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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적(行寂)

활동왕조 통일신라
활동시기 9~10세기
생년 832년
몰년 916년
이칭(한자) 朗空大師 / 白月栖雲
전생에도 스님
행적(行寂, 832~916년)은 경남 하동 출신으로 성은 최씨이다. 어머니 설(薛)씨가 꿈을 꾸었는데, 어떤 스님이 말하기를, “숙세의 인연을 따라 어머님의 아들이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런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태기가 있었다. 어머니는 이때부터 누리고 비린 것을 멀리하고 마음과 행동을 조심하였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모래로 탑을 쌓거나 나뭇잎이나 꽃잎을 따서 향을 만들며 놀더니, 어느 정도 성장하여서는 출가할 결심을 하였다.
범일 국사에게 배우다
스님이 되어, 깨달음[道]을 구하기 위하여 명산을 두루 유람하다가 가야산 해인사(海印寺)에서 『화엄경』을 공부하였다. 855년에 복천사(福泉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굴산사(崛山寺)의 범일 국사(梵日國師, 810~889년)를 찾아가 그의 제자가 되어 15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다. 범일 국사는 당나라로 유학을 가서 당시의 선승들과 선문답을 나누고, 석두 희천(石頭希遷, 700~790년) 계통의 약산 유엄(藥山惟儼, 745~828년)의 선법(禪法)을 전수받고, 신라로 돌아와 강릉 굴산사에 머물며 사굴산문(闍崛山門)을 세우고 후학들을 지도하고 있었다.
당나라에 가서 선법(禪法)을 잇다
행적 스님은 870년 39세에 사신 김긴영(金緊榮)을 따라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다. 중국에 도착하자 곧바로 수도 장안으로 향했고, 황실에서 제공한 보당사(寶堂寺) 공작왕원(孔雀王院)에 머물렀다. 당 의종(재위 859~873년)의 생일을 맞아 입궐하였는데, 황제가 스님에게 바다를 건너온 이유를 물었다. 이에, “당나라의 불교 풍속을 관찰하고 이 나라에서 불도(佛道)를 찾고자 왔습니다. 저는 신령한 불교 유적을 두루 참배하면서 선인들의 가르침을 구하고, 마음을 깨달아 고국으로 돌아가 법을 전하고자 합니다.”라고 포부와 목적을 밝혔다. 황제는 그 말을 듣고 감화를 받아 많은 공양물을 올렸다. 이후 스님은 석두 희천의 선법(禪法)을 이은 석상 경저(石霜慶諸, 807~888년)의 문하에서 잠시 머물러 있기도 하였다. 그 후 십여 년 동안 여러 곳을 행각하며 선지식을 참방하고, 불교 유적을 찾아다니며 견문을 넓혔다.
사굴산문의 법맥을 잇다
885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곧바로 범일 국사를 찾아 뵙고, 운수행각의 길을 떠났다. 889년 4월 스승이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굴산사로 돌아와 시봉하였고, 심인(心印)을 받았다. 스승이 열반한 이후에 삭주(朔州, 강원도 춘천) 건자암(建子庵)에 주석하며 산문을 여니, 그의 가르침을 흠모하여 찾아드는 이들이 구름처럼 많았다.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출처 : 국가유산청)
그러나 894년, 궁예가 난을 일으켜 세상이 혼란하여 사방에서 도적이 봉기하고, 삭주 일대를 점령하자 어지러운 전란을 피해 경주로 옮겨 머물렀다. 이후 900년경에 다시 삭주 건자암으로 돌아왔다.
궁궐에서 국사(國師)로서 조언하다
효공왕(재위 897~912년)은 스님의 법력을 듣고, 특별히 승정(僧正)인 법현 스님 등을 보내 궁궐로 초빙하였다. 스님이 문도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참선을 하는 것은 교화하려는 것이고, 불교가 지금까지 이어진 것은 임금의 외호가 있었기 때문이다.”하고는 906년 9월 초에 도성 경주로 들어왔다. 그해 9월 16일, 임금은 스님을 국사의 예로 대하고 높은 법상에 모셨다. 스님은 엄숙하고 화평한 안색과 침착한 언사로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에 대해 조언했다. 그리고 제자 행겸(行謙)·수안(邃安)·신종(信宗)·양규(讓規)·양경(讓景) 스님에게 법상에 올라 교대로 설법하도록 하여, 임금의 마음을 깨우쳐 주었다. 다음 해 여름에 하직하고, 바닷가로 행각하다가 김해(金海)에 이르러 그곳에서 주석하며 가르침을 펼쳤다.
여제자가 석남산사를 드리다
912년에 신덕왕이 스님을 대궐로 초빙했는데, 915년 봄에 대중을 거느리고 도성에 이르렀다. 임금은 즉위하기 전에 거처하던 집을 스님에게 맡겨 선종사찰(훗날 실제사)로 사용하게 하고, 가르침을 받았다. 당시, 스님의 재가제자(在家弟子) 중에 왕족의 후손인 명요부인(明瑤夫人)이 있었는데, 불법을 숭상할 뿐만 아니라 스님을 받들어 공경하는 마음도 지니고 있었다. 스님이 실제사(實際寺)를 떠나려 하자 명요부인이 석남산사를 기증하고 영원히 주석하기를 청하였다. 스님은 이곳을 임종할 장소로 여기고 915년 7월부터 주석하였다.
사후에도 얼굴빛이 변하지 않다
스님은 916년 2월 12일 아침에, “나는 곧 떠난다. 너희는 법(마음)을 지켜 잃지 말고 정진에 힘쓰도록 하라.”라고 말하고, 가부좌한 채 열반에 들었다. 세속 나이는 85세이고, 법랍은 61년이었다. 스님이 열반에 들 때 구름과 안개가 끼어 마치 그믐처럼 캄캄하였고, 산봉우리가 진동하였다. 산 아래에서 어떤 사람이 산 정상을 올려다보니 오색의 빛이 하늘로 향해 뻗쳐 있고, 그 가운데 한 물건이 하늘을 뚫고 올라가는데, 마치 금으로 된 기둥 같았다고 하였다. 신덕왕은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가슴 아파하며, 사자(使者) 보내 조문하고 장례 의식을 보호하고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916년 2월 17일 제자들은 스승의 유체를 받들어 서쪽 봉우리 기슭에 임시로 묻었다. 917년 11월 중순에 이장하려고 열어 보니, 전신이 조금도 흩어지지 않았고 얼굴빛도 생전과 같았다. 이에 문도들은 감격하여 석실을 마련하여 그대로 막아 버렸다.
탑비의 명성과 훼손
917년에 경명왕(재위 917~924년)은 시호를 낭공대사(朗空大師), 탑호를 백월서운(白月栖雲)이라 추증하고, 최인연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탑비는 당시 세상이 혼란하여 세우지 못하다가, 37년이 지난 954년에 행적 스님의 수제자인 양경 스님이 주도하고, 단목(端目) 스님이 김생(金生, 711~791년)의 글씨로 집자(集字)하고, 순백(純白) 스님이 세웠다.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앞면 탁본(출처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태자사 낭공대사탑비 뒷면 탁본(출처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처음 경북 봉화군 태자산 태자사에 세웠지만, 1509년에 영천(榮川, 현재 영주) 군수 이항(李沆)이 영주 관아 자민루(字民樓)로 옮겨 보관했다. 이 비가 김생 글씨의 집자이면서 김생이 직접 쓴 글씨처럼 자연스러워, 그 가치로 인해 탁본하려는 이들이 많았다. 특히 중국 사신들이 「백월서운탑비」 비문 수천 장을 인출하여 가져갔다. 이 인출하는 일이 백성들에게 고충이 되자 비석을 땅에 묻어 버렸다. 그 후 1693년에 다시 꺼냈고, 1914년에 경복궁 회랑으로 옮겼다가, 현재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 집필자 : 이미숙(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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