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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元曉)

활동왕조 통일신라
활동시기 7세기
생년 617년
몰년 686년
이칭(한자) 誓幢 / 新幢 / 小性居士 / 大聖和諍國師 / 和諍國師 / 西谷沙彌 / 百部論主 / 海東法師 / 海東宗主 / 誓幢和尙 / 高仙大師
‘새벽’의 탄생
원효(元曉, 617~686) 대사의 속성은 설(薛)씨이다. 아버지는 신라 17관위 중 제11위인 내마(奈麻)를 지낸 담날(談捺)이다. 압량군(押梁郡)의 남쪽(현재 경산) 불지촌(佛地村) 북쪽의 율곡(栗谷) 사라수(裟羅樹, 밤나무) 아래에서 태어났다. 그의 출생은 부처님이 사라쌍수 아래에서 출생한 것과 유사하다. 불지촌이라는 지명이나 사라수는 원효의 탄생을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처럼 승화시키고자 했던 후인들의 뜻이 투영된 것으로 보인다 대사의 아명은 서당(誓幢, 새털)이다. 어머니가 유성(流星)이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고 태기가 있었다. 달이 찼을 때 밤나무 밑을 지나다가 갑자기 해산하게 되어, 남편의 털옷을 밤나무에 걸고 해산하게 되어서 그런 이름을 지었다. 해산할 때 오색구름이 땅을 덮었다고 한다.
출가와 학업
태어날 때부터 총명이 남달라 스승을 따라서 배우지 않았다. 대사는 ‘불일(佛日)을 처음 빛나게 했다’는 뜻으로 스스로 ‘원효’라고 했으니, 당시 사람들은 모두 ‘새벽’이라고 불렀다. 10여 세에 벌써 출가하여 선지식을 찾아 학업을 닦았다. 반고사(磻高寺)에 머물 때 영취산 혁목암(赫木庵) 낭지(朗智) 스님의 권유에 따라 「초장관문(初章觀文)」과 「안신사심론(安身事心論)」을 저술하였는데, 전하지 않는다. 고구려 고승으로 백제 땅 고달산으로 옮겨 온 보덕(普德) 스님에게 『열반경』과 『유마경』 등을 의상 스님과 함께 배웠다.
유학의 시도와 깨달음
650년 34세 때 의상 스님과 함께 육로로 당나라에 가서 공부하려고 요동까지 갔다가 그곳 순라군에게 첩자로 오인되어 갇혀 있다가 풀려나 돌아왔다. 661년 45세 때 다시 의상 스님과 해로로 당나라에 가려고 항구로 이동하는 도중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아 외쳤다.
“마음이 일어나므로 갖가지 현상이 일어나고, 마음이 멸하니 토굴과 무덤이 둘이 아니로구나.”
그리하여 당나라에 갈 필요가 없음을 느껴 유학을 단념하고, 저술과 대중교화에 전념하였다. 662년 46세 때는 김유신이 고구려를 원정할 때 종군하여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보낸 암호문을 해독하여 신라군이 신속히 퇴각할 수 있도록 하는 공을 세웠다.
하늘 떠받칠 기둥을 만들리라
원효 대사는 출가 후에 집을 희사하여 절을 삼아 ‘초개사(初開寺)’라고 하고, 사라수 옆에도 절을 지어 ‘사라사(裟羅寺)’라고 하였다. 태종무열왕의 집권기인 655년에서 660년 사이로 추측되는 일이다. 대사는 거리에서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불렀다.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허락하려는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다듬고자 한다.” 사람들이 그 뜻을 알지 못했는데, 태종무열왕이 그것을 듣고서 말했다. “이 스님께서 아마도 귀부인을 얻어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하는가 보네. 나라에 큰 현인이 있으면 그보다 더한 이로움이 없지.” 그래서 궁중 관리를 시켜 원효를 찾아서 궁중으로 맞아들이게 하였다. 궁중의 관리가 칙명을 받들어 나갔는데, 벌써 스님이 남산에서 내려와 문천교를 지나고 있어 마주치게 되었다. 스님은 일부러 물에 떨어져 옷을 젖게 했다. 관리는 스님을 요석궁으로 인도하여 옷을 벗어 말리게 하였고, 이 때문에 그곳에서 묵게 되었다. 이후 요석궁 공주가 과연 태기가 있어 설총(薛聰)을 낳았다. 설총은 나면서부터 명민하여 경서와 역사서에 두루 통달하고, 신라 10현(十賢) 중의 한 분이 되었다. 중국과 여러 나라의 각 지방 풍속과 물건 이름에 통달하고 우리말로 6경(六經)을 읽고 해석하는 방법을 개발하여, 후학들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소성거사, 무애의 대중 교화
원효가 설총을 낳은 이후로는 속인 복장으로 바꾸어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고 하였다. 우연히 광대들이 큰 박을 가지고 노는 것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괴이하였다. 그래서 그 박을 얻어서 도구를 만들고, 일체 무애인(無㝵人, 걸림없는 이)은 생사를 벗어난다는 화엄경의 이치에 따라 「무애가(無㝵歌)」를 지어 부르며 다녔다. 마을마다 다니며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니 가난하고 어리석은 이들도 부처님을 알게 되었다.
경전을 해석하다
일찍이 분황사(芬皇寺)에 주석하며 화엄경 해설서를 쓰다가 제4 십회향(十廻向) 품에 이르자 마침내 붓을 놓았다. 또 일찍이 소송으로 인해서 몸을 백 그루의 소나무로 나누기도 했으므로, 보살 수행의 초지(初地) 환희지(歡喜地) 경지에 올랐다고 하였다. 또 바다용의 권유에 따라 길에서 조서를 받아 금강삼매경 주석서를 지으면서 붓과 벼루를 소의 두 뿔 위에 놓아두고 이를 각승(角乘)이라고 했으니, 본각(本覺)과 시각(始覺) 두 각의 뜻을 은유한 것이다.
경주 구황동 분황사지 전경(출처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원효 대사는 특정 스승이 없이 동아시아권 불교 전적을 거의 모두 섭렵하고 80여 부의 경전을 주석하여 총체적인 이해를 시도하였다. 그는 당시 교리적 문제가 되고 있던 쟁론들을 조화시킬 수 있는 이론체계의 구상에 골몰하여 일심사상과 화쟁(和諍)사상을 제창하였다. 저술 가운데 대표적인 것은 『대승기신론소』 3권, 『금강삼매경론』 3권, 『화엄경소』 10권,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1권 등이다. 저술을 분야별로 나누어 보면 유식 계통의 경론에 대한 연구서가 62권으로 가장 많고, 불교 논리학과 반야부·중관부 등 경률론 거의 모든 부문을 망라하고 있다.
사후에 설총을 돌아보다
원효 대사가 일찍이 머물던 혈사(穴寺, 경주 골굴사)에서 입적하자 설총이 유해를 부수어 그의 진용(眞容)을 빚어 분황사에 봉안하고, 공경하고 사모하여 지극한 슬픔의 뜻을 표하였다. 설총이 소상 옆에서 예배하니, 소상이 문득 돌아보았다고 한다.
시호 화쟁국사
화쟁국사비 받침(출처 :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고려시대 1101년(숙종 6) 8월에 숙종의 조서에 따라 평장사(平章事) 한문준(韓文俊)이 지은 원효의 화쟁국사비(和諍國師碑)가 분황사에 건립되었다. 숙종은 원효가 동방의 성인인데도 비기(碑記)와 시호가 없음을 애석히 여겨서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게 한 것이다.
· 집필자 : 이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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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효의 생애와 사상
    학술논문 은정희 | 한국인물사연구 | 4 | 서울: 한국인물사연구소. | 2005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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