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활동왕조 | 신라 |
|---|---|
| 활동시기 | 6세기 |
| 생년 | 534년 |
| 몰년 | 576년 |
| 이칭(한자) | 眞興王 / 彡麥宗 / 深麥宗 / 深麥夫 / 深麥夫知 |
진흥왕에서 승려 법운으로
법운(法雲)은 신라 제24대 임금인 진흥왕(534~576년)이 출가하여 사용한 법호이다. 그의 속명은 삼맥종(彡麥宗) 또는 심맥부(深麥夫)로, 법흥왕의 아우인 갈문왕의 아들이다. 모친은 법흥왕의 딸 김씨 지소부인(只召夫人)이다. 삼촌과 질녀가 결혼한 것인데 신라 시대엔 근친혼이 드물지 않았다. 백부이자 외조부인 법흥왕이 아들 없이 죽자, 그 뒤를 이어 7세라는 어린 나이에 즉위했다. 그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매우 관대하고 인자하게 정치를 하여 백성들의 신뢰를 받았다. 재위 기간에 신라는 한강 유역과 함경도 일부 지역까지 영토를 크게 넓혔고, 지혜와 무술이 뛰어난 청년들을 양성하는 화랑제도를 시행했다.
흥륜사 준공
법흥왕 때 흥륜사를 짓고자 527년(법흥왕 14)에 터를 잡고 535년(법흥왕 21)에 천경림을 벌채하여 공사를 시작해서, 544년(진흥왕 5)에 흥륜사를 준공했다. 흥륜사는 불국사와 석굴암을 창건한 김대성이 전생에 밭을 보시한 곳이고, 김현(金現)이 호랑이와 인연을 맺었다는 사찰도 이곳이다. 지금은 1980년대에 새로 지은 흥륜사가 있는데, ‘영묘사’라고 새겨진 기와조각이 출토되어, 선덕왕 때 창건된 영묘사 터로 보기도 한다.
경주 흥륜사 금당지에서 나온 연화문수막새(출처 : 국가유산청)
549년(진흥왕 10)에 양(梁)나라는 유학승 각덕(覺德)과 사신을 신라에 보내면서 부처님 사리도 함께 보냈다. 이에 진흥왕은 신하들에게 흥륜사 앞길까지 나가 받들어 맞이하게 하였다.
황룡사 창건과 장육상(丈六像)
553년(진흥왕 14)에는 경주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전을 짓게 했는데, 공사 도중에 황룡이 나타나 하늘로 올라갔다. 이 소식에 모두 깜짝 놀라고 공경하는 마음이 일었다. 그래서 궁궐 대신에 사찰을 짓고 황룡사(黃龍寺)라고 명하였다.
565년(진흥왕 26)에는 진(陳)나라에서 유학승 명관(明觀)과 사신 유사(劉思)를 보내면서 불전 1,700여 권을 보내왔다.
566년(진흥왕 27)에는 기원사(祇園寺)와 실제사(實際寺) 두 절이 창건되고, 황룡사도 13년 만에 일단 준공되었다. 황룡사는 이후 569년(진흥왕 30)에 담장이 완성되고, 645년(선덕왕 14)에 9층탑, 754년(경덕왕 13)에 종이 조성되었다.
574년(진흥왕 35)에는 동(銅)과 황금으로 황룡사의 장육상(丈六像)을 주조하였다. 장육상은 1장 6척, 즉 5미터 정도 되는 크기의 불상이다. 『삼국유사』에는 기원전 3세기 인도 마우리아왕조 3대 임금 아육왕(阿育王, Aśoka)이 황금을 실어 보낸 배가 사포(絲浦, 울산 태화 지역)로 들어왔으므로 그것을 가져와서 주조하였다고 했다. 시기상으로 아육왕과 진흥왕 시대는 8백 년의 간격이 있어서 사실로 믿기는 어려우나 장육상의 신비함을 더해 준다.
장육상의 눈물과 스님의 입적
575년(진흥왕 36)에는 장육상에서 눈물이 나와 발뒤꿈치까지 흘러내리는 이적이 나타났다. 이듬해에 법운 스님이 입적했으므로, 스님의 입적을 예고한 것이라고 전해졌다.
진흥왕은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일심으로 부처님을 받들다가 말년에 이르러 머리 깎고 승려가 되어 법복을 입고 법운(法雲)이라고 하였다. 스님은 계율을 받아 지니고 신구의(身口意) 3업을 청정히 하다가 세상을 마쳤다. 스님이 입적하자, 나라 사람들이 애공사(哀公寺) 북쪽 봉우리에 예의를 갖추어 장사 지냈다.
애공사 터라고 전하는 경주 효현동의 삼층석탑(출처 : 국립문화재연구소)
왕비 사도왕후(思道王后, 식도부인息道夫人) 박씨도 법운 스님이 입적한 이후에 출가하여 묘법(妙法)이라는 법명으로 영흥사(永興寺)에서 지냈으며, 614년(진평왕 36)에 입적하였다.
· 집필자 : 이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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