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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공(法空)

활동왕조 신라
활동시기 6세기
몰년 540년
이칭(한자) 法興王 / 原宗 / 另卽知太王
법흥왕이 법공 스님으로
법공은 신라 제23대 임금인 법흥왕(재위 514~540년)이 스님이 되어 사용한 법호이다. 그의 속명은 원종(原宗)이며 지증왕의 맏아들이다. 어머니는 연제부인(延帝夫人) 박씨이고, 왕비는 보도부인(保刀夫人, 또는 파도부인巴刀夫人) 박씨이다. 법흥왕은 장대한 풍채와 위엄을 갖추었고, 언행이 성스럽고 거룩하였다. 그는 오랜 기간 왕위에 있으면서 덕을 베풀고 신하들을 너그럽게 대했으며, 백성들을 아끼고 사랑으로 감싸 안았다.
법흥왕의 서원과 신하들의 반대
법흥왕은 왕위에 오른 후, 불법을 일으키고자 신하들을 불러 물었다. “미추왕께서는 아도 스님과 함께 처음으로 이 땅에 불교를 펼치려고 하셨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소. 이후로 부처님의 오묘한 교화가 막혀서 행해지지 않으니 짐이 매우 슬프게 생각하오. 마땅히 큰 가람을 세우고 불상을 조성하여 선왕의 공적을 따르려 하는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하오?” 이에 대신 알공(謁恭) 등 대소 신료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말했다. “근자에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평안하지 못하고, 이웃 나라 군사들이 국경을 침범해 전쟁이 끊이지 않는데, 어느 겨를에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켜 사찰을 세우겠습니까?” 그들은 임금의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했다. 임금이 탄식하며 말했다. “과인이 부덕한 사람으로서 왕위를 이어받아, 위로는 음양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아래로는 백성들이 편안하지 못한 것 같소. 그런 까닭에 신하들도 내 뜻을 거슬러 따르지 않으니, 누가 능히 묘한 법의 방편으로써 어리석은 사람들을 깨우쳐 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임금이 원하는 대답을 하는 신하는 없고 불평을 늘어놓을 뿐이었다.
법흥왕과 이차돈이 원력을 세우다
이때, 법흥왕의 측근에 이차돈(異次頓, 또는 거차돈居次頓, 박염촉朴厭觸)이라는 젊은 신하가 있었다. 그는 마음이 진실하고 정직하였으며, 생각이 깊어서 의로운 것을 보면 용기를 냈다. 이차돈은 임금이 석가모니 부처님의 교화에 마음을 두고 있음을 알아차리고, 임금에게 가서 은밀히 아뢰었다. “폐하께서 불교를 펼치고자 하신다면 제게 계획이 있습니다. 제가 거짓으로 ‘왕께서 불사(佛事)를 일으키라고 명을 내리셨다.’고 하면 신하들은 반드시 반대할 것입니다. 그러면 즉시 칙령을 내려 ‘짐이 그런 명령을 내린 일이 없는데 누가 거짓으로 왕명이라 꾸며 대었는가?’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그들은 반드시 신(臣)의 죄를 탄핵할 것입니다. 그때 왕께서 그 신하들의 아룀이 옳다고 하시고, 거짓된 말을 전한 죄로 소신(小臣)을 형벌에 처하여 목을 베시면 저들은 모두 복종할 것입니다.” “과인의 뜻은 백성들을 이롭게 하고자 함인데 어찌 죄 없는 사람을 죽이겠는가? 더구나 충신을 해한다면 어찌 슬픈 일이 아니겠는가?” “만약 도(道)가 행해질 수 있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소신이 죽어 불교가 행해진다면, 부처님의 가르침은 다시 중천에 떠오르고 성스러운 임금께서는 영원히 편안할 것입니다. 이로써 불법을 세우시옵소서.” 임금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차돈이 정성을 다해 청하니, 임금이 감탄하며 말했다. “그대는 베옷을 입었지만 뜻은 비단을 품었구나. 난새와 봉황은 어려서부터 하늘 높은 곳에 뜻을 둔다고 하더니, 그대가 그렇게 한다면 가히 자비의 화신(化身)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얼마 후, 이차돈은 천경림(天鏡林)에 사찰을 창건할 것이라는 왕명을 관리에게 전하였다.
우윳빛 피가 하늘로 솟구쳐 오르다
이차돈의 순교비(출처: 경주박물관)
조정의 신하들은 임금 앞에서 사찰 창건에 관해 쟁론하였고, 임금은 그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차돈이 당당하게 말했다. “신(臣)이 진실로 그렇게 하였습니다. 불법(佛法)을 행하면 온 나라가 태평할 것입니다. 참으로 경제에 유익하다면 비록 거짓으로 임금의 명령을 꾸며냈다 하더라도 무슨 죄가 되겠습니까?” 이에 임금은 여러 신하들에게 이 일에 대해 묻고 말하였다. “여러 사람들의 말은 견고하여 거절할 수 없고 너만 홀로 다른 말을 하니, 양쪽 말을 다 따를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차돈의 목을 베라고 명령하자, 관원들이 그를 묶고 목을 베려고 하였다. 이차돈이 죽음에 임하여 말했다. “제가 불법을 위해 형벌을 받는데 부처님이 신령하시다면 제 죽음에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마침내 이차돈의 목을 베자, 머리는 날아가 소금강산(경주시 용강동)의 서쪽 고개에 떨어지고, 목이 잘린 곳에서 피가 솟구쳤는데 피의 색깔이 우윳빛처럼 희었다. 그 흰색 피가 용솟음쳐 높이 수십 길이나 솟아올랐고,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크게 흔들리며 꽃비가 내렸다.
이차돈의 머리가 떨어진 표암봉 일원(출처: 국가유산청)
이 광경을 목격한 임금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은 이러한 이적에 놀라고, 이차돈이 불교의 이로움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목숨을 잃은 것을 슬퍼하며 서로 바라보고 슬피 울었다. 그리고 시신을 받들어 경주 소금강산에 장사 지내고, 좋은 터를 골라 절을 짓고 자추사(刺楸寺, 현재의 백률사)라 하였다.
불교를 다시 일으켜 세우다
법흥왕이 말했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천백 년 만에 응하여 인(仁)은 상서로움을 발하고 의리는 상서로움을 움직이니, 천지에 응하지 못하는 것이 없고 해와 달까지 뻗치며, 귀신도 감동시킨다고 했다. 하물며 사람이 감동하지 않겠는가. 무릇 스스로 도를 믿으면 천지도 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공(功)은 이룩함을 귀히 여기고 업적은 넓힘을 귀히 여긴다. 그러므로 진실로 큰 발원이 있으면 태산이 기러기 털보다 가볍게 된다. 장하다! 그 죽음으로 얻은 바가 있도다.” 529년에 임금은 무고한 생명을 죽이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을 내렸고, 피폐해진 불교를 다시 일으켰다. 임금은 어진 신하 이차돈의 충직한 간언에 힘입어 미혹의 구름을 쓸어 버리고, 세상을 아름답고 이롭게 하였다. 신라인들은 법흥왕이 불교를 공인하고, 널리 유행시키는 데 앞장섰기 때문에 법흥왕 당대에 ‘불법을 일으킨 왕’이란 뜻으로 ‘법흥대왕’이라고 칭하였다.
법흥왕의 출가, 그리고 흥륜사 창건
535년 천경림(天鏡林)을 벌목하고 사찰을 세우고자 터를 닦다가 초석과 석감(石龕, 작은 불상을 모시는 곳), 그리고 계단을 발견하였다. 그곳은 초제사(招提寺)의 옛터였다. 법흥왕은 이곳에 흥륜사를 창건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정도 일이 진행되자 양위하여 그 후사를 튼튼히 해놓고, 스스로 출가하여 삭발염의하고 가사를 입고 승려가 되어 법공 스님이라 하였다.
1980년대에 새로 지은 경주 흥륜사(출처: 국가유산청)
법공 스님이 머무르는 흥륜사는 대왕이 머물러 있는 곳이라 하여 ‘대왕흥륜사(大王興輪寺)’라고 하였다. 스님은 승복 세 벌과 발우 한 벌에 만족하며 검소한 수도 생활을 하였다. 그는 자비로 중생을 널리 교화시켰으니, 그의 뜻과 행은 원대하고 고매하였다.
· 집필자 : 이미숙(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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