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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행(神行)

활동왕조 통일신라
활동시기 8세기
생년 704년
몰년 779년
이칭(한자) 信行 / 愼行
안홍(安弘) 법사의 증손자
신행(神行, 704~779년) 선사는 신라 왕족 출신으로 속성은 김씨이고, 경주 어리(御里) 사람이다. 급간(級干) 김상근(金常勤)의 아들이고, 안홍(安弘) 법사의 증손자이다. 안홍은 안함(安含)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하는데, 안함 법사는 참서(讖書) 『동도성립기(東都成立記)』를 찬술하고 황룡사 건립을 추진했던 7세기 승려로서 경주 흥륜사 금당(金堂)에 봉안된 열 분의 성인에 속한다.
30세에 출가
신행 선사는 부친의 영향으로 일찍이 유학을 공부하였으며, 벼슬을 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733년(성덕왕 32) 나이 서른에 뒤늦게 출가하여 운정(運精) 율사를 섬기면서 발우 하나와 승복 한 벌만으로 2년 동안 고되게 수련했다.
법랑 선사의 가르침과 입적
선덕왕 때 법랑(法朗) 선사가 운문사 서북쪽에 있는 청도 호거산에서 지혜의 등불을 전한다는 소문을 듣고 신행 스님은 곧장 그곳으로 가서 가르침을 받았다. 7일이 지나지 않아 법랑 선사가 이치의 옳고 그름을 묻자,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
“즉심(卽心, 마음에 나아감)이 무심(無心)입니다.”
이에 법랑 선사가 감탄하며, “훌륭하도다. 마음 등불의 법이 모두 네게 있구나.”라고 했다. 부지런히 가르침을 구한 지 3년 만에 법랑 선사가 입적하자, 몸이 부서지도록 통곡하고 사무치게 그리워하였다. 마침내 ‘사는 것이 바람 앞의 등불이요, 죽는 것이 수면 위의 거품’임을 체득했다.
배를 타고 당나라로
신행 선사는 부처님의 지혜를 구하고자 배를 타고 당나라로 갔다. 당나라는 당시 흉악한 도적들로 어지럽던 때라 황제가 모두 잡아들이게 하였다. 관리가 선사를 보고 누구냐고 위협적으로 따져 묻자, 선사가 태연하게 답변했다. “빈도(貧道)는 해동에서 태어나 불법을 구하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관리는 황명이 지엄한지라 선사를 체포하여 240일 동안 감옥에 가두었다. 당시 같이 갇혀 있던 이들은 관리들이 없을 때 형틀을 풀고 쉬면서, 선사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선사는 형틀을 풀지 않고 말했다. “저는 과거에 지은 죄업 때문에 지금 괴로움을 당하는 것이므로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려 합니다.” 이는 욕됨과 더러움을 인내한 자취이고, 자신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음이었다.
당나라 지공 화상에게 배우다
감옥에서 풀려나자, 지공(志空) 화상에게 갔다. 지공 화상은 북종선 조사인 신수(神秀)의 제자인 대조선사(大照禪師) 보적(普寂, 651~739년)의 입실(入室) 제자이다. 입실 제자란 스승의 방에 들어가 직접 가르침을 받고 법을 이은 제자를 말한다. 지공 화상 밑에서 아침저녁으로 깊이 연구하여 3년이 지나자, 비로소 심인(心印)을 받았다. 이후 마음을 흩뜨리지 않고서 많은 사찰을 두루 돌아다녔는데, 항상 본성의 깊은 근원과 공(空)의 그윽한 경계에서 활동하였다.
지공 화상의 기별과 입적
지공 화상이 입적할 적에 신행 선사에게 관정(灌頂)을 하면서 깨달음을 인가하며, 이제 본국으로 돌아가 미혹한 이들을 깨우치고 깨달음의 바다를 격동하게 하라고 일러 주었다. 그렇게 말을 마치고 입적하였는데, 신행 선사는 이 소식을 듣고 마음이 열리면서 미증유의 법을 체득하였다. 이후 빈방에서 지혜의 등불을 돋우고, 선의 바다에서 선정의 마음을 굳혔다. 그리하여 원근에서 많은 이들이 선사를 존경하였다.
신라에 돌아와 교화하다
신행 선사는 신라로 돌아와 중생들을 이끌었다. 불도를 닦을 근기가 있는 이들을 위해서는 ‘마음을 보라[看心]’는 한 마디로 가르쳤고, 시간이 필요한 이들을 위해서는 다양한 방편을 사용하였다. 경전에 통달하고 삼매의 밝은 등불을 전하였으니, 실로 부처님의 해가 다시 솟아오르고, 불법의 구름이 다시 일어났다.
산청 단속사지 삼층석탑(출처 : 국가유산청)
더 이상 배움이 없는 무학위(無學位)에 도달하여 얻게 되는 숙명지(宿命智)와 생사지(生死智)·누진지(漏盡智)를 아우르고 시방 세상을 포괄하고자 교화하다가, 779년 10월 21일에 지리산 단속사(斷俗寺)에서 입적하였다. 이날 하늘이 어두워져 해와 달·별이 빛을 잃었고, 땅이 흔들렸다고 한다.
제자 삼륜 선사가 승탑과 탑비를 조성하다
신행 선사가 입적할 당시 제자 삼륜(三輪) 선사가 좌선하고 있다가 이렇게 말했다.
“형태 없는 이치는 형상을 세우지 않고는 볼 수 없고, 말을 여읜 가르침은 글로 쓰지 않고는 전해지지 않는다. 슬프도다! 자애로운 아버지가 구슬을 품고 돌아가셨으니, 곤궁한 아들은 언제쯤 보물을 얻을 수 있을까.”
신행 선사가 입적한 뒤 34년이 지난 헌덕왕 5년(813)에 삼륜 선사의 주도로 영당과 승탑·탑비가 조성되었다. 비문은 김생(金生)과 글씨로 쌍벽을 이루고 왕희지 서체에 능했던 영업(靈業) 스님이 썼다. 현재 비는 사라졌지만, 탁본들이 남아 있다. 이익(李瀷)의 『 성호사설』에는, 비문 글씨가 좋아서 사대부들이 탁본을 떠서 감상하는 경우가 많았다는 기록이 있다.
신행선사비 탑본(출처 : e뮤지엄)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聞慶鳳巖寺智證大師塔碑)」에 따르면, 희양산문(曦陽山門)의 개산조(開山祖) 도헌(道憲, 824~882년) 스님이 신행 선사의 문하에 있었다고 한다.
· 집필자 : 이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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