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진표(眞表)

활동왕조 통일신라
활동시기 [8세기]
12세에 출가하다
진표(眞表) 율사는 718년(성덕왕 17)에 만경현(萬頃縣, 김제)에서 아버지 진내말(眞乃末), 어머니 길보랑(吉寶娘) 사이에 태어났다. 진씨는 백제 귀족의 성씨였고, ‘내말’은 백제 관등 3품을 신라 관등으로 전환한 것이니, 그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유지한 것으로 보인다. 12세에 출가하고자 아버지에게 여쭈니, 아버지가 할아버지와 의논 끝에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어른들께 절하고 아뢰었다.
“불안한 삼계(三界)의 생사 길에서 중생들과 더불어 항상 고락을 같이하되, 오늘 이후 비록 세상에서 부모님을 만나기 어려울 것이나, 깨달음을 얻는 날에 한 곳에서 만나 뵙겠습니다.”
금산사 순제 법사의 가르침
김제 모악산 금산사(金山寺)에 가서, 순제(順濟) 법사에게 배움을 청하였다. 순제 법사가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당나라에 들어가 선도(善導, 613~681년) 스님께 가르침을 받았고, 이후 오대산으로 들어가 문수보살의 현신에 감응하여 오계(五戒)를 받았다.”고 하였다. 선도 스님은 정토종을 크게 일으키고 『관무량수경소』 등을 저술한 분이다. 진표가 수행을 어찌하여야 계를 받을 수 있냐고 물으니, 정성이 지극하면 1년을 넘기지 않는다고 하였다. 법사가 사미계와 『공양차제비법(供養次第秘法)』과 『점찰선악업보경』을 주며 말했다. “이 계법을 가지고 미륵보살과 지장보살 앞에서 정성을 다해 참회를 구하여 계법을 받아 세상에 널리 전하라.”
지장보살이 현신하다
진표 스님이 스승의 말을 듣고 명산을 두루 돌아다니다가 27세에 쌀 20말을 쪄서 말려 양식으로 삼고 선계산(仙溪山, 변산) 부사의방(不思議房)에 들어갔다. 그곳은 의상봉 8부 능선에 위치하여 밧줄을 타고 내려가야 이를 수 있는 3~4평 정도의 좁은 공간으로, 그 아래는 까마득한 낭떠러지다. 부사의방에서 쌀 5홉으로 하루 끼니를 삼고 1홉은 쥐를 먹이면서, 신업·구업·의업 삼업을 갖추어 몸을 버려서 참회하는 망신참(亡身懺)에 전념하였다. 그렇게 계법을 구한 지 3년이 지나도록 수기(授記)를 얻지 못했다. 수기(授記)란 ‘성불할 것이라고 예언하거나 인가하는 기별(記別, 소식)’을 뜻한다. 그래서 발분하여 절벽 아래로 몸을 던지니 푸른 옷의 동자가 나타나 손으로 받들어 바위 위로 옮겼다. 율사는 다시 뜻을 세워 21일을 기약하고 밤낮으로 열심히 닦고 돌을 두드리며 참회하였다. 3일이 되자 손과 팔이 꺾여 떨어졌는데, 괘념하지 않고 정진을 이어 7일 밤이 되자, 지장보살이 손에 석장을 잡고 와서 손과 팔을 예전처럼 회복시켜 주었다. 지장보살이 가사와 바리를 주자, 율사는 감동하여 더욱 정진하였다.
미륵보살이 간자를 주다
정진한 지 21일이 되자 천안(天眼)이 열리며 도솔천 신중(神衆)이 내려오는 형상이 보였다. 지장보살과 미륵보살이 나타났고, 미륵보살이 진표의 정수리를 쓰다듬으면서 칭찬하였다. “잘하는구나. 대장부여. 이같이 계를 구하여 목숨을 아끼지 않고 참회를 간절히 구하는구나.” 지장보살이 『계본(戒本)』을 주고, 미륵보살은 간자(簡子, 찌) 2개를 주었는데 하나는 ‘9자(字)’라고 쓰여 있었고, 하나는 ‘8자’라고 쓰여 있었다. 이때가 『삼국유사』 「진표전간(眞表傳簡)」에는 23세 740년(효성왕 4) 3월 15일 진시(오전 8시경)로, 「관동풍악발연수석기(關東楓岳鉢淵藪石記)」에는 762년(경덕왕 21) 4월 27일로 기록되어 있다. 제8간자와 제9간자에 대해 「진표전간」에서는 ‘새롭게 얻은 묘한 계율[新得妙戒]’과 ‘구족계를 추가로 얻음[增得具戒]’이라고 하여 보살계 사상으로 설명하고, 「관동풍악발연수석기」에서는 시각(始覺)·신훈종자(新熏種子)와 본각(本覺)·법이종자(法爾種子, 本有種子)라고 『대승기신론』과 유식사상의 관점에서 설명한다. 진표 율사의 사상은 『점찰경』의 내용 가운데 유식사상의 측면을 더 강조할 것인지, 보살계 사상을 더 강조할 것인지를 두고 사상적 분화가 발생하였다. 미륵신앙과 점찰법회를 앞세운 그의 교화 활동은 신라 사회에 파급되었고, 제자들을 통해 고려 시대, 나아가 오늘날까지도 계승되고 있다.
바닷속에서 물고기에게 계를 주다
진표 율사가 미륵보살의 수기를 받은 후 산에서 내려오자, 짐승들조차 발 앞에 순하게 엎드려 공경을 표했다. 율사는 금산사에 주석하면서 매해 불법을 널리 베풀었다. 교화가 널리 미치자, 유람을 다니다가 아슬라주(阿瑟羅州, 강릉)에 이르렀다. 물고기와 자라들이 섬 사이에 다리를 만들어 물속으로 맞아들이니, 스님이 바닷속에서 불법을 강의하였고, 물고기와 자라가 계를 받았다. 이때가 752년(경덕왕 11) 2월 15일이다. 경덕왕이 소식을 듣고 궁 안으로 맞아들여 보살계를 받고 조(租) 7만 7천 석을 시주하였다. 왕후와 외척도 모두 계품(戒品, 계율 조목)을 받고 비단 5백 단과 황금 50량을 보시하였다. 율사는 이를 모두 받아서 여러 사찰에 나누어주고 널리 불사를 일으켰다. 766년(혜공왕 2)에 모악산 금산사를 중창하니, 이로써 금산사가 큰 사찰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775년(혜공왕 11)에 청주 안심사를 창건하였다. 편안한 마음으로 제자를 길렀다고 해서 ‘안심사’라고 불렀다고 한다.
진표 율사가 중창한 보은 법주사의 여래상(출처 : 국가유산청)
776년(혜공왕 12)에 속리산 법주사를 중창하였으니 그 뒤로 법주사는 그 제자들이 주석하며 미륵신앙의 중심도량이 되었다. 법주사 경내에 있는 큼직한 바위에는 앉은 모습의 여래상이 조각되어 있으니, 옆 바위에 조각된 지장보살과 함께 법주사의 성격을 알려준다.
무덤 위에 소나무가 자라다
진표 율사는 부친을 모시고 강원도 간성군 신북면 용계리 발연수로 가서 지내다가, 부친의 임종을 맞았다. 발연수를 미륵과 약사의 도량으로서 국가에 도움이 되도록 하고, 거기서 입적하였다. 그곳에 율사의 시신을 안장했는데, 이 무덤 위에서 소나무가 자라는 신이한 일이 일어났다. 후에 발연수에 사찰을 창건하여 발연사(鉢淵寺)라 하였고, 율사의 사리를 봉안하였다.
발연사 진표율사장골비 탁본(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근래 발연사 터에서 「발연사진표율사장골비(鉢淵寺眞表律師藏骨碑)」가 출토되었다. 이 비는 발연사의 승려 영잠(瑩岑)이 짓고, 이자림(李子琳)이 해서로 써서 1199년(신종 2)에 세웠다.
점찰 교법의 확립
진표 율사는 법상종의 개종조로 꼽기도 하고, 점찰(占察) 교법의 확립자이며, 참회 불교를 집대성한 개조로 보기도 한다. 그는 점찰 교법을 통해 개개인의 삼세 과보의 선악을 점치고, 그에 따라 계를 부여함으로써 참회 정진하게 하였다. 많은 이들에게 자신의 업보를 알고 참회하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서 점찰 법회를 시행하였던 것이다. 진표 율사와 그의 제자들은 미륵보살이 있는 도솔천에 상생하길 권하였고, 그 방법으로 오계와 팔재계(八齋戒) 등의 계법을 지킬 것을 강조하였다. 8세기 중엽 경덕왕 대를 경계로 하여 기존의 종합적인 학문불교가 쇠퇴하고 의상계 화엄학과 진표계 미륵신앙이 크게 세력을 확대하면서 불교계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하게 되었다. 참회와 보살계 수지를 요건으로 시행되는 점찰법(占察法)은 교학에 의거하지 않고 신앙적인 차원에서 일반인들에게 수용될 수 있었으므로, 불교의 문호를 확대한 것이다. 법을 얻은 제자 중 영심(永深)·보종(寶宗)·신방(信芳)·체진(體珍)·진해(珍海)·진선(眞善)·석충(釋忠) 스님이 손꼽히니 모두 산문(山門)의 개조가 되었다. 영심은 진표의 간자를 전하였는데 속리산에 살면서 법통을 계승하였다. 단을 만드는 법은 점찰육륜(占察六輪)과 조금 다르나 산중에서 전하는 본래의 규범과 같았다. 점찰육륜은 『점찰경』에 나오는 목륜상법(木輪相法) 중 1에서 18까지의 숫자를 세 개씩 새긴 6개의 목륜으로 삼세에 받는 업보의 차별을 점치는 법을 말한다. 이는 삼세에 받는 과보를 점칠 때 사용하니, 이것을 세 번 던져서 나타나는 수로 선악을 결정한다. 이것이 총 189종이 되는데, 이는 189개의 간자를 사용하는 진표의 점찰법과 조금 다르지만 유사하다.
· 집필자 : 이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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