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원광(圓光)

활동왕조 신라
활동시기 6~7세기
생년 555년
몰년 638년
여우 산신령의 칭찬
원광(圓光, 542~640년) 법사는 신라 경주 출신으로 어릴 적 불교와 유학 문헌을 섭렵하여 박식하기로 유명했다. 나이 30세에 경주 삼기산(비장산, 금곡산)에서 수행한 이야기가 전해온다. 수행한 지 4년이 지날 무렵 한 비구가 멀지 않은 곳에 암자를 지어 머물렀고, 그렇게 2년이 흘렀다. 그 비구는 사람됨이 강하고 사나웠으며 주술을 좋아하였다. 어느 날 원광 법사가 밤에 홀로 앉아 공부하는데, 홀연 신(神)의 소리가 들렸다. “훌륭하다, 훌륭하다, 너의 수행함이여! 수행하는 자가 많긴 하지만 법대로 하는 자는 드물다. 이제 이웃의 비구를 보니 곧바로 주술을 닦아 소득이 없다. 떠드는 소리는 다른 이의 고요한 생각을 방해하고 거처는 내가 다니는 길에 방해가 되어, 오고 갈 때마다 악심을 일으키게 한다. 법사는 나를 위해 말을 하여 처소를 옮기게 하라. 오래 머문다면 내가 죄업을 짓게 될까 걱정이다.” 다음날 법사가 가서 말하니, 비구가 답했다. “지극한 수행은 마귀의 현혹을 받지요. 법사는 어찌 여우 귀신의 말을 걱정하십니까?” 그렇게 말을 듣지 않자, 다음 날 밤 천둥이 치고 산이 무너져 비구의 암자를 덮쳐버렸다. 신이 원광 법사에게 와서 말하였다. “내 나이 거의 삼천 살이 되어 신술(神術)이 매우 뛰어나니, 이런 일은 하찮을 뿐이다. 어찌 놀라겠는가? 장래의 일들을 모르는 바가 없고, 천하의 일에 달통하지 않은 바가 없다. 법사가 오직 이곳에서만 거처해서는, 비록 스스로 이로운 행동은 있으나 남을 이롭게 하는 공은 없도다. 지금 명성을 날리지 못하면 앞으로도 좋은 과업을 이루지 못할지라. 어찌 중국에서 불법을 얻어 동해에서 미혹한 무리들을 인도하지 않는가?” 법사가 대답하길, 중국에서 도를 공부하는 것은 본래 원하던 바이나, 바다와 육지가 멀고 막혀 갈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자 신이 중국에 갈 방법을 상세히 일러 주었다.
명성이 중국에 진동하다
575년에 배를 타고 진(陳)나라 수도인 금릉(金陵, 남경)에 가서 장엄사(莊嚴寺) 승민(僧旻, 467~527년) 스님의 제자에게 강의를 들었다. 서적을 두루 섭렵하였고, 진(陳)나라 황제에게 도법(道法)에 귀의하기를 청하여 허락받고,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불경을 공부하고 오나라 호구산(虎丘山, 중국 강소성 소주)에 들어가 수행하니, 승려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사함(四含, 소승 경전)까지 모두 섭렵하고 팔정(八定, 색계 4禪定과 무색계 4空定)에 들어갔다. 당시 산 아래 살고 있던 신도가 강의해 주기를 청하였다. 원광 법사는 굳이 사양하여 허락하지 않았으나 뜻을 굽히지 않으므로 결국 응하게 되었다. 처음에 『성실론』을 말하고 끝에는 『반야경』을 강의했는데, 듣는 사람들이 매우 기뻐하였다. 이로부터 중생 제도를 임무로 삼으니 그 명망이 널리 중국 남방까지 전파되었다.
신이한 감응으로 목숨을 구하다
진나라의 운수가 다하여 수나라 군사가 진나라의 수도 지역까지 쳐들어왔다. 전란으로 어지러운 사이에 원광 법사가 수나라 병사에게 사로잡혀 죽을 처지에 놓였다. 이때 다른 곳에 있던 수나라 장수가 절과 탑이 불타는 것을 보고 달려왔는데, 불타는 모습은 전혀 없고 다만 원광 법사가 탑 앞에 결박되어 있었다. 수나라 장수가 기이하다고 여겨 풀어 주었으니, 위태로움에 임하여 감응이 이른 것이 이와 같았다.
신라 왕실의 요청으로 귀국하다
원광 법사의 명성이 드높아지자, 신라에서 이를 듣고 수나라 황제에게 돌아오게 해달라고 자주 청하였다. 이에 황제가 칙서를 내려 후하게 위로하고 고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하여 600년(진평왕 22) 59세에 신라로 돌아오게 되었다. 신라 진평왕은 법사를 존경하여 중국에 보내는 외교문서를 작성하게 하였다. 608년 고구려가 신라를 핍박하자 왕명에 따라 수나라에 걸사표를 써 보냈다는 기록도 있는데 중국 사서에는 기재되어 있지 않다. 613년에는 수나라 사신이 황룡사에 이르자 백고좌(百高座)를 마련하여 원광 법사에게 법회를 주관하게 하였다.
보살계와 세속오계
신라 귀산(貴山)은 사량부(沙梁部, 경주시 남천 이북 일대) 출신의 화랑이다. 그는 같은 마을의 벗 추항(箒項)과 함께 현자에게 도를 묻고자 하였다. 원광 법사가 가슬갑(청도 부근) 가실사(加悉寺, 가슬갑사)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두 사람은 법사에게 나아가 평생 교훈으로 삼을 말씀을 청하였다. 원광 법사는 근기에 따라 가르침을 펼쳤기에 이들에게 보살계를 변용하여 세속오계를 주었다.
“보살계 10가지가 있는데 너희 신하 된 자로서는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세속의 5계율이 있다. ① 충성으로 임금을 섬긴다 ② 효로 부모를 섬긴다 ③ 친구와 사귐에 믿음이 있게 한다 ④ 전투에 임하여 물러섬이 없다 ⑤ 살생함에 가림이 있게 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이것을 행함에 소홀히 하지 말라.”
귀산 등이 받들어 감히 어기지 않겠다고 하였다. 이후 두 사람은 602년 백제와 아막성(阿莫城) 전투에서 공을 세우고 전사하였다. 세속오계는 새롭게 성장하는 세력을 대상으로 한 유교적 생활윤리에 기초한 세속인의 윤리로서, 일찍이 유학을 공부했던 원광이 제시한 사회 윤리였다. 원광 법사는 섭대승론과 보살계를 강의하여 신라 교학의 이해 수준을 높였고, 지방에서 점찰신앙을 주관하며 종교 활동을 이끌었다. 여래장 사상을 바탕으로 참회를 강조하는 점찰법은 신앙에 바탕을 두고 일반인이 참여할 수 있게 하였다.
좌탈입망과 영험
원광 법사가 노년에는 수레를 타고 궁궐에 왕래했다. 그의 의복과 약·음식을 왕이 손수 마련하고 시종이 돕지 못하게 하여 오로지 복을 혼자 받으려고 하였으니, 감복하고 공경함이 이와 같았다. 원광 법사는 주석하고 있던 황륭사(皇隆寺) 안에서 꼿꼿이 앉아 죽음을 맞았다. 황륭사가 황룡사와 같은지 다른지 논란이 있다. 당시 나이가 99세로 640년의 일이다. 입적할 때 절의 동북쪽 허공에서 음악이 하늘을 가득 채우고 기이한 향기가 절에 가득 차니, 모두 슬퍼하면서 경사스럽게 여겼다. 교외에 장사를 지내니 나라에서 장례 용구를 지급하여 왕의 장례처럼 하였다. 󰡔수이전󰡕에서는 84세에 입적하여 명활성 서쪽에 장사 지냈다고 하였다.
명활성(출처 : 국가유산청)
몰래 옆에 매장한 시신에 벼락이 내리치다
당시 신라에 “복 있는 이의 무덤에 매장하면 자손이 끊기지 않는다.”는 속설이 있었다. 그래서 어떤 이가 사산된 태아 시신을 은밀히 원광 법사 무덤 옆에 묻었는데, 그날 밤 태아의 시신에 벼락이 쳐서 무덤 밖으로 내던져졌다. 이로 말미암아 원광 법사를 공경하지 않던 자들도 모두 숭앙하게 되었다.
삼기산 금곡사지 원광법사 부도탑(출처 : 국가유산청)
· 집필자 : 이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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