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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도(阿道)

활동왕조고구려
활동시기[4세기]
이칭(한자)我道 / 阿頭
국제 결합으로 탄생하다
아도의 아버지는 위(魏)나라 사람 아굴마(阿崛摩)이고, 어머니는 고구려 사람 고도령(高道寧)이다. 아굴마가 356년(고구려 고국원왕 26년)에 고구려에 사신으로 와서 평양에서 머물 때 고도령과 사통하였다. 앞날을 예견하는 고도령이 자식에게 불교를 접하게 하고자 위나라의 사신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을 것이다. 이듬해 357년 정월에 고도령이 아들을 출생하니, 이름을 아도(阿道)라고 하였다. 그렇게 신라 불교의 싹을 틔울 인물이 탄생하게 되었다.
위나라에 가서 승려 되다
아도가 성장하여 어머니에게 부친에 대해 물으니, ‘위나라 사신이었던 아굴마’라고 알려주었다. 그래서 372년(고구려 소수림왕 2년) 16살 때 아도가 위나라에 들어가 아버지를 만났다. 고위 관료인 아버지는 임금께 아도에 대해 아뢰었고, 임금이 도첩(度牒, 승려 증명서)을 주어 승려가 되게 하고는 ‘아도(阿度)’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그래서 위나라에서 유명한 현창(玄暢, ?-484) 화상의 문하에 들어가 그의 의발(衣鉢, 법통)을 전해 받고 ‘아도(我道)’라는 호를 받았다.
모친의 예언
위나라에서 불법을 공부하고 374년 18살에 고국에 돌아왔다. 다음 해 375년에 소수림왕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창건하여 아도 스님을 머물게 했다. 하루는 모친 고도령이 아도 스님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나라는 아직 불법을 모르지만, 이후 3천여 월이 지나면 신라에 성왕(聖王)이 출현하여 불교를 크게 일으킬 것입니다. 그 서울에는 일곱 곳의 절터가 있습니다. 첫째는 금교(金橋) 동쪽의 천경림(天鏡林, 흥륜사 자리), 둘째는 삼천기(三川歧, 영흥사 자리), 셋째는 용궁(龍宮) 남쪽(황룡사 자리), 넷째는 용궁 북쪽(분황사 자리), 다섯째는 사천미(沙川尾, 영묘사 자리), 여섯째는 신유림(神遊林, 천왕사 자리), 일곱째는 서청전(婿請田, 담엄사 자리)입니다. 모두 이전 부처님 시대의 절터로서 앞으로 불법의 물결이 길이 흐를 곳이니, 스님이 그곳으로 가서 큰 가르침을 전파하고 선양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동방으로 향해올 것입니다."
모친의 예언에 따라 신라로 가다
아도 스님이 신라로 가서 대궐 서쪽(엄장사 자리)에서 지내며, 대궐에 나아가 불교의 가르침을 전파하고자 했다. 그러나 전에 듣지 못하던 것이라 하며 꺼리고 죽이려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래서 모례(毛禮)가 다스리던 경상북도 선산의 냉산(冷山)으로 들어가 암자를 짓고 머물렀다. 당시 겨울철이라 암자 주위에 눈이 덮여 있었는데 암자 자리 부근에는 오색이 찬란한 도리화(桃李花)가 피어 있는지라 그 암자의 이름을 도리암(桃李庵, 현재 도리사)이라고 하였다. 모례는 모록(毛祿)이라고도 하는데, 묵호자(墨胡子)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신라로 왔으나 탄압이 심하자 묵호자를 숨겨주었던 인물이며, 누이 사씨(史氏)와 함께 아도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승려가 되었다.
도리암 자리에 세워진 도리사 석탑
공주의 병을 치유하다
법흥왕(재위 514~540년)이 아도 스님에게 토지를 하사했다는 기록도 있다. 왕의 딸이 병이 났는데 아도 스님이 7일 동안 정근(精勤)해서 병이 나았기 때문이다. 왕이 매우 기뻐하면서 천경림(天敬林, 흥륜사)을 하사하니, 그곳에 암자를 짓고 부처님을 받들어 공양하게 되었다. 위 기록이 「아도화상비」에는 백여 년 이전 미추왕 시절의 일로 되어 있다. 264년 미추왕의 딸 성국공주(成國公主)가 질병에 걸려 무당이 치료하였으나 효험이 없었다. 이에 사방으로 의사를 찾도록 하니, 이 소식을 듣고 아도 스님이 와서 병을 치료한 것이다. 왕이 크게 기뻐하며 소원을 물으니, 이에 대답하기를, 달리 구할 것이 없고 다만 천경림에 절을 지어 불교를 크게 일으켜 나라의 복을 비는 것이 소원일 뿐이라고 하였다. 왕이 이를 허락하여 사찰을 지으라고 명령하였다. 당시 풍속이 질박 검소하여 띠풀을 엮어 지붕을 잇고, 절 이름을 흥륜사라고 하였다. 아도 스님이 여기에 머물면서 강연하니 가끔 천화(天花)가 땅에 떨어졌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아도 스님은 도리사 뒤 금수굴(金水窟)에 들어간 후 다시는 나오지도 않았다.
기록의 불일치, 일연의 비평
『삼국유사』의 기록은 통일신라시대 김대문(金大問)의 『계림잡전』에 따른 것인데, 그 이전 신라 시대 김용행(金用行)이 지은 「아도화상비(我道和尙碑)」와 다르다. 법흥왕과 미추왕 시기라는 견해에 대해서 일연 스님은 눌지왕 때가 합당하다고 판단하였다. 불교는 반드시 고구려·백제에서 시작되고 신라에는 나중에 들어왔을 것이고 눌지왕 시대는 소수림왕 시대와 서로 근접해 있으니, 아도가 고구려를 하직하고 신라에 온 것은 마땅히 눌지왕 때였을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눌지왕 때를 기준으로 본문에 연도를 제시하였다. 고도령의 예언에 대해서는 눌지왕부터 법흥왕까지를 헤아리면 3천여 월이 아니라 1천여 월이라고 해야 한다고 했다. 신라 미추왕 때 신라에 건너온 아도와 고도령의 아들 아도, 고구려 불교의 재전자 아도, 그리고 비처왕 때의 아도가 서로 다른 인물이라는 의견도 있다.
· 집필자 : 이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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