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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통(惠通)

활동왕조 통일신라
활동시기 [7세기]
이칭(한자) 慧通 / 王和尙 / 尊勝角干
수달을 죽였다가 출가하다
혜통(惠通)은 7세기 신라인으로, 출가하기 전에 경주 남산 서쪽 탑동 남간사(南澗寺) 동쪽 마을에 살았다. 어느 날 동쪽 시냇가에서 놀다가 수달을 잡아서 죽이고는 동산에 버렸다. 이튿날 아침 수달 버린 곳을 가 보니 수달이 없었다. 핏자국이 이어져 있길래 따라서 찾아가니 수달이 원래 살던 굴로 돌아가서 새끼 다섯을 품고 웅크리고 있었다. 혜통이 그것을 바라보고 너무 놀라서 몸이 굳어버린 듯 한참 서 있었다.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오래 슬퍼하다가 드디어 속세를 버리고 출가하여 이름을 혜통으로 바꾸었다.
경주 남간사지 당간지주(출처 : 국가유산청)
이후 혜통 스님은 밀본과 명랑을 이어 신라의 초기 밀교를 성립시켰고, 혜통으로부터 시작된 진언지송(眞言持誦)의 총지법은 이후 고려시대 총지종(摠持宗)으로 이어졌다.
당나라에서 선무외 스님에게 인가받다
당나라에 가서 선무외(善無畏) 스님을 찾아가 배움을 청하였다고 한다. 선무외는 8세기 중기에 밀교를 처음 전래한 인물이므로, 혜통보다 후대 사람이다. 8세기 이후 신라 출신의 밀교 유학승들이 선무외 문하에 몰려 있었기 때문에 후대에 가탁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이야기에 따르면, 선무외는 외딴 오랑캐 사람이 어찌 법기(法器)를 감당하겠냐며 가르쳐 주지 않았다. 그렇게 무시 받았지만 혜통은 물러가지 않고 3년이나 부지런히 선무외를 섬겼다. 선무외는 그래도 허락하지 않았다. 혜통은 결국 분하고 애가 타서 뜰에 나와 머리에 불 그릇을 올렸다. 잠시 후 혜통의 정수리가 터지며 우레같은 소리가 났다. 선무외가 소식을 듣고 와서 보고는 불 그릇을 치우고 정수리 터진 곳을 어루만지며 주문을 외우니 상처가 아물었다. 아문 곳의 흉터가 왕(王) 자처럼 보여서 이후로 ‘왕 화상(王和尙)’이라고 불렸다. 선무외는 혜통의 기지를 인정하여 인가하고 수기를 전해주었다.
신(神)을 부려 공주의 병을 고치다
당나라 고종(재위 650~683년)의 공주가 병에 걸려 고종이 삼장에게 구해주기를 청하였다. 삼장은 혜통 스님을 추천하여 대신하게 하였다. 혜통 스님이 외딴곳에서 흰콩을 은그릇 속에 넣고 주문을 외우니 흰콩이 흰 갑옷을 입은 신(神)으로 변하여 병을 쫓았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그래서 검은콩을 금그릇에 넣고 주문을 외우니 검은콩이 검은 갑옷을 입은 신으로 변하였고, 흰 갑옷 입은 신과 함께 병을 쫓게 하니, 독룡이 달아나고 병이 마침내 나았다.
독룡의 해코지를 분별하고 계를 주다
독룡은 혜통 스님을 원망하여 신라 문잉림(文仍林)으로 가서 사람들을 해쳤다. 당시 정공(鄭恭)이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혜통 스님을 만나 법사가 쫓은 독룡이 본국으로 돌아와 피해가 심하니 빨리 가서 없애 달라고 하였다. 이에 정공과 함께 665년에 신라로 돌아와 독룡을 쫓아버렸다. 독룡은 이제 정공을 원망하여 정공 집의 문밖에 버드나무로 변하여 서 있었다. 정공이 독룡인 줄 알지 못하고 다만 나무가 무성하다고 좋아하였다. 신문왕이 죽고 효소왕(재위 692~702년)이 즉위하여 왕릉을 마련하고 장사 지내는 길을 닦는데, 정공 집 버드나무가 길을 가로막기에 관리가 베어 버리려 하였다. 정공이 화를 내며, 차라리 내 머리를 베지 이 나무는 베지 못한다고 하였다. 관리가 이를 아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정공이 왕 화상을 믿고 불손한 일을 도모하려 하여, 왕명을 업신여기고 거역하며 머리를 베라고 하니 마땅히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공을 처형하고 그 집을 묻어버렸다. 조정에서 의논하기를, 왕 화상이 정공과 매우 친하니 마땅히 먼저 그를 도모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에 병사들을 시켜 왕 화상을 잡게 하였다. 혜통 스님은 왕망사(王望寺)에 있었는데 병사들이 오는 것을 보고 사기병과 붉은 먹을 묻힌 붓을 가지고 지붕에 올라가서 소리쳐, 자신이 하는 것을 보라고 하였다. 이에 병의 목에 붉은 획을 긋고 말하기를, 각자의 목을 보라고 하였다. 병사들이 보니 모두 붉은 획이 생겨서 놀라 머뭇거렸다. 혜통 스님이 또 소리쳐 말하기를, 병의 목을 자르면 너희 목도 잘릴 것이라고 하였다. 병사들이 그대로 도망쳐서 붉은 획이 있는 목을 왕에게 보이니, 왕이 어쩔 수 없다며 화상을 내버려 두었다. 공주가 갑자기 병이 들자, 임금이 혜통 스님에게 치료해 달라고 하였다. 혜통 스님의 도력으로 병이 나아지니 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스님은 이에, 정공은 독룡의 해를 입어 죄 없이 형벌을 받았다고 고하였다. 이 말을 들은 왕이 후회하여 정공의 가족을 사면하고, 스님을 국사(國師)로 삼았다. 독룡은 정공에게 원수를 갚은 후 기장산(機張山)에 가서 웅신(熊神, 곰신)이 되어서는 근방 마을에 심하게 해독을 끼쳐, 마을 사람들이 매우 괴로워했다. 혜통 스님이 이를 알고 기장산에 가서 독룡을 깨우쳐 불살계(不殺戒)를 주었고, 이에 마을이 평화롭게 되었다. 부산시 기장군 철마면 웅천리에 곰내재(웅천고개, 곰내곡)가 있다. 이곳에 곰들이 많이 살며 냇물을 먹곤 해서 ‘웅계(熊溪)’라 하였다가 ‘웅천(熊川)’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신문왕의 병을 고치고 신충봉성사를 짓게 하다
처음에 신문왕이 등창이 나서 혜통 스님에게 치료해 주기를 청하였다. 스님이 와서 주문을 외우자 즉시 나았다. 혜통 스님이 말하였다. “폐하께서 전생에 재상이었을 때 신충(信忠)을 잘못 판결하여 종으로 삼았기에 신충이 원한을 가지고 윤회하여 보복하고 있습니다. 이 등창도 그런 것이오니 마땅히 신충을 위해서 가람을 창건하고 그 명복을 빌어서 원한을 풀어 주십시오” 스님의 말에 따라 왕이 절을 세우고 이름을 신충봉성사(信忠奉聖寺)라고 했다. 절이 완성되자 공중에서 노래하는 소리가 나기를, 왕이 절을 지어 주셨기 때문에 괴로움에서 벗어나 하늘에 태어났으니, 원한은 이미 풀렸다고 하였다. 그래서 그 노랫소리 난 곳에 절원당(折怨堂)을 지었다. 근래 발견된 황룡사 비석 조각에서 ‘奉聖神忠寺(봉성신충사)’ 글귀가 발견됨에 따라 ‘신충(信忠)’은 ‘신충(神忠)’이 와전된 것으로 보기도 한다. 위 이야기와는 달리 봉성사는 신라의 대표적인 호국사찰 또는 왕실의 원찰로 기능하였지, 개인 ‘신충’과는 관계없다는 견해도 있다. 신충과 신문왕에 관한 이 설화는 절원당의 등장과 관련하여 후대에 생겨난 설화인데 창건설화로 확대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달리 신문왕이 백제 출신의 경흥(憬興)을 국사로 임명해 백제인의 민심을 안정시키려 하였던 것처럼, 신문왕이 대민안정을 위해 힘썼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집필자 : 이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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