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동왕조 | 통일신라 |
|---|---|
| 활동시기 | [7세기] |
국로(國老)로 임명되다
경흥(憬興)은 웅천주(熊川州, 공주) 출신으로 성은 수씨(水氏)이다. 스님의 정확한 생몰년은 알 수 없지만 대략 7세기 중반에서 8세기 초반에 활동하였다. 경흥 스님의 아름다운 덕행과 남긴 사적은 현본(玄本) 스님이 지은 「삼랑사비(三郎寺碑)」에 자세하게 실려 있었으나, 이 비문은 전하지 않는다.
스님은 18세에 출가하였고, 경·율·론 삼장에 통달하였으며 학문과 덕망이 높아 존경받고 있었다. 681년 문무왕(재위 661~681년)은 승하하기 전에 신문왕(재위 681~692년)에게 유언하기를, “경흥 법사는 국사가 될 만하니 나의 말을 잊지 말라.”라고 당부하였다. 그 뒤 신문왕은 경흥 스님을 불교계의 최고 원로인 국로(國老)로 임명하고, 신라 수도인 경주 성건동에 있던 삼랑사(三郎寺)에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경주 삼랑사지 당간지주(출처 : 국가유산청)
십일면관세음보살이 벗이 되어 병을 고쳐주다
스님은 국로가 되어 임금의 자문 역할을 하면서 삼랑사에 주석하였는데, 갑자기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이 들어 한 달이나 앓았다. 온갖 약으로 치료해도 낫지 않던 어느 날, 어떤 비구니 스님이 찾아와 문안을 드리면서, 『화엄경』의 「현수보살품」에 나오는 착한 친구가 병을 고친 이야기를 하고서 말했다.
“지금 스님의 병환은 마음의 근심과 육체적 피로로 인해 생긴 것이니 약으로 다스려 치료될 것이 아닙니다. 즐겁게 웃으시면 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열한 가지 모습으로 변화하면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었는데, 변하는 모습이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괴상하고 기이하였다. 경흥 스님은 이를 보고 턱이 빠질 듯이 웃었고, 웃고 즐거워하는 사이에 자신도 모르게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그러자 비구니 스님은 문을 열고 떠났다. 경흥 스님이 사람을 시켜 곧바로 따라가게 했더니, 스님은 경주 노서동에 위치한 남항사(南巷寺)로 들어가 숨었다. 그런데 그 스님이 가지고 있던 대나무 지팡이가 십일면관음보살[十一面圓通]의 탱화 앞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이 비구니 스님의 모습으로 화현(化現)하여 오셨다가 가셨음을 알았다. 십일면관음보살이란 열한 가지의 얼굴이 있어서 중생의 성품에 따라 얼굴을 다르게 나타내며 교화한다고 한다.
경주 노서동 석불입상 -남항사 터로 추정되는 곳(출처 : 국가유산청)
문수보살이 썩은 생선으로 훈계하다
스님은 삼랑사에 거주하면서 자주 궁궐을 출입하게 되었다. 삼랑사에서 궁궐까지는 걸어서 40~50분 정도 거리로, 대궐에 오고 갈 때 말을 타고 다녔다. 스님이 대궐로 들어가려고 채비하면 따르는 이들이 미리 동쪽 대문 밖에서 행차 준비를 했는데, 말과 안장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신발과 의관도 임금이 내린 것으로 매우 값진 것으로 갖추었다. 또한 스님이 행차할 때는 행인들을 모두 옆으로 물러서게 했다.
어느 날 대궐에 들어가려고 준비하는데, 남루한 차림의 스님이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등에는 광주리를 지고서 하마대(下馬臺) 위에서 쉬고 있었다. 호위하는 이가 다가가서 광주리 안을 들여다보니 썩은 냄새가 나는 마른 물고기가 들어 있었다. 그는 소리를 지르며 말했다.
“스님이 어찌 계율에 어긋나는 물건을 지고 다닙니까?”
초라한 모습의 스님은 큰소리로 꾸짖으며 대답했다.
“산 고기[馬]를 두 다리 사이에 끼고 다니는 주제에 시장의 마른 생선을 등에 졌다고 나무랄 것이 뭐, 있느냐.”
그리고 일어나 가버렸다. 경흥 스님은 문을 나오다가 그 말을 듣고는 시자(侍者)를 시켜 그 스님을 따라가게 하였다. 시자가 따라가 보니, 그는 경주 남산 문수사(文殊寺) 문밖에 이르러 짊어지고 있던 바랑을 버리고 자취를 감췄는데, 짚던 지팡이는 문수보살상 앞에 세워져 있고 바랑 안에 있던 마른 생선은 소나무 껍질로 변해 있었다. 경흥 스님은 이 말을 전해 듣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문수보살이 오셔서 내가 말을 타고 다니는 것을 경계하였구나.”라고 하였다.
그 이후로 스님은 종신토록 다시는 비단옷을 입지 않고 말을 타지 않았다.
신라의 3대 저술가로 평가되다
경흥 스님은 원효(元曉)·태현(太賢) 스님과 함께 신라의 3대 저술가로 평가된다. 당나라 현장(玄奘)의 신유식학을 접하고서 현장 스님에서 규기(窺基) 스님으로 이어지는 학설을 따르게 되었다. 유식학에 정통한 경흥 스님은 불교 연구와 저술에 힘써 40여 종 270권의 많은 저술을 남겼다.
현존하는 저술로는 『금광명최승왕경약찬(金光明最勝王經略贊)』 5권, 『무량수경연의술문찬(無量壽經連義述文贊)』 3권, 『삼미륵경소(三彌勒經疏)』 1권이 전한다. 『금광명최승왕경』은 호국 신앙의 중요한 경전으로 받아들여졌다.
· 집필자 : 이미숙(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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