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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선(道詵)

활동왕조 통일신라
활동시기 9세기
생년 827년
몰년 898년
이칭(한자) 玉龍子 / 烟起 / 了空禪師 / 先覺國師
문수의 지혜와 보현의 행원을 깨닫다
도선(道詵, 827~898년)은 낭주(朗州, 전남 영암군) 구림촌(鳩林村)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통찰력과 지혜가 있었고, 다른 아이들과 놀다가도 지나가는 스님을 볼 때면 항상 부처님의 가르침을 받드는 모습을 나타내었다. 그래서인지 부모는 태몽과 어릴 적의 특이한 행동 등을 생각하며 그가 진리를 깨닫는 고승이 될 것으로 믿고 있었다.
도갑사 도선국사 진영(출처 : 국가유산청)
스님은 15세에 월유산(月遊山, 지리산) 화암사에서 삭발하고 불교 경전을 탐독하였는데, 1년도 채 안 되어 『화엄경』의 대의(大義)를 통달하고 문수보살의 지혜와 보현보살의 행원(行願)을 깊이 깨달았다. 하지만 문자나 언어적 사유를 여의고, 참선하고자 하는 생각이 간절하였다.
동리산문의 혜철 선사에게 배우다
846년 영암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전남 곡성 동리산의 혜철(惠哲, 785~861년) 선사에게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제자가 되었다. 혜철 스님은 당나라 선(禪)을 대표하는 마조 도일(馬祖導一, 709~788년)의 제자인 서당 지장(西堂智藏, 735~814년) 선사로부터 인가를 받은 후 귀국하여 동리산문을 형성해 선법(禪法)을 펼치고 있었다. 혜철 스님은 도선 스님의 총명함과 민첩함을 가상히 여겨 화두 참구 등을 지도하였고, 도선 스님은 스승의 ‘말 없는 말과 법 없는 법[無說說無法法]’의 법문을 듣고, 깊은 이치를 깨달았다. 23세 때 천도사(穿道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마음으로 전하는 내적 깨달음인 심인(心印)을 받았다. 그 후 15년 동안 전국을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며 선지식을 찾아 수행을 이어 갔고, 운봉산(雲峯山) 밑에 굴을 파고 앉아서 참선하고, 태백산 바위 앞에 움막을 짓고 여름을 보내면서 수도하였다. 또한 때때로 계곡이나 숲에서 불을 피우고 참선하기도 하였다. 이에 스님을 찾는 사람들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보고 찾았으므로 ‘연기조사(烟起祖師)’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구름이 모이듯 가르침을 들으러 몰려들다
스님은 전국의 명승지를 유람하며 수행하다가, 전남 백계산(白鷄山) 옥룡사(玉龍寺) 주위의 빼어난 경치를 보고 이곳에서 일생을 마칠 뜻을 가졌다. 864년 무렵부터 낡은 건물을 중수하고 35년 동안 머물면서 수많은 제자를 지도하며 깨달음의 길로 인도하였다.
전라남도 광양 옥룡사지(출처 : 국가유산청)
헌강왕(재위 875~886년)이 스님의 법력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 궁궐로 초빙하여 맞아들였다. 임금은 스님을 한 번 보고는 오래된 친구를 보듯 기뻐하며 대궐에 머물게 하였다. 스님은 임금에게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사랑하는 도리를 말해 주고, 얼마 후 다시 산으로 돌아왔다.
병든 백마를 타고 길지를 정하다
스님은 혜철 스님으로부터 심인(心印)을 받았지만, 풍수의 대가나 예언가로도 알려지면서 기이한 행적들이 전해진다. 그중에서 스님이 당나라 황제의 묘소를 점지했다는 신비한 이야기가 있다. 어느 해, 월암사에서 수륙재를 행할 때 도선 스님이 숟가락과 젓가락을 담당하였다. 그 당시 당나라 황제의 꿈에, 진인(眞人)이 나타나 선황의 묘소를 신라의 도선 스님이 점지해 줄 것이라 하였기에, 스님을 찾고자 사신을 파견하였다. 당나라 사신이 영암 덕진교(德津橋)에 배를 대고 월암사를 방문하니 마침 수륙재를 지내고 있었다. 스님들이 도선 스님을 부르며 수저를 가져오라고 하는 것을 보고서 그 사람이 도선 스님임을 알고, 전달할 물건이 있으니 자신의 배에 와서 직접 가져가라고 하였다.
도선국사실록(출처 : 불교기록문화유산아카이브 )
스님이 어쩔 수 없이 따라가니, 배에 태워 중국 해안에 정박하였다. 당나라 수도에 도착하자, 손님 접대를 담당하는 사람이 스님을 부르면서 말하였다. “천자께서 돌아가신 선황의 묘소를 정하려고 그대를 모셔 온 것입니다. 그대는 마구간의 병든 백마를 타겠다고 하십시오. 말이 가다가 멈추는 곳이 길지이고, 말이 일어서서 가다가 넘어졌다가 일어나지 못하는 곳이 최상의 길지입니다. 내 말을 잘 새겨듣고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는 말을 마치고 사라져 다시 보이지 않았다. 다음 날 황제가 선황의 묘소를 정하라고 하자, 스님은 마구간의 병든 백마를 타고 가겠다고 말하였다. 백마를 타고 가는데 백마가 어느 한 지점에서 머뭇거리며 앞으로 가려고 하지 않자, 이 장소는 쓸 만하지만 그다지 좋지 않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나아가다 땅에 엎어져 일어나지 못하자, 이곳이 선황의 무덤으로 적합하다고 하였다. 이에 주위에 있던 지관(地官)들이 도선 스님을 신(神) 같은 사람이라고 감탄하였다.
바닷가에서 풍수지리의 비결을 익히다
스님은 세상의 시끄러움을 벗어나, 잠시 지리산 ‘구령(毆嶺)’이라는 곳에 암자를 짓고 정진하고 있었다. 그런 어느 날, 범상치 않은 사람이 찾아와 말하기를, “제가 세상 밖에서 숨어 산 지가 수백 년에 가깝습니다. 약간의 술법(術法)을 알고 있어 바치려 하니, 천한 술법이라고 비루하게 여기지 않으신다면 다른 날 남해의 바닷가에서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하고는 보이지 않았다. 스님은 기이하게 여기고 남해의 물가로 찾아가 그 사람을 다시 만났다. 그 사람은 이것도 세상을 구제하고 중생을 제도하는 법과 같은 것이라고 했다. 그러고는 바닷가 모래 위에 산천 지리의 형세를 그리고, 모래를 모아서 산천의 순하고 거스르는 지세를 만들어 보여 주며 풍수지리의 비결을 소상하게 가르쳐 주었다. 잠시 후에 돌아보니, 그 사람은 사라지고 없었다. 이후 스님은 모래 위에 그려 놓은 산천 지리의 형세를 기록하고 연구하여 산천 지리의 혈맥과 음양오행의 술법을 환히 알게 되었다. 이러한 비법을 터득한 연후에 지팡이를 짚고 전국 산천을 두루 다니며 산세와 지리를 살폈다. 그리하여 산천의 지기(地氣)가 좋지 않은 곳에 사찰과 탑을 건립해서 지기를 보완해야 한다는 비보사탑설(裨補寺塔說)을 주장했다. 고려 태조는 신라의 패망이 무분별하게 사찰을 건립한 탓도 있다고 보아 비보사탑설을 신봉하였기 때문에 비보사탑설은 고려시대에 널리 확산되었다.
추증과 비명
898년 3월 10일 스님은 제자들을 불러 말했다. “내가 갈 때가 되었다. 인연 따라 왔다가 인연이 다하면 떠나는 것은 자연의 이치이니, 슬퍼하지 말라.” 말을 마치고 가부좌한 채 열반하였으니, 세속 나이 72세였다. 제자들은 스승의 유언에 따라 옥룡사 뒷산에 사리를 옮기고, 북쪽 산기슭에 탑을 세웠다.
영암 도갑사 도선국사 비각(출처 :국가유산청)
효공왕(재위 897~912년)은 스님의 열반 소식을 듣고, 시호를 요공선사(了空禪師), 탑호를 증성혜등(證聖慧燈)이라 추증하고, 박인범(朴仁範)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으나 비문을 돌에 새기지 못했다. 훗날 고려 왕들은 여러 번 봉증(封贈)을 더하였는데, 현종(재위 1009~1031년)은 대선사(大禪師), 숙종(재위 1096~1105년)은 왕사(王師), 인종(재위 1123~1146년)은 선각국사(先覺國師)로 추증하였다. 스님의 행적은 1150년에 최유청(崔惟淸, 1095~1174년)이 지은 「백계산옥룡사증시선각국사비명(白鷄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과 1653년에 이경석(李景奭, 1585~1671년)이 지은 「월출산도갑사도선국사수미대선사비명(月出山道岬寺道詵國師守眉大禪師碑銘)」에 기록되어 전하는데, 최유청의 찬술 비석은 남아 있지 않고 그 내용만 『동문선』에 수록되어 있다.
· 집필자 : 이미숙(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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