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동왕조 | 신라 |
|---|---|
| 활동시기 | [7세기] |
천민 또는 인도인?
양지(良志) 스님의 조상과 고향은 명확하지 않은데 백제인이라 하기도 하고 동남아 출신, 또는 인도 사람이라 하기도 하고 신분이 비천했다고 보기도 한다. 분명한 건 신라 선덕왕(재위 632∼646년) 대에서 문무왕(재위 661∼680년) 대에 걸쳐 행적이 보인다는 사실이다.
지팡이 날려 보시를 받다
양지 스님이 석장(錫杖)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 놓으면 석장이 저절로 날아가 신도 집에 이르러 흔들면서 소리를 냈다. 그 집에서는 이를 알고 재에 쓸 비용을 포대에 넣었고, 포대가 차면 날아서 스님에게 돌아왔다. 그래서 스님이 머무는 곳을 석장사(錫杖寺)라고 하였다.
석장사지에서 출토된 탑상 무늬 벽돌(출처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석장사는 경북 경주시 석장동 동국대학교 뒤편 산에 있던 사찰로, 1986년 동국대 경주캠퍼스에 의해 발굴되었다. 유물로는 금동불상과 탑상문전, 소상, 명문전 등이 발견되었는데, 유물의 특징이 주로 서역풍이라는 점과 통일신라 이후의 양식을 보인다는 점을 근거로 스님이 서역인이었고, 통일신라 이후에 활동했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신묘한 솜씨의 조각 녹유신장벽전
양지 스님은 여러 가지 기예에 통달하여 신묘함이 비할 데 없었다. 영묘사(靈廟寺, 경주시 사정동 국당리에 있었다)와 법림사(法林寺)의 현판을 쓰기도 했다. 영묘사의 장육삼존상(丈六三尊像)과 천왕상(天王像) 그리고 전탑의 기와, 사천왕사 탑 기단부의 팔부신장(八部神將), 법림사의 주불삼존과 좌우 금강신 등이 모두 스님의 솜씨로 이루어졌다. 또 벽돌을 다듬어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그 탑에 3천 불상을 모셔 두고 예불하였다고 한다.
양지 스님의 솜씨를 보여주는 녹유신장벽전(출처 : 국가유산청)
사천왕사 터에서 발굴된 탑 기단부의 팔부신장 녹유신장벽전(綠釉神將甓塼)이 근래 복원되었다. 녹유신장벽전은 녹색 유약을 칠한 가로 70㎝, 세로 90㎝, 두께 7~9㎝의 사각형 벽돌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1915년 녹유신장벽전의 부서진 조각들이 최초 발견되었으며,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6년부터 2012년까지 시행한 사천왕사 터 발굴조사에서도 여러 조각이 수습되었다.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니지만 뛰어난 조형성과 높은 완성도를 보이므로 통일신라 불교 조각의 걸작으로 평가된다.
석장사 터의 연기법송명탑상문전
석장사 터에서 수습된 연기법송명탑상문전(緣起法頌銘塔像文塼)도 양지 스님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7세기 후반 인도의 남해 지역을 여행한 당나라 의정(義淨, 635~713년) 스님의 견문록 『남해기귀내법전(南海寄歸內法傳)』에 인도의 건탑(建塔)에 따른 법사리(法舍利) 장엄 법식이 기록되어 있는데, 연기법송명탑상문전 양식이 그에 해당한다. 또한 석장사 터에서 출토된 고행상(苦行像) 벽돌 조각 역시 인도 불상의 조각 양식이라고 한다.
향가 풍요
양지 스님이 영묘사의 장육삼존상을 만들 때 선정에 들어 삼매 상태에서 하였다. 이에 감동한 이들이 다투어 불사에 참여하여 진흙을 날랐다. 그때 부른 「풍요(風謠)」가 향찰로 기록되어 전한다. 이에 대해 학자들이 다양한 해석을 내놓았는데 양주동의 해석은 다음과 같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들이여
공덕 닦으러 오다
4구체 향가로 분류되는 이 노래는 경주 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다른 일을 할 때 자주 불렀다고 한다. ‘풍요’가 노래 제목이 아니라 민요를 뜻한다고 보기도 한다.
· 집필자 : 이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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