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동왕조 | 통일신라 |
|---|---|
| 활동시기 | 9세기 |
| 생년 | 824년 |
| 몰년 | 882년 |
| 이칭(한자) | 智證大師 / 智澄 / 智詵 |
헌칠한 꽃미남
도헌(道憲) 스님은 경주에서 출생하였으며, 자(字)는 지선(智詵)이다. 속성은 김씨로 824년(헌덕왕 16)에 아버지 찬환(賛環)과 어머니 이(伊)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체구가 커서 일곱 자가 넘었고 음성은 웅장하면서도 맑았다.
승견불 태몽과 임신 400일
어머니의 꿈에 거인이 나타나 말하였다.
“저는 승견불(勝見佛), 즉 과거칠불 가운데 첫 번째 부처님의 말세 때 승려였는데, 화를 잘 내는 바람에 오래도록 용(龍)이 되는 과보를 받았습니다. 이제야 그 과보가 끝나서 다시 법손(法孫)이 되기 위해 좋은 인연에 의탁하고자 하오니, 자비를 베풀어 주시기 바랍니다.”
이후에 임신이 되었는데 거의 400일, 즉 13개월이 넘도록 배 속에 있다가 관불일(灌佛日)인 사월 초파일 아침에 태어났다.
젖을 먹지 않다
태어나서 여러 날 동안 젖을 먹지 않고, 젖을 먹이려고 하면 울기만 해서 목이 쉴 정도였다. 갓난아이가 먹지를 않으니, 부모는 애가 타서 어쩔 줄 몰랐다.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없으니, 누구도 방법을 알려줄 수 없었다. 그렇게 수심에 잠겨 있을 때 허름한 차림새의 도인이 문 앞을 지나다가 알려주길, 아이가 울지 않게 하려거든 모친이 냄새나거나 비린 것을 먹지 않아야 한다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지라 이 말을 들은 어머니는 도인이 일러 준 대로 하였고, 마침내 아이가 울지 않고 젖을 먹게 되었다.
아버지 여의고, 어머니 몰래 출가하다
아홉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는 너무 슬피 운 나머지 목숨을 잃을 정도였다. 고인의 명복을 빌어 주던 승려가 이 모습을 보고 불쌍히 여겨 조용히 타일렀다.
“허깨비 같은 몸은 사라지기 쉽고, 장대한 뜻은 성취하기 어렵지.
부처님께서 은혜를 갚을 적에 큰 방편을 사용하셨으니, 너도 힘써보아라.”
이 말을 듣고는 깨달은 게 있어서 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불도에 귀의하겠다고 아뢰었는데, 어머니는 아직 어리다고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몰래 집을 나와 영주 부석사로 갔다.
자신의 병으로 어머니를 깨닫게 하다
부석사에서 공부하는 중에 갑자기 마음에 경기가 나서 제대로 앉아 있을 수 없었다. 이윽고 어머니의 병환 소식을 듣게 되어 급히 집으로 돌아오니, 스님이 도착하자마자 어머니 병환이 치유되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 스님이 전염되어 병이 들었다. 의원들에게 보여도 치료가 되지 않아 점을 여러 번 쳤는데 모두 말하길, 큰 신령(부처님)에게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했다. 어머니는 예전 태몽을 기억하고는 스님에게 방포(方袍) 가사를 덮어주고 눈물을 흘리며, 이 병이 나으면 불제자가 되게 하겠다고 했다. 그렇게 이틀이 지나자 과연 병이 나았다. 이로써 어머니를 깨닫게 하고 스님은 마침내 출가의 뜻을 이루었다.
보현보살이 고행을 권하다
도헌 스님은 초기에 범체(梵體)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고 17세에 경의(瓊儀) 율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하안거를 마치고 다른 곳으로 가려는데 꿈에 변길보살(遍吉菩薩, 보현보살)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하길, 고행은 실천하기 어렵지만 행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했다. 스님은 이 말씀을 명심하여, 이후로 비단옷이나 솜옷을 입지 않았고 가죽신을 신지 않았다.
젊은 시절부터 두각을 드러낸 터라 스님께 배우고자 하는 이들이 많았다. 스님은 매번 이를 사양했는데 어느 날 산길에서 나무꾼이 앞길을 가로막더니, 선각자가 후배들을 깨우쳐야지 어찌하여 빈 껍데기인 육신을 아끼냐고 질책하고는, 홀연 사라졌다. 이에 뉘우치고서 배우고자 하는 이들을 막지 않으니, 계람산(溪藍山) 수석사(水石寺; 논산 개태사, 또는 상주 용흥사라고도 함)에 학인들이 가득 찼다. 한동안 그렇게 머물며 가르치다가는, 얽매이지 않아야 한다며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겼다. 경전 내용을 지식으로만 알고 실천하지 않는 이들이 이를 보고 반성하였다.
임금의 초청을 거절하다
경문왕이 스님을 뵙고자 초청 편지를 보내고 원성왕의 후손 김입언(金立言)을 사신으로 보냈다. 이에 스님이 답하길, 몸을 닦고 타인을 교화하기 위해서는 조용한 곳에 머물러야 한다며 정중하게 사양하였다. 이로부터 스님의 명성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864년(경문왕 4) 겨울에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 경문왕의 누이)가 미망인으로서 당래불(當來佛, 미륵불)에 귀의하여 대사를 공양하면서 자신이 세운 원주 현계산(賢溪山) 안락사(安樂寺, 거돈사)의 경관이 아름다우니 주인이 되어 달라고 청하였다. 이에 그곳에 주석하며 교화하였다.
원주 현계산 안락사 터(출처 : 국가유산청)
봉황이 날아가는 지세에 창건한 봉암사
심충(沈忠)이라는 이가 대사의 명성을 듣고 찾아와, 문경 희양산(曦陽山) 중턱의 경치 좋은 땅을 희사할 테니 선궁(禪宮)을 지어 달라고 하였다. 대사가 처음엔 거절했으나 그가 간절하게 요청하였고, 또한 산신령이 앞장을 서서 인도하는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 그래서 석장을 짚고 가서 지세를 살피니, 산이 병풍처럼 사방을 둘러 봉황이 날개를 치며 구름 위로 솟구치는 형상이요, 물이 띠처럼 에워싸 용이 허리를 바위에 걸치고 똬리를 튼 형상이었다. 대사가 이를 보고는 놀라고 탄식하면서, 이곳에 승려가 살지 않으면 도적의 소굴이 되리라 하고, 드디어 사찰을 짓고 불상을 주조하였다. 881년(헌강왕 7)에 헌강왕이 봉암사(鳳巖寺)라 명명하였다. 대사가 그곳에서 교화를 펼치자, 몇 년 사이에 도적들이 감화되어 귀의하였다.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출처 : 국가유산청)
임금에게 마음을 깨닫게 하다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계족산(雞足山, 희양산)으로 헌강왕이 조서(詔書)를 보내, 큰 지혜를 닦을 수 있도록 왕림해 달라고 청하였다. 조서에서 “좋은 인연이 세상에 두루 미침은 불보살이 어디서나 중생과 함께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한 말에 감동하여 스님이 산에서 나오니, 수많은 거마가 스님을 영접하였다. 헌강왕은 스님에게 선원사(禪院寺)에서 이틀 휴식하게 하고 월지궁(月池宮)으로 맞아들여, 마음이 뭐냐고 물었다. 이때는 바야흐로 밤이 깊었는지라 달빛 그림자가 연못 가운데 드리워져 있었다. 스님이 그것을 굽어보다가 고개를 들고 고하였다.
“이것(달)이 바로 이것(마음)입니다. 더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그러자 임금의 의혹이 해소되었고, 염화시중의 풍류라고 일컬으며 경배하고 망언사(忘言師)로 삼았다. 대사가 궁궐을 나오려 하니, 헌강왕이 조금 더 머물러 있어 주기를 청하였다. 이에 대사가 답하기를, 새를 본성에 맞게 길러 준다면 은혜가 작지 않지만 굽히게 한다면 부러지고 말 것이라고 했다. 헌강왕이 이 말을 듣고 안타까웠지만 더 붙잡지 못했다.
병환을 미리 알고 가마를 받다
스님은 멀거나 가깝거나 평탄하거나 험하거나 언제나 걸어 다녔을 뿐 말이나 소의 신세를 진 적이 없었다. 왕궁에 머물다가 산으로 돌아갈 무렵에 임금이 가마를 하사하여 타고 가라고 했다. 스님은 가마가 승려에게 적합하지 않은데 왕명이니 받아들여서 고통을 구제할 도구로 삼겠다고 하였다. 이후 병 때문에 안락사로 옮겼는데, 일어서지 못할 정도가 되자 그 가마를 사용했다.
조용한 입적과 성대한 조치
882년(헌강왕 8) 12월 18일 가부좌를 하고 대화를 나누다가 조용히 입적하니, 세속 나이는 59세이고 법랍은 43년이다. 그날은 하루 종일 바람이 골짜기에서 울부짖었고, 쌓인 눈이 소나무를 부러뜨렸다. 이틀 후 현계산에 임시로 매장했다가, 희양산으로 옮겨 장례하였다.
헌강왕은 지증선사(智證禪師)라는 시호와 적조(寂照)라는 탑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고, 스님의 행장을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에 문인(門人)인 성견(性蠲), 민휴(敏休), 양부(楊孚), 계휘(繼徽) 등이 대사의 행적을 간추려 기록하였고, 최치원이 비명을 지어 바쳤다.
· 집필자 : 이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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