달은 뒤, 중국으로 가서 태고와 동일하게 석옥청공선사로부터 법을 받은 인물로서 세계최고의 금속활자본인 『직지심체요절』의 편저자이기도 하다. 아무튼 이들 세 선사 가운데서 간화선을 가장 널리 펼쳐 정착시킨 인물은 태고보우라 할 것이다. 그는 간화선을 수행하되 화두를 참구해 깨달은 뒤 반드시 본분종사를 찾아가 자신의 깨달은 경지를 결택하고 인가받으라고 함으로서 간화선의 수행체계를 명확히 확립한 점과 중국 임제종의 정맥을 이어와 그 법맥이 조선 불교를 통해 면면히 이어져 왔으므로 조계종의 중흥조로 숭앙받고 있다. 태고보우에 의해 완전히 정착된 우리의 간화선은 한국불교의 주된 수행법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보우의 선맥은 환암혼수(幻菴混修, 1320-1392)→구곡각운(龜谷覺雲, 생몰연대 미상)→ 벽계정심(碧溪正心, 1464-1534)→ 벽송지엄(碧松智嚴, 1464-1534)→ 부용영관(芙蓉靈觀, 1485-1571)으로 이어졌고, 다시 청허휴정(淸虛休靜, 1520-1604)과 부휴선수(浮休善修, 1543-1615)라는 양대 산맥을 형성하게 된다. 나아가 청허의 문하에는 편양언기(鞭羊彦機, 1581-1644)와 사명유정(四溟惟政, 1544-16 10)의 두 거장이 나왔으며, 이 가운데 편양언기의 문하가 뒷날까지 번창하여 풍담의심楓潭義諶, 1592-1655)→ 월담설제(月潭雪霽, 1632-1704)→ 환성지안(喚性志安, 1664-1729)으로 이어진다. 근세에 이르러 조계종의 간화선풍을 진작시킨 선사로는 용암혜언(龍巖慧彦)의 법을 이은 경허성우(鏡虛惺牛,1846-1912)와 환성지안의 법을 이은 용성진종(龍成震鐘, 1864-1940)이있다. 경허의 제자로는 수월(水月, 1855-1928)과 혜월(慧月, 1862-1937), 만공(滿空, 1871-1946)과 한암(漢岩, 1876-1951)등이 있고, 현대에 들어와 경봉정석(鏡峰靖錫,1892- 1982), 전강영신(田岡永信, 1898-1974)과 송담(松潭), 향곡혜림(香谷慧林, 1912-1978), 퇴옹성철(退翁性徹, 1912-1993)등이 있다. 이와 같이 중국 조사선의 전통은 당시 많은 구법승들의 직접유학을 통한 선법의 수용으로 이어져 우리나라에서는 주로 6조 혜능의 조사선과 대혜종고와 고봉원묘, 몽산덕이의 선법을 이은 간화선의 종풍을 중심으로 전개되어 내려온 것이라 할 것이다.
· 집필자 : 전통수행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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