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동왕조 | 통일신라 |
|---|---|
| 활동시기 | 8~9세기 |
| 생년 | 774년 |
| 몰년 | 850년 |
| 이칭(한자) | 眞鑑 / 大空靈 / 慧照 / 慧炤 |
생선 팔아 부모 봉양
스님(774~850년)의 법명은 혜소(慧昭)이고 속성은 최씨이며, 전주 금마(金馬, 익산) 고을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의 이름은 창원(昌元)으로, 출가한 적이 있다. 어머니는 고(顧)씨이다.
어머니가 낮에 잠을 자다가 꿈을 꾸었는데 한 범승(梵僧, 인도 스님)이 말하기를, “어머니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면서 유리병을 주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안 되어서 스님을 잉태하였다. 스님은 태어날 때 울지 않았으며, 어릴 때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집안에 쌀도 없고 좁은 땅도 없이 너무 가난했다. 그래서 생선 파는 일에 종사하며 어버이의 입에 맞는 음식을 올리려고 노력하였다.
뱃사공으로 당나라에 가다
804년(애장왕 5) 당나라에 조공 바치러 가는 사신 세공사(歲貢使)를 찾아가 뱃사공이 되겠다고 자청하였다. 배가 당나라에 도착하자, 스님은 뱃사공을 그만두고 배에서 내렸다. 돈을 벌려고 뱃사공 노릇을 한 게 아니라 배를 타고 당나라에 가서 불법을 배우려고 했기 때문이다. 스님은 아는 이 아무도 없는 타국에서 물어물어 창주(滄州)로 가서 마조도일(馬祖道一) 선사의 제자 신감(神鑑) 대사를 뵈었다. 대사는 매우 기뻐하면서 “전생에 이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다시 만나 너무도 기쁘구나.”라고 하면서 즉시 머리를 깎고 단번에 인가해 주었다.
대중들이 말하기를, “동방의 성인을 여기서 다시 보는구나.”라고 하였다. 혜소 선사의 생김새가 까맣게 생겼기 때문에 대중들은 법명을 부르지 않고 ‘흑두타(黑頭陀, 검은 수행자)’라고 불렀다.
810년(당 헌종 5, 헌덕왕 2)에 숭산 소림사 유리단(琉璃壇)에서 구족계를 받으니, 어머님이 유리병을 받은 태몽과 들어맞았다. 스님은 계율에 밝았고 다시 넓은 학문의 세계로 나아갔다. 하나를 들으면 열을 아는 재주가 있어 스승을 능가하였다.
당나라에서 수행, 보시 그리고 귀국
신라 도의(道義) 스님이 혜소 선사보다 먼저 당나라에 와서 불법을 공부하던 차에, 우연히 만나서 벗이 되었다. 이후 도의 스님이 먼저 고국에 돌아가자, 선사는 그 길로 종남산(終南山)으로 들어갔다. 산에서 홀로 지내며 솔방울을 먹으면서 고요하게 지관법(止觀法)을 3년 동안 연마하였다. 지관법 수행이 경지에 오른 후에 도시로 나와 짚신을 삼아 널리 보시하면서 3년 동안 중생을 교화하였다.
이렇게 고행의 수행을 하고서 830년(흥덕왕 5)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범이 개처럼 인도하다
상주 노악산(露岳山, 노음산) 장백사(長栢寺, 현재 남장사)에 주석하니, 찾아오는 이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얼마 후 지리산으로 옮겼는데 당시 범 몇 마리가 포효하며 앞길을 인도하였다. 범들이 위험한 길은 피하고 평탄한 길로 인도하였고, 스님을 따르는 자들은 범을 겁내지 않고 집에서 기르는 개처럼 편하게 여겼다.
지리산 화개곡(花開谷, 화개면)에 이르러 예전 삼법(三法) 화상이 머물렀던 사찰 터에 법당을 지었다. 거기에 몇 년 머물렀는데, 그사이 제자의 예를 표하는 이가 줄을 이었다.
임금이 내린 법명 ‘혜소’
838년에 민애왕이 보위에 올라 선사에게 국서를 내리고 재비(齋費)를 보내며 특별히 뵙기를 청하였다. 선사는 왕에게 정치를 잘 펼치라고 할 뿐 초청을 거절하였다. 그러자 민애왕은 선사가 색(色)과 공(空)을 다 초월하고, 선정과 지혜를 모두 온전하게 갖추었다고 여겨서 ‘혜소(慧昭)’라는 법명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황룡사에 승적을 두게 하고 경주로 불렀다. 하지만 응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선사를 청하는 왕명을 받들어 사자들이 빈번하게 오갔지만, 선사는 큰 산처럼 굳건하게 그 뜻을 바꾸지 않았다.
옥천사 창건
찾아오는 이가 많아서 경내가 좁아지자, 스님은 빼어난 장소를 두루 살피다가 살기 좋고 훤히 트인 남쪽 고개 기슭에 사찰을 창건하여 옥천사(玉泉寺, 현재 쌍계사)라고 하였다.
쌍계사 일주문(출처 : 국가유산청)
중국에 다녀온 이들이 이 사찰을 보고는 깜짝 놀라며, 동진(東晉) 시대 혜원(慧遠) 스님이 주석했던 여산(廬山)의 동림사(東林寺)가 바다 건너로 옮겨 왔다고 하며 감탄하였다.
법통으로 보아 선사는 육조 혜능 선사의 현손이므로 혜능 스님의 영당(影堂)을 세우고 초상화를 봉안하여 대중을 가르치는 데 활용하였다.
범패 전문가
선사의 범패 소리는 우아하고 훌륭하여 그 음성이 마치 금이나 옥에서 나는 소리 같았다. 그리하여 배우려는 사람들이 항상 가득했는데 선사는 가르치는 일에 조금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선사가 중국에서 수용한 범패는 신라의 음악과는 전혀 달랐다. 선사는 불교 음악을 통해 대중 교화를 실행하였다.
유명과 추증
850년(문성왕 12) 정월 9일 먼동이 틀 무렵에 문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온갖 법이 다 공하니, 나도 가려고 한다.
한 마음[一心]이 근본이니 힘써 노력하라.
탑을 세워 사리를 간직하지 말고, 명(銘)을 지어 자취를 기록하지 말라.”
말을 마치고 앉은 채로 열반에 드니, 세속 나이는 77세이고 법랍은 41년이었다. 이때 하늘에 구름 한 점 없었는데 갑자기 바람 불고 우레가 쳤으며, 짐승들이 울부짖고 나무들이 시들어버렸다. 잠시 후 자줏빛 구름이 하늘을 덮더니 공중에서 손가락 퉁기는 소리가 났는데,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듣지 못한 이가 없었다.
선사가 장례 도구를 사전에 준비하게 하였으므로, 유명(遺命)에 따라 제자 법량(法諒) 등이 슬피 울며 선사의 시신을 받들어 즉시 동쪽 봉우리 묘역에 장사 지냈다.
쌍계사 진감선사탑비(출처 : 국가유산지식이음)
선사가 입적한 지 36년 후에 헌강왕이 시호를 추증하여 ‘진감선사(眞鑑禪師)’라 하고 ‘대공영탑(大空靈塔)’이라고 탑명을 내렸다. 스님의 행적을 새기게 하여 영원히 기릴 수 있게 하고는 쌍계사(雙溪寺)라는 절의 편액을 내려주었고,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했다.
· 집필자 : 이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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