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혜공(惠空)

활동왕조 신라
활동시기 [7세기]
고용살이 노파의 자식이 스승 되다
혜공(惠空) 스님은 7세기 신라 천진공(天眞公)의 집에서 고용살이하는 늙은 홀어미의 아들로 태어났다. 부친은 누군지 알 수 없고, 어릴 때 이름은 우조(憂助)였다. 우조가 7살 때 주인이 종기를 앓아 거의 죽게 되자, 병문안 오는 사람들이 길을 메웠다. 우조는 어머니에게, 왜 이렇게 손님이 많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주인이 병환으로 위독해서 그렇다고 하였다. 우조가 그 병환을 고칠 수 있다고 하자, 어머니가 기이하게 여기며 주인에게 아뢰었다. 거의 죽어가던 주인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인지라 불러오게 하였는데, 우조가 와서는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종기가 터져 병환이 나았다. 주인은 우연이라 생각하고 그다지 기이하게 여기지 않았다. 우조가 장성해서는 주인을 위하여 매를 길렀는데 주인의 마음에 매우 흡족했다. 주인의 동생이 관직을 얻어 지방에 부임하면서 기념으로 그 매를 달라고 하여 부임지로 가져갔다. 어느 날 밤 주인이 문득 그 매가 보고 싶어서, 다음 날 우조를 보내 매를 찾아오게 하려 했다. 그런데 우조가 이미 먼저 주인의 마음을 알고는, 매를 가져와서 새벽에 바쳤다. 주인이 이에 매우 놀라며 깨달아, 지난날 종기를 치료한 일도 우조가 행한 기적임을 알게 되었다. 주인이 우조에게 절을 하며 말하였다. “성현께서 우리 집에 의탁하고 계신지 모르고 적절치 않은 대접으로 모욕하였으니 그 죄를 어찌 씻을 수 있겠습니까. 이후로는 저의 스승이 되어 인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삼태기 짊어지고 춤추다
신이한 능력이 사람들에게 알려지자 마침내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고, 이름을 ‘혜공(惠空)’으로 바꾸었다. 작은 사찰에 상주하면서 언제나 미친 것처럼 만취하여 거리에서 삼태기를 지고 노래하며 춤을 춰서 ‘부궤화상(負簣和尙, 삼태기 짊어진 승려)’이라 불렸다. 상주하는 사찰을 그래서 ‘부개사(夫蓋寺)’라 이름하였으니, ‘부개’는 곧 삼태기를 뜻하는 경상도 말이다. 부개사는 폐사되었다. 스님이 자주 사찰 우물 안에 들어가서는 수개월 동안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스님의 법명으로 그 우물을 칭했다. 우물에서 나올 때마다 푸른 옷의 신동이 먼저 솟아 나왔기 때문에 사찰 승려들이 이로써 스님 나오는 때를 알 수 있었다. 스님이 우물에서 나왔지만, 옷은 젖어 있지 않았다.
네 똥이 내 물고기
만년에 항사사(恒沙寺, 포항 오어사)로 옮겨 머물렀다. 그 당시 원효 스님이 여러 불경에 대해 소(疏)를 찬술하는 가운데 자주 스님에게 와서 질의하거나 혹은 서로 농담을 나누었다. 어느 날 두 스님이 개울에서 물고기와 새우를 잡아먹고 돌 위에 대변을 누었다. 혜공 스님이 그것을 가리키며 희롱하기를 “네 똥은 ‘내 물고기’[오어吾魚]다.”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오어사’라는 이름이 생겼다. 혹자는 이를 원효 스님의 말이라고 한다.
포항 운제산 오어사 대웅전(출처 : 국가유산청)
조금 다른 이야기도 전한다. 똥이 물고기로 변하였는데 한 마리는 살지 못하고 한 마리는 힘차게 헤엄치니, 힘차게 헤엄치는 물고기를 두고 서로 ‘자기 물고기’[오어吾魚]라고 희롱하였다는 것이다.
분신술 이적을 보이다
신라 진평왕 때 화랑 구참공(瞿旵公)이 산에 놀러 갔다가, 산길에 혜공 스님이 죽어 쓰러져 있는 것을 보았다. 그 시신이 부풀어 오르고 문드러져 구더기가 생긴 것을 보고는 한참 슬퍼하였다. 이윽고 성으로 돌아왔는데, 스님이 거리에서 만취하여 노래 부르고 춤을 추고 있었다. 구참공은 사냥을 좋아하였기에 혜숙(惠宿) 스님이 따라가서는 이적을 보이며 살육에 몰두한다고 질책하기도 하였다.
지귀의 화재를 예견하다
혜공 스님이 하루는 새끼를 꼬아서 경주 영묘사(靈妙寺)에 들어가 금당(金堂, 본당)과 좌우 경루(經樓) 및 남문(南門)의 낭무(廊廡, 행랑)를 둘러 묶고 강사(剛司, 사찰 관리자)에게, 새끼줄을 3일 후에 풀어야 한다고 알렸다. 강사가 이상하게 생각하면서 그 말대로 했다. 과연 3일째 되는 날에 선덕왕이 사찰에 왕림한 후, 선덕왕을 연모하던 병사 지귀(志鬼)의 가슴에서 불이 일어나서 탑을 태웠으나 오직 새끼줄을 묶은 곳은 화재를 피하였다. 여왕을 연모하던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화재가 일어나자, 아무도 그 불을 끌 수 없었고 다만 선덕왕의 명에 따라 소멸되었다.
큰비에도 젖지 않고 왕래하다
신인종(神印宗, 밀교)의 조사(祖師) 명랑(明朗) 스님이 경주 남산에 금강사(金剛寺)를 창건하여 낙성회를 마련하자, 큰스님들이 다 모였으나 오직 혜공 스님만 오지 않았다. 명랑 스님이 향을 사르며 정성스레 기도하니, 조금 뒤에 혜공 스님이 도착하였다. 이때 큰비가 왔으나 스님의 옷은 젖지 않았고 신발에는 진흙도 묻지 않았다. 명랑 스님에게 말하기를 “수고롭게도 정성스레 부르기에 왔네.”라고 하였다.
『조론』을 찬술한 승조의 후신
이렇듯 혜공 스님의 신령한 자취가 매우 많았다. 임종에 이르러서는 공중에 뜬 채 입적하였고 사리가 셀 수 없이 많이 나왔다. 언젠가 불교의 핵심을 요약한 『조론(肇論)』을 보고는, “이는 내가 예전에 찬술한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구마라집의 제자인 승조(僧肇, 384~414년)의 후신임을 알 수 있다. 9세기 흥륜사 금당에 모신 10성(聖) 가운데 한 분이다.
· 집필자 : 이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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