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동왕조 | 통일신라 |
|---|---|
| 활동시기 | 7세기 |
| 생년 | 625년 |
| 몰년 | 702년 |
| 이칭(한자) | 義想 / 義相 / 浮石 / 海東華嚴始祖圓敎國師 / 浮石大師 / 浮石尊者 |
당나라로 유학 가다
의상(義湘, 625~702년) 법사는 귀족의 후예로서 29세에 경주 황복사(皇福寺)에서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얼마 있지 않아 중국으로 가서 불교의 교화를 보고자, 원효 스님과 함께 요동으로 갔으나 변방 순라군에게 첩자로 오인되어 수십 일 동안 갇혔다가 간신히 풀려나 돌아왔다.
650년 무렵에 신라에 왔던 당나라 사신의 배가 돌아가려고 하자 편승하여 중국으로 들어갔다. 처음에 양주(楊洲)에 머물렀더니, 주장(州將) 유지인(劉至仁)이 청하여 관아 안에 머무르게 하며 지극하게 대접하였다. 얼마 있지 않아 종남산(終南山) 지상사(至相寺)로 찾아가서 화엄종의 2조 지엄(智儼, 602~668년) 대사를 뵈었다.
스승인 지엄 대사의 꿈
지엄 대사는 전날 밤에, 해동에서 큰 나무 하나가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 중국에까지 와서 덮는 꿈을 꾸었다. 그 위에 봉황의 둥지가 있어 올라가서 보니, 마니보주가 있고 그 광명이 멀리까지 비췄다. 꿈을 깨고는 놀랍고 이상하여 청소하고 기다렸더니 의상이 왔다. 지엄 대사는 특별히 예의를 갖추어 맞이하며, “나의 어제 꿈은 그대가 올 징조였다.”라고 하고 제자로 받아들였다. 의상 스님은 지엄의 제자로서 『화엄경』의 미묘한 뜻을 자세히 공부하였다.
지엄의 문하에 있을 때 의상 스님은 지엄이 지은 7언 30구의 시를 바탕으로 도인(圖印)을 그려서 바쳤다. 지엄이 이것을 보고 찬탄하면서, “너는 법성(法性)을 완전히 깨닫고 부처님의 뜻에 통달하였으니 이에 대한 해석을 지어야 할 것이다.”라고 했다. 그래서 의상이 40여 장의 해석을 지어 지엄에게 바치자, 지엄은 부처님의 뜻에 부합하는지 알아보기 위하여 그것을 가지고 부처님 앞에 나아가 서원을 세우고 불을 붙였다. 그러자 모두 불타고 남지 않았다. 다시 60여 장의 해석을 지어 바쳤는데, 역시 불을 붙이자 모두 타서 없어졌다. 다시 80여 장의 해석을 지어 바치자, 지엄은 앞서와 마찬가지로 불을 붙였다. 이번에는 종이 중에 타는 것도 있지만 타지 않는 것이 있었다. 그때 타지 않은 내용이 지금 세상에 전하는 『화엄일승법계도』이다. 이 이야기가 고려시대 균여(均如) 스님이 기록한 『일승법계도원통기(一乘法界圖圓通記)』에 전한다.
의상 법사는 신라 화엄사상을 체계화하여 독자적인 사상 체계를 정립하였다. 그의 화엄사상은 개체의 독자성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개체 간의 융합을 지향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실천행을 중시하여 미타신앙을 진작시키고 구도적 관음신앙을 강조하였다.
국난을 알리러 입국하다
당시 본국의 승상 김흠순(金欽純, 김유신의 동생) 혹은 김인문(金仁問, 문무왕의 동생)이라고도 하는데, 그와 장군 양도(良圖) 등이 당나라에 갔다가 구금되었고, 당 고종이 군사를 크게 일으켜 신라를 치려고 하였다. 그래서 김흠순이 의상에게 알려 먼저 신라로 돌아가게 하였다. 670년에 의상 법사가 귀국하여 그 사정을 신라 조정에 알렸다. 조정에서는 신인종(神印宗)의 개조인 명랑(明朗) 스님에게 밀단법(密壇法)을 설치하고 기도하여 이를 물리치게 하였고, 이로써 국난을 면하였다.
676년에 의상 법사가 태백산에서 조정의 뜻에 따라 부석사를 창건하고 대승(大乘)의 가르침을 널리 펼쳤다.
의상 법사가 창건한 부석사의 중심 건물 무량수전(출처 : 국가유산청)
의상 법사는 교단을 운영함에 절제를 강조하여 국왕이 하사한 토지와 노비를 거절하는 등 철저한 수행자의 삶을 살았다. 의상 법사의 답변은 이렇게 전한다.
“불법은 평등하여 위아래 사람에게 같이 균등하고 귀하고 천한 사람이 함께 지켜 나갑니다.
『열반경』에서 8가지 부정한 재물(八不淨財)을 말했는데, 어찌 토지를 가지며 노복을 부리겠습니까.
빈도는 법계로 집을 삼고 발우로 곡식을 기다리니, 법신의 혜명(慧命)이 이를 의지해 삽니다.”
의상의 청정한 지계(持戒)는 평소의 생활 태도에서도 확인된다. 그는 몸을 씻고 나서 수건을 쓰지 않고 그대로 마르게 하였다고 한다.
당나라 현수 법사가 보낸 편지
지엄의 문인으로 의상 법사와 동학이며 화엄종 3조에 오른 당나라 현수 법장(賢首法藏, 643~712년) 법사가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를 찬술하여 의상에게 복사본과 편지를 보냈으니, 그 편지가 『원종문류(圓宗文類)』에 전한다.
“우러러 듣건대, 상인(上人, 의상)께서 귀국 후에 화엄을 강의하고, 법계의 무진연기(無盡緣起)를 선양하며 겹겹의 제망(帝網)으로 불국(佛國)을 새롭고 새롭게 하여,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한다고 하니 기쁨이 더욱 커집니다. 이로써 석가여래가 돌아가신 후에 불일(佛日)을 밝게 빛내고 법륜을 다시 구르게 하여 불법을 오랫동안 머물게 할 이는 오직 법사뿐임을 알겠습니다.
(중략) 스승의 글이 뜻은 풍부하나 표현이 간략하여 후인이 뜻을 알기에는 어려움이 많으므로 제가 스승의 은밀한 말과 오묘한 뜻을 적어 해설서를 완성하였습니다. 승전(勝詮) 법사가 베껴서 고향(신라)에 돌아가 그 땅에 전하고자 하니, 청컨대 상인께서 옳고 그름을 상세히 검토하여 가르쳐 주시기 바랍니다.”
제자들, 의상 화엄학의 확산
의상은 저술에 치중하기보다 제자들과 실천적인 교화에 중점을 두었다. 부석사를 미타신앙에 따라 구성하여 이를 진작시키고 구도적 관음신앙을 강조한 것은 일반인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신앙을 지속적으로 이어가기 위함이었다.
그의 제자인 오진(悟眞)·지통(智通)·표훈(表訓)·진정(眞定)·진장(眞藏)·도융(道融)·양원(良圓)·상원(相源)·능인(能仁)·의적(義寂) 등 10대덕은 모두 아성(亞聖)이라고 일컬어지고 각각 전기가 있다. 그중 오진은 일찍이 하가산(下柯山, 안동 학가산) 골암사(鶻嵓寺)에 거처하면서 매일 밤에 팔을 펼쳐 부석사 방의 등을 켰다고 한다. 지통은 소백산 추동에서 의상이 화엄경을 강설할 때 참석하여 강설의 요지를 추려 『추동기(錐洞記)』를 저술했다. 표훈은 일찍이 불국사에 있으면서 항상 천궁(天宮)을 왕래하였다고 한다.
원래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 활동하던 의상계 문도들은 경덕왕 대(742~765)에 들어와 수도에 진출하여 활동하면서 왕실과 귀족들의 후원을 얻어 화엄사상을 적극적으로 홍포하였다. 의상의 제자인 표훈(表訓)과 손제자인 신림(神琳)은 경주에서 화엄사상을 강의하였고, 곧 불국사와 석불사(석굴암), 그리고 왕실 원찰인 황복사에 주석하게 되었다. 이들의 활동에 힘입어 의상계 화엄학은 점차 불교계의 주류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허공을 밟고 탑돌이
경주 황복사지 3층석탑(출처 : 국가유산청)
의상이 황복사에 있을 때 무리들과 함께 탑을 돌았는데, 매번 허공을 밟고 올라갔으며 계단으로 오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 탑에는 사다리가 설치되지 않았고 제자들도 층계에서 1미터 가량 떨어져 허공을 밟고 돌았다. 의상이 돌아보며 말하기를, 세상 사람이 이를 보면 반드시 괴이하다고 할 것이니 세상에 전할 것은 못 된다고 하였다.
· 집필자 : 이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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