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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징(體澄)

활동왕조 통일신라
활동시기 9세기
생년 804년
몰년 880년
이칭(한자) 軆眞 / 普照
태양 빛이 어머니의 배를 관통하다
체징(體澄, 804~880년)은 웅진(熊津, 충남 공주)에서 태어났다. 성은 김씨이며, 집안은 대대로 명망이 있는 가문으로 인의(仁義)의 가풍을 이어 왔고, 효행과 예절을 중요시하였다. 어머니가 꿈을 꾸었는데, 공중에 뜬 태양에서 빛이 내려와 어머니의 배를 관통하였다. 그런 후 스님을 잉태하였다. 잉태한 지 열 달이 지나도록 출산하지 못했는데, 어머니는 상서로운 꿈을 생각하고 공덕을 쌓으며 좋은 인연을 기도하고, 육류와 생선을 먹지 않고 태교하였다.
세속의 부귀영화를 버리다
스님은 사대부 자제의 교육을 받았지만 7~8세 때부터 마음 깨닫는 공부를 하고자 출가에 뜻을 보였다. 부모는 부귀와 재색으로 출가를 만류하려고 했으나, 스님은 세상의 부귀영화를 뜬구름처럼 가볍게 여겨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림 없는 굳은 결심을 드러내었다.
도의 국사의 제자 염거 선사에게 배우다
19세에 스님이 되어, 화산(花山) 권법사(勸法師)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24세에 서산 보원사(普願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화엄경』을 배우며 수행하였다. 7일간 밤낮으로 잠을 자지 않고 용맹정진하던 어느 날, 갑자기 기이한 꿩 한 마리가 날아드는 신이한 일을 겪었는데, 이는 장차 법왕(法王)이 나타나 법을 일으킬 징조라고 하였다.
보원사지(출처 : 내포가야산 보원사 홈페이지)
이후 스님은 보원사를 떠나 설악산 억성사(億聖寺) 염거(廉居, ?~844년) 선사를 찾아가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었다. 염거 스님은 도의 국사(道義國師)의 선법(禪法)을 전해 받아 제자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스님은 염거 스님의 문하에서 깨달음을 위해 일심으로 정진하였고, 스승은 체징 스님의 타고난 바탕과 기개가 뛰어남을 알아보고, 돌무더기 속에서 옥을 발견한 듯 기뻐하며 진리를 부촉하고 법인(法印)을 전해 주었다. 스님은 스승에게 법을 받고 선(禪)의 요체를 터득하였는데, 마치 막혔던 강물이 터지듯 거침이 없었고, 평탄한 길을 가듯 쉬웠다고 한다. 837년 정육(貞育)·허회(虛會) 스님과 함께 법을 구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 당나라로 가서, 선지식을 만나 불법을 강론하고 도(道)를 비교해 보면서 유람하였다. 그 결과 도의 국사의 제자 염거 선사에게 배운 것과 별다르지 않음을 깨닫고, 구법의 발길을 돌려 840년 2월 평로사(平虜使)를 따라 고국으로 돌아왔다.
최초의 선문(禪門)을 열다
스님은 귀국하여 고향에서 많은 이들을 교화하다가, 859년에 전라도 무주(광주) 황학사(黃壑寺)에 머물며 스님과 불자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고 있었다. 당시에 헌안왕(재위 857~861년)이 스님의 법력을 듣고 그 도(道)를 우러러 선(禪)의 가르침을 청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에 장사현(長沙縣, 전북 고창군 무장면)의 부수(副守) 김언경(金彦卿)을 파견하면서 차와 약을 받들고 가서 모셔 오게 하였다. 그러나 스님은 육체적 통증과 하안거 기간을 핑계로 사양하였다. 그해 10월에 임금은 승정인 연훈(連訓)·봉진(奉震)·빙선(馮瑄) 스님 등을 보내 가지산사로 옮겨 주석하시기를 간청하였다. 이에 스님은 주석처를 가지산으로 옮겨서 보림사(寶林寺)를 짓고, 최초의 선문인 가지산문(迦智山門)을 열어 가르침을 펼쳤다.
보림사 법당에 쌍무지개가 들다
860년 2월에 김언경이 제자의 예를 갖추고 체징 스님의 재가제자(在家弟子)가 되었다. 그는 개인 재산으로 철 2,500근을 사서, 비로자나불 1구(軀)를 주조하여 봉헌하는 등 스님이 거처하는 사찰을 장엄하였다.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출처 : 국가유산청)
헌안왕도 교지를 내려 망수댁(望水宅), 이남댁(里南宅) 등 귀족들에게 시주를 권하여, 금 160근과 곡식 2천 곡으로 사찰을 장엄하는 일을 돕게 하였다. 또한 보림사를 왕의 직속 기구인 선교성(宣敎省)에 예속시키는 등 스님의 교화 활동을 적극적으로 후원하였다. 861년, 전국에서 시주한 재물로 보림사를 확장하여 중창하였고, 그해 불사 완공을 축하하는 낙성식을 봉행하였다. 낙성식 날, 스님이 자리에 오르자, 찬란한 쌍무지개가 법당 안을 뚫고 들어와 구석구석 밝게 비추고 사람들의 얼굴까지 환하게 물들이는 이적이 일어났다.
산하대지가 열반을 말하다
880년 3월 9일 스님은 제자들에게 당부하며 말했다. “나는 곧 돌아갈 것이니, 너희들은 불법을 잘 호지하라.” 그해 4월 12일 저녁에 천둥 번개가 온 산을 진동하고, 자정 무렵에는 스님이 머문 곳의 땅이 크게 흔들렸다. 이튿날 동이 틀 무렵에 스님이 오른쪽 옆구리를 땅에 대고 누운 채 열반하였다. 세속 나이는 77세이고, 법랍은 52년이었다. 스님의 제자 영혜(英惠)·청환(淸奐)·의거(義車) 스님 등 800여 명은 스승을 추모하여 왕산(王山) 송대(松臺)에서 다비식을 거행하고 탑을 세워 유골을 봉안하였다.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탑비(출처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883년, 헌강왕은 시호를 보조(普照), 탑호를 창성(彰聖), 사호를 보림사(寶林寺)라 추증하고, 884년에 탑비를 세우게 하면서 김영(金穎)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글씨는 김원(金薳)과 김언경 두 사람이 쓰고, 글자는 석현창(釋賢暢)이 새겼다.
· 집필자 : 이미숙(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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