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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염(無染)

활동왕조 통일신라
활동시기 9세기
생년 801년
몰년 888년
이칭(한자) 光宗 / 大郞慧 / 郞慧 / 大朗
천왕이 연꽃을 드리우다
무염(無染, 801~888년)은 태종무열왕(재위 654~661년)의 8세손으로, 조부는 진골 귀족이었는데 아버지 대에 신분이 득난(得難)으로 강등되었다. 아버지는 김범청(金範淸)이고, 어머니는 화씨(華氏)이다. 어머니가 꿈속에서 긴 팔을 지닌 천왕(天王)이 연꽃을 주는 것을 보고 스님을 잉태하였고, 얼마 뒤에 다시 꿈속에서 법장 스님이라는 서역의 도인이 십호(十護, 열 가지 계율)를 주는 것을 받았다. 그로부터 13개월 후에 태어났다.
중국 가려다 표류
스님은 아홉 살 때부터 유가(儒家)의 글을 익혀 해동의 신동으로 불렸고, 열두 살에는 불도(佛道)에 입문할 뜻을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허락을 받았다. 13세에 설악산 오색석사(五色石寺)에 주석하고 있는 법성(法性) 선사에게 출가하여 『능가경』을 비롯한 여러 경전과 선법(禪法)을 배우고 탐구하였다. 이후 부석사(浮石寺)의 석징(釋澄) 대사를 찾아가 화엄학을 배웠다. 공부를 더 하고자 배를 타고 당나라로 향했으나 도중에 풍랑으로 배가 부서졌다. 스님은 도반인 도량(道亮) 스님과 함께 바다에서 널빤지에 의지해 15일 남짓 표류한 끝에 전남 신안군 검산도(劍山島, 흑산도)에 도착하였다. 겨우 기어서 물가에 올라 목숨을 구했다. 한동안 실의에 빠져 있다가 구법을 위해 물러나지 않으리라 마음을 굳건히 했다.
불법이 동쪽으로 흐르다
822년 초에 당은포(唐恩浦, 화성시 서신면 일대)에서 조정사(朝正使)인 김흔(金昕, 803~849년)을 만나, 그 배를 타고 당나라에 도착하였다. 스님은 종남산에 있는 화엄종의 본산인 지상사(至相寺)로 가서 『화엄경』 강설을 들었다. 그때 우연히 검은 얼굴의 노인을 만나 대화를 나누게 되었는데, 그 노인이 말하였다. “멀리에서 여기까지 와서 무얼 구하려고 하나? 각자 자신이 원래 갖추고 있는데 밖에서 부처를 구할 필요가 있겠는가.” 스님은 이 말을 듣자마자 크게 깨우쳤다. 그때부터 경전의 가르침을 내려놓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마음 닦는 공부를 하다가, 불광사(佛光寺)의 여만 선사(如滿禪師, 마조 도일의 제자)를 찾아가 선문답을 하였다. 여만 스님이 말했다. “내가 많은 사람을 겪어 보았으나 그대와 같은 신라인은 드물었네. 후에 중국에 도(道)가 끊어지면 신라에 가서 묻게 될 것이다.” 몇 년 후에는 마곡산(麻谷山)의 보철 화상(寶徹和尙)을 찾아뵈었다. 보철 화상은 당나라 선(禪)을 대표하는 마조 도일(馬祖導一, 709~788년)에게서 심인(心印)을 받고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무염 스님은 보철 화상을 모시고 수행하면서, 남들이 어렵게 여기는 일들도 가리지 않고 하였다. 어느 날, 보철 화상이 무염 스님을 불러 말했다. “옛날에 나의 스승인 마조 화상께서 헤어질 때 말씀하시기를, ‘이제 너에게 인가(印可)하노니, 훗날 제자 가운데 뛰어난 이가 있거든 불가(佛家)의 도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거라.’ 하셨지. 또 ‘불법이 동쪽으로 흐른다는 예언이 있는데, 신라 선남자들의 근기가 거의 무르익은 듯하니 네가 그 가운데 서로의 눈만 보고도 마음이 통하는 이를 얻게 되면 잘 지도하거라.’라고 당부하셨네. 스승님의 그 말씀이 귀에 쟁쟁한데, 네가 나타나다니 참으로 기쁘구나. 이제 너에게 인가하여, 신라에서 선사로 으뜸이 되게 하고자 하니, 가서 열심히 하라.” 얼마 지나지 않아 스승인 보철 화상이 열반에 들자, 중국의 여러 곳을 다니면서 어렵고 병든 사람들을 돌보는 등 실제 삶 속에서 보살행을 실천하였다.
마음은 몸의 주인, 몸은 마음의 스승
스님이 중국에서 보낸 23년여 동안의 행적이 ‘동방의 대보살’이라는 칭송으로 알려졌으나, 당나라 무종의 폐불정책으로 인하여 845년 귀국하게 되었다. 스님이 불법을 펼치며 일생을 마칠 곳을 찾던 중, 잿더미로 변한 오합사(烏合寺)에 머물러 달라는 김흔의 청을 받고, 847년부터 웅천주(熊川州, 공주) 서남쪽 모퉁이에 있는 오합사에 머물기 시작하였다. 스님은 법당과 도량을 수리할 때 대중보다 앞장서 일하고, 물을 긷고 땔나무를 나르는 일까지 하며 늘 제자들에게 말했다. “마음이 몸의 주인이 된다고 할지라도, 몸은 마음의 사표가 되도록 노력해야 한다. 너희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을 근심할 일이지, 어찌 도(道)가 너희에게 멀리 있겠는가. 저 사람이 마셔서 나의 갈증을 풀어 줄 수 없고, 저 사람이 먹어서 나의 배고픔을 채워 주지 못하니, 힘을 다해 자기가 스스로 먹고 마셔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님의 법력이 널리 알려지자,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헤아릴 수 없이 몰려들어 문도가 번성하고 습속도 변화했다. 스님의 가르침이 넓게 퍼지니, 문성왕(재위 839~857년)은 스님이 행하는 일이 임금에게도 도움이 되고 본받을 만하다고 여기고 사찰의 이름을 성주사(聖住寺)로 바꿔 주었다.
보령 성주사지(출처 : 국가유산청)
바람 따라 응하고 새처럼 떠나다
문성왕과 헌안왕, 경문왕, 헌강왕, 정강왕, 진성왕이 스님을 존경하여 나라의 경영에 관한 자문과 부처님의 가르침을 물었다. 특히 경문왕과 헌강왕은 스님을 국사로 책봉하고 스승의 예로 대했다. 스님은 한때 임금의 간청으로 상주의 심묘사(深妙寺)에 잠시 머물기도 하였다. 876년 봄, 헌강왕은 선대왕(경문왕)의 환후를 고치기 위해 신하에게 명하여, 무염 국사를 모셔 오라고 하였다. 스님은 사자(使者)의 전달을 받고 말하였다. “산승의 발길이 대궐에 이르는 것은 한 번도 지나치다 할 테니 나를 아는 사람은 ‘성주(聖住)가 머무르는 곳이 없다(無住)’할 것이요, 나를 모르는 사람은 ‘무염(無染)이 오염되었다[有染]’할 것이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 임금과 불법의 인연이 있고, 떠나실 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어찌 작별 인사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는 곧장 걸어서 궁궐에 갔다. 심묘사는 대궐과 멀지 않은 곳에 있었기에 도보로 가능했다. 스님은 경문왕을 위해 보약과 같은 법문을 베풀고, 침으로 병을 고치듯 계(戒)를 행하여 병을 낫게 하고는 다른 곳으로 새처럼 떠나갔다.
창원 성주사 무염국사 진영(출처 : 국가유산청)
앉은 채 열반에 들다
888년 11월 17일, 스님은 목욕을 마치고 가부좌한 자세로 시자(侍者)에게 명하여 유훈을 대중에게 알리도록 하였다. “내가 이미 여든 살이 넘었으니,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 나는 멀리 떠나려 하니, 너희들은 불법에 잘 안주하도록 하라. 공부하기를 한결같이 하며 수행의 태도를 잘 지켜서 잃지 않도록 하라. 옛날의 관리들도 이같이 하였으니, 오늘의 선승(禪僧)들은 더욱 힘써야 할 것이다.” 당부의 말씀을 마치자마자 가부좌한 채로 열반하였는데, 사흘이 지나도 살아 있는 듯하였다. 세속 나이는 89세이고, 법랍은 65년이었다.
보령 성주사지 대낭혜화상탑비(출처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진성왕(재위, 887~897년)은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슬퍼하며 사자(使者)를 급파하여, 글월로 조문하고 곡식으로 부의(賻儀)하였다. 시호를 대낭혜(大郎慧), 탑호를 백월보광(白月葆光)이라 추증하고, 최치원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다. 스님의 행적은 생전에 헌강왕이 지은 심묘사 비문과 김입지(金立之)가 9세기 중엽에 지은 성주사 비문, 그리고 최치원이 지은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에 기록되어 있다. 현재 심묘사비는 전하지 않고, 성주사비는 파편 12조각만 전해진다.
· 집필자 : 이미숙(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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