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동왕조 | 통일신라 |
|---|---|
| 활동시기 | 8~9세기 |
| 생년 | 785년 |
| 몰년 | 861년 |
| 이칭(한자) | 惠哲 / 慧 / 徹 / 哲 / 體空 / 寂忍 / 桐裏 |
전생에 서역 스님
혜철(惠哲, 785~861년)은 경주 출신으로 성은 박씨이다. 자는 체공(體空)이고, 동리산화상(桐里山和尙)이라고도 부른다.
어머니가 잉태한 후에, 법복을 차려입은 단아하고 엄숙한 서역의 스님이 향로를 들고 걸어 들어와 침상에 앉는 꿈을 꾸었다. 이에 태어날 아이가 출가할 것임을 미리 알았다고 한다.
꿈에 계주(戒珠)를 받다
15세에 출가하여 경북 영주 부석사에 머물며 화엄경을 탐독하였는데, 함께 배우는 이들이 이해하지 못한 것을 깨우쳐 줄 정도로 지혜와 식견이 탁월하였다.
22세에 구족계를 받았는데, 구족계를 받기 전에 오색 빛깔의 구슬이 갑자기 소매 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는, “나는 이미 계주(戒珠, 계율의 구슬)를 얻었다.”라고 하였다. 구족계를 받는 날,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일더니 하늘까지 뻗쳐 흩어지지 않았다. 그러더니 스님이 금강계단에서 내려오자마자 폭풍이 가라앉고 고요해지는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난 후부터는 말과 행동을 더욱 깨끗이 하고 인연에 끄달리지 않고 오롯이 마음을 닦았다.
서당 선사의 법맥을 잇다
혜철 스님은 “나라는 것이 본래 없고 일찍이 어떤 것도 있지 않다. 스스로 자성을 보아 법이 공(空)하면서도 공하지 않음을 깨달아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모르는 것을 묻고자 해도 대답해 줄 사람이 없는 것을 탄식하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찾아 먼 곳으로 떠나려고 결심하였다.
814년 8월, 드디어 배를 타고 당나라로 건너가, 홍주(洪州) 개원사(開元寺)의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년)을 찾아갔다. 서당 지장은 당나라 선(禪)을 대표하는 마조 도일(馬祖導一, 709~788년)의 수제자에 속한다. 스님은 서당 스님에게 가르침을 청하면서 말하였다.
“제가 중국 땅을 멀다 생각하지 않고 와서 진리[法]를 청합니다. 만일 훗날 말 없는 말이요, 법 없는 법[無說之說, 無法之法]이 바다 건너 신라에 전해지면 더할 수 없이 좋겠습니다.”
서당 스님은 혜철 스님의 뜻이 굳고 품성이 깨달을 만하다는 것을 알고, 곧바로 심인(心印)을 전수하였다. 그리하여 서당 스님의 법맥을 이어받은 가지산문의 도의(道義) 선사, 실상산문의 홍척(洪陟) 선사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서당 스님이 입적하자 혜철 스님은 여기저기 명산대찰을 두루 순례하다가,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 머물며 3년 정도 경전을 열람하고, 839년 2월 신라로 돌아왔다.
동리산문을 세우다
스님은 귀국하여 무주 쌍봉사에서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교화하던 중, 전남 곡성군 동남쪽의 동리산(棟里山)을 유람하다가 산속 깊은 곳에 있는 대안사(大安寺, 훗날 태안사)를 발견하였다. 그 주변은 수많은 봉우리가 우뚝 솟아 세속의 발길이 드문 고요한 장소로,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한 곳이었다.
동리산 태안사 일주문(출처 : 국가유산청)
그래서 참선 수도하며 불법을 드날릴 곳으로 여기고, 20차례의 봄가을을 지내면서 선찰(禪刹)의 면모를 갖추고 동리산문(桐裡山門)을 형성하였다. 스님의 가르침이 밖으로 전해져 수행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고 일반인들도 우러러 귀의하니, 문성왕(재위 839~857년)은 스님의 법력을 듣고 궁궐에 내왕해 주기를 간청하였다. 스님은 그 뜻에는 응하지 않았지만, 때때로 임금의 자문에 시정의 급한 일들을 편지에 낱낱이 설명하여 조정을 도왔다. 이에 임금은 스님이 머무는 사찰의 사방 바깥에 살생을 금하는 기둥을 세우는 등 여러모로 스님을 받들었다.
신통력으로 재난을 막다
스님의 지혜와 신통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는데, 신이한 능력으로 재난을 막은 일화가 여럿 전하고 있다. 그 가운데 무주 쌍봉사에서 여름 안거를 지내던 어느 해, 비가 내리지 않아 산과 계곡, 대지가 메말랐다. 스님은 고을 관리의 간절한 청을 받고는 고요한 방에서 좋은 향을 사르며 비가 내려 가뭄이 해소되기를 빌었다. 그러자 잠시 후 단비가 조금씩 내려 무주 관내의 논밭을 촉촉하게 적시더니, 얼마 후 큰 비가 내렸다.
어느 때는 갑자기 들판에 불이 나서 스님의 암자로 타들어 오고 있었는데, 스님이 단정히 앉아 삼매에 든 동안 폭우가 쏟아져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사방에서 타들어 오는 불에 온 산이 불탔으나, 스님이 자리한 곳은 화마가 미치지 않는 불가사의한 일이 있었다.
태안사에 머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는 도량에 모기와 하루살이가 너무 많아 생활하기가 불편했다. 스님이 신통력으로 벌레들을 산 오른쪽 고개 너머로 쫓아 버리니, 그 후로는 한 마리의 모기도 없게 되었다. 그래서 그 고개를 축맹치(逐虻峙) 혹은 축맹재라고 한다. 이와 같은 신묘한 도력으로 사람들을 편안하게 해 주었지만, 덕을 감추고 그 명성을 드러내지 않았다.
스님의 열반을 산천도 슬퍼하다
어느 날, 기거하던 산 북쪽에 네 아름 정도 되는 삼나무를 베어내 관을 짜서 누군가 세상을 떠나면 사용하라 하고, 절에 돌아와서는 벽 위에 시체를 담는 관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그리고는 문득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만물은 봄에 나고 가을에 죽으니, 나는 곧 돌아갈 것이다. 이후에 너희들과 더불어 선(禪)을 말하고 도(道)를 맛볼 수 없을 것이다.”
혜철국사의 사리를 모신 승탑(출처 : 국가유산청)
861년 2월 6일, 앉은 채로 열반에 드니, 세속 나이는 77세였다. 열반하였어도 몸이 흩어지지 않았으며, 얼굴색은 평상시와 같았다. 같은 해, 사찰 근처 소나무 숲에 석탑을 세우고 사리를 안치하였다. 스님이 임종할 무렵에 들짐승이 슬피 울부짖어 산과 골짜기가 요동치고, 참새와 까마귀가 무리 지어 슬피 울었는데, 석탑을 세운 곳의 푸른 소나무도 스님의 열반을 슬퍼하는 듯 봄과 여름에는 하얗고, 가을과 겨울에는 누렇게 변하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났다.
대안사 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출처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868년 6월, 경문왕은 시호를 적인(寂忍), 탑호를 조륜청정(照輪淸淨)이라 추증하고, 최하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872년 8월 14일에 행종(幸宗) 스님 등이 정식으로 비를 세워 「무주동리산대안사적인선사비명(武州棟里山大安寺寂忍禪師碑銘)」이라고 하였다.
· 집필자 : 이미숙(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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