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동왕조 | 통일신라 |
|---|---|
| 활동시기 | [8세기] |
| 이칭(한자) | 大賢 / 靑丘沙門 |
용장사 미륵불 얼굴이 스님 따라 돌다
태현(太賢)은 대현(大賢)이라고도 하는데, 스스로 ‘청구사문(靑丘沙門)’이라고 일컬었다. ‘청구’란 ‘동쪽 언덕’으로 중국의 동쪽에 있는 우리나라를 가리킨다.
태현 스님은 주로 경주 남산 용장사(茸長寺)에 주석하였다. 사찰에 미륵석조상이 있었는데 스님이 불상 둘레를 돌며 예불하면, 불상이 스님을 따라 얼굴을 돌렸다고 한다.
용장사 터를 내려다보는 곳에 있는 석조좌상(출처 : 국가유산청)
금광명경을 강론하니 우물물이 솟다
763년(경덕왕 12) 여름에 크게 가뭄이 들자, 경덕왕이 조서를 내려 태현 스님을 궁궐로 불러, 단비가 내리도록 기도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태현 스님이 날을 잡아 재(齋)를 올리고자 발우를 늘어놓고 있었는데, 정수(淨水)를 바치는 것이 늦어졌다. 감독 관리는 나라의 중대한 일에 차질이 생기게 한다며 담당자를 꾸짖었다. 담당자는 쩔쩔매며, 궁궐의 우물이 말라 멀리서 길어오느라 늦어졌다고 하였다. 태현 스님이 그 말을 듣고는, 왜 일찍 말하지 않았느냐고 아쉬워했다.
스님이 재를 올리고 『금광명경』을 강론하면서 향로를 들고 가만히 있으니, 잠깐 사이에 궁궐 우물에서 물이 솟아 나왔다. 솟아오른 물의 높이가 7길(17~21m)이나 되었다. 가뭄이 들어 우물도 말랐는데 기도의 효험으로 우물이 그렇게나 높이 솟아오르니, 궁 전체가 놀랐다. 『금광명경』을 강론할 때 우물물이 솟았으므로 이후 그 우물은 ‘금광정(金光井)’이라 불리게 되었다.
유식학을 깨우치다
태현 스님은 지혜롭고 말솜씨 있고 정밀하고 민첩해서 판단하는 것이 명료했다. 원측 스님의 제자인 도증(道證) 스님이 귀국하자 스승으로 모시고 유식학을 익혔다. 무릇 법상종 경전은 뜻과 이치가 그윽하고 깊어서 이해하기가 매우 어렵다. 태현 스님은 홀로 그 잘못된 것을 바로잡고 그윽한 뜻을 깨우쳐 여유 있게 이치를 분석하였다. 동국의 후학들은 모두 태현 스님의 가르침을 따랐고, 중국의 학자들도 이를 얻어 안목으로 삼곤 하였다.
신라 법상종을 확립하다
7세기 중반 당나라 현장 법사는 제자 규기(窺基)와 함께 『성유식론』을 번역하였는데 이를 바탕으로 당나라 법상종이 성립되었다. 법상종은 유식종·유가종이라고도 한다. 신라 출신의 원측 스님은 당나라에서 활동하면서 인도 호법(護法) 승려의 입장을 따르는 규기 중심의 자은학파 사상과는 다르게, 구유식과 신유식을 섭렵하여 서명학파를 이루었다. 신라 국내에서도 원효 스님과 경흥 스님을 비롯한 학승들에 의해서 『성유식론』과 『유가사지론』 중심으로 활발하게 유식학 연구가 진행되었다.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 유식학 승려들의 활발한 교학 연구와 활동은 8세기 중반 진표(眞表)와 태현 스님에 이르러 종합되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법상종이라는 종파가 성립하게 되었다.
50여 종의 저서
태현 스님은 50여 종 100여 권의 저서를 찬술하였는데 현재 『성유식론고적기(成唯識論古迹記)』와 『기신론내의약탐기(起信論內義略探記)』·『범망경고적기(梵網經古迹記)』·『범망경보살계본종요(梵網經菩薩戒本宗要)』·『약사본원경고적기(藥師本願經古迹記)』 등 5종만이 전한다. ‘고적기(古迹記)’라는 이름은 고인의 자취, 즉 주석에 순응하여 풀이할 뿐 자신의 견해로 함부로 풀이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태현 스님의 저술은 한국불교의 교학 수준을 한 차원 끌어올렸다.
· 집필자 : 이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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