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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도(順道)

활동왕조고구려
활동시기[4세기]
이칭(한자)惠順
포교에 뜻을 두다
순도(順道)는 전진(前秦, 351~394년) 시대에 태어났다. 스님의 생애에 대해 자세히는 알 수 없으나, 학문이 깊고 사물을 바라보는 견해가 넓었다고 한다. 출가 이후 불교의 가르침을 깊이 연구하고 실천하였는데, 일상생활에서 행동이나 몸가짐이 너그러웠으며 종교적인 품위를 자아냈다. 스님은 불교의 진리를 널리 전파하겠다는 뜻을 품고, 중국 각 지방을 돌아다니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폈는데, 사람들에게 가르침을 전할 때는 자비로운 마음과 말로써 대했다. 이러한 덕행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고, 그의 명성은 널리 알려졌다.
전진에서 고구려로 파견
전진의 왕 부견(苻堅)은 북중국을 통일하고자, 370년에 거기대장군(車騎大將軍) 왕맹(王猛)에게 명령하여 10만의 병력을 이끌고 전연(前燕)을 공격하여 격파하게 했다. 전연이 멸망하자 전연의 태부(太傅) 모용평(慕容評)이 고구려에 망명하였다. 그러나 전진과 친선 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던 고구려의 고국원왕(재위 331~371년)은 그의 귀순을 받아들이지 않고 전진에 넘겨주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조치는 부견에게 큰 힘이 되었다. 부견은 유교에 기반한 정치를 하면서도 불교를 국가적으로 후원하며, 불교를 주변 국가에 전파하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모용평이 전진으로 압송된 이후인 372년 6월, 부견은 고구려에 친선 사절을 보내면서 사신과 함께 순도 스님을 파견하고 불상과 불경 등을 전했다.
고구려의 최초 사찰 성문사
고국원왕의 뒤를 이은 소수림왕(재위 371~384년) 역시 전진과 평화적 관계를 유지하며 전진의 제도와 문화를 받아들이는 데 힘썼다. 그래서 전진의 사신과 순도 스님이 불상과 불경을 싣고 고구려로 왔을 때, 임금과 신하들은 예의를 갖추어 성문(省門)까지 나와 맞이하며 공경하였다. 소수림왕은 전진에 사신을 파견하여 토산물을 보내는 등 감사의 뜻을 전했다.
불상과 불경을 전하다(Gemini로 생성한 이미지)
고구려의 조정에서는 전진에서 온 순도 스님을 귀인으로 여기고, 진실한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받들어 모셨다. 순도 스님이 고구려에 온 지 3년 되는 375년 2월, 순도 스님을 맞이한 장소인 성문(省門)에 왕명으로 사찰을 창건하여 성문사(省門寺)라 이름하고, 스님을 이 절에 머물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사찰은 교육과 문화 교류의 중심지가 되었고, 고구려의 문화적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인과의 원리로 교화를 펴다
임금과 귀족들의 후원을 받으며, 순도 스님은 고구려에서의 생활에 적응하면서 왕자를 가르치는 한편 많은 이들에게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하였다.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 중에서도 인과응보의 원리를 중시하여, 인간의 행복과 불행은 자신이 지은 생각과 말과 행위에 따라 결정된다는 점을 일깨워 주기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또한 모든 중생이 불성을 지니고 있으며, 수행을 통해 깨달을 수 있다는 가르침을 전했다. 그리하여 석가모니 부처님의 이름과 광명이 퍼졌고, 순도 스님의 지혜와 불가사의한 신통력이 사방으로 알려졌다.
고구려의 문화에 변화를 일으키다
스님은 계율을 지키며 수행과 실천을 통해 불교의 가르침을 보여주었고, 거처를 옮겨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부처님의 가르침을 전했다. 그러나 고유의 토착신앙을 가지고 있었던 고구려인들은 새로운 문물인 불법(佛法)과 불교 의식을 받아들이고 이해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처음 듣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흥미를 느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스님은 때론 모욕을 당하기도 했지만 인욕바라밀을 실천하며 원한을 일으키지 않고 가르침을 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조금씩 열리듯이, 사람들은 점점 불교를 소중하게 받아들이며 숭상하게 되었다. 순도 스님이 전파한 불교는 고구려의 문화와 사회에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구려 사람들에게 난초의 그윽한 향기처럼 스며들어 그들의 생활 양식을 상당 부분 바꾸어 놓았다.
· 집필자 : 이미숙(현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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