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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효의 생애

원효(元曉, 617-686)는 삼국 전쟁이 치열했던 7세기에 활동하면서, 사람들에게 불교를 대중화하였다. 그의 생애에 관한 자료는 「고선사서당화상비(高仙寺誓幢和尙碑)」, 『송고승전(宋高僧傳)』 「원효전」, 『삼국유사(三國遺事)』 「원효불기(元曉不羈)」 등이 있다. 그러나 「서당화상비」는 절반 정도만 전하며 마멸이 심해 비문 판독과 해석에 어려움이 있다. 『송고승전』은 10세기 말 중국에 전해졌던 원효상을 언급한 것이고, 『삼국유사』의 경우 출신지와 가계 및 수학 과정과 교화행적 등에 대해 『송고승전』의 자료, 행장 등에 미루고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들 자료에 언급되지 않은 요석공주와의 결혼 내용을 향전(鄕傳)에서 인용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생애에 대해서는 추론이 많을 수밖에 없다.
동국대 박물관 소장 「고선사 서당화상 탑비 조각(왼쪽 상단 부분)」 ⓒ동국대학교 박물관
출생과 수학
원효의 어릴 때 이름은 서당(誓幢) 또는 신당(新幢)으로, 우리말로는 ‘새털’이라는 뜻이고, 원효는 출가했을 때의 이름이다. 성은 설(薛) 씨로 신라 진평왕 39년(617)에 신라의 압량군(押梁郡), 지금의 경상북도 경산시(慶山市)에서 잉피공(仍皮公)의 손자이며 내마(奈麻) 담날(談捺)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의 관등(官等)이 제11위인 내마이므로 진골(眞骨)은 아니지만 6두품이나 5두품에 해당하는 지배층이었다. 총각머리를 할 나이인 15세 무렵에 출가하여 특정한 스승을 따르지 않고 자장(慈藏, 590-658) 등이 중국에서 전해 온 경전과 승려들의 저술을 읽으며 불교 교학을 탐구했다. 당시 중국에서는 645년 현장(玄奘, 602-664)이 인도 유학에서 돌아온 후 당 태종의 지원을 받으며 유식(唯識)과 관련된 경전 및 논을 번역하였다. 648년 번역을 마친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도 신라에 전해지던 상황이었다. 이에 원효는 현장에게 유식학을 배우기 위해 의상(義相, 625-702)과 함께 중국 유학에 나섰다가 중도에 그만두고 돌아왔다. 그 계기는 중도에서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인데, 그 장소는 「월광사원랑선사탑비(月光寺圓朗禪師塔碑)」에 의하면 직산(樴山), 오늘날의 직산(稷山)이었다. 이 지역은 경주에서 중국으로 가기 위해 배를 탈 수 있는 당항진(黨項津,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으로 가는 교통로에 해당한다.
깨달음
원효의 깨달음에 관한 내용은 원효의 전기에는 나오지 않고, 연수(延壽, 904-975)가 찬술한 『종경록(宗鏡錄)』과 찬녕(贊寧, 919-1001)이 찬술한 『송고승전(宋高僧傳)』 「의상전」에 실려 있다. 『송고승전』에 의하면 원효가 당주(唐州) 영역에서 비를 만나 고분 속에서 이틀 밤을 자게 되었는데, 첫날은 동굴이라 생각하여 마음 편하게 잘 수 있었으나, 이튿날은 무덤 속임을 알게 되어 밤새 악몽에 시달린 후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종경록』에서는 이와 조금 다르게, 무덤 속의 해골에 담긴 것을 물인 줄 알고 달게 먹었다가 시체의 물임을 알고 토하고 나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고 하였다. 계기는 조금 다르지만, 그가 깨달은 내용은 “삼계유심(三界唯心) 만법유식(萬法唯識)”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의 모든 현상은 오직 마음의 산물이고 모든 존재는 오직 아뢰야식의 산물이다”라는 것이다. 원효는 무덤과 시체의 물 자체는 변함이 없지만 무덤인 것과 시체의 물임을 알고 나서 자신이 괴로움을 겪었음을 알게 되었고, 괴로움의 원인이 된 현상이나 존재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마음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원효는 굳이 중국에 유학 가서 배울 필요성이 없어졌으므로 바로 귀국하였다. 이때가 언제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의상이 원효와 함께 가다가 원효는 깨달음을 얻어 신라로 돌아갔다는 의상에 대한 기록을 따른다면, 의상이 중국에 간 시기는 661년이므로 이때로 보아야 한다. 그러나 원효에 대한 기록에서는 의상과 함께 갔다는 내용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신라와 백제가 치열하게 싸우던 650년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하기도 한다.
대중 교화
원효가 신라로 돌아온 후의 행적도 구성이 매우 어렵다. 이 당시 그는 저술 활동과 환속, 대중교화 활동에 몰두했을 것이다. 저술활동과 대중교화에 대해서는 다음에 살펴보고, 먼저 환속에 대해 살펴보겠다. 원효의 환속은 『삼국유사』 「원효불기조」에서 인용한 「향전」에 의하면, 태종무열왕 때인 654년에서 660년 사이에 이루어졌다. 원효가 거리를 돌아다니며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빌려준다면 내가 하늘을 떠받들 기둥을 베어오리라.”라고 노래 부르자, 태종무열왕이 이를 듣고 원효가 훌륭한 아들을 낳고 싶어 한다고 이해하고 요석궁의 공주에게 원효를 인도하게 했다. 요석공주와 혼인 후 설총(薛聰)을 낳았다. 그 후 원효는 환속하여 속인의 옷을 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姓居士)라 이름하고, 대중교화에 힘썼다. 그리고 662년 12월 김유신이 소정방(蘇定方)이 이끌고 고구려 원정에 나선 당나라 군대에게 군량을 수송하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고구려 군대가 뒤쫒아 와 난관에 부딪치자, 원효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때 소정방이 난새와 송아지를 그린 암호문을 보내왔을 때 원효가 이를 ‘빨리 돌아가라[速還]’고 풀이해 주어, 신라군이 신속하게 퇴각하도록 하였다. 또 문무왕(文武王)으로 추정되는 국왕이 『인왕경(仁王經)』에 근거한 백고좌대회(百高座大會)를 열고자 훌륭한 승려를 찾았을 때, 불교계의 반대로 참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아마도 원효가 환속한 이후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 후 신라에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이 유포되고 원효가 왕비의 병을 낫게 하기 위한 법회를 열 때 대안(大安)이 원효를 추천하여, 황룡사에서 『금강삼매경론』을 저술하여 강연하게 되었다. 이때 5권으로 된 주석서를 지었으나 누군가 훔쳐가 3일 만에 새로 3권을 다시 저술하여 강연하였다. 이처럼 원효가 승려였다가 환속한 이후로 신라의 불교 교단에서는 원효에 대한 비판이 거세었던 것으로 보인다. 환속한 이후 원효는 저술과 대중 교화에 치중하였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사람들이 원효 때문에 ‘나무(南無)’를 칭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무’란 귀의한다는 의미이다. 즉 불보살에게 내 목숨을 바치듯이 의지하고 공경한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사람들이 원효 때문에 불교를 알고 믿게 되었음을 말한다. 그렇다면 원효가 어떻게 불교를 대중화하였을까? 원효는 설총을 낳은 이후 속인의 옷을 입고 광대가 춤출 때 쓰는 커다란 박을 들고 마을을 돌아다니며 춤추고 무애(無㝵)라는 노래를 불러 사람들을 교화하였다. 그 결과 사람들에게 붓다의 이름을 알게 하고 나무를 칭하게 하였다. 원효가 지어 불렀다는 노래는 “일체에 걸림이 없는 사람은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난다.”는 것으로 『화엄경』의 구절이다. 글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노래와 춤으로 불교의 가르침을 전함으로써 불교를 쉽게 받아들이도록 하였다. 원효는 저술 작업과 대중 교화에 몰두하며 만년을 보내다가, 수공(垂拱) 2년(676, 문무왕 16) 3월 30일 혈사(穴寺)에서 70세로 사망하였다. 아들 설총은 원효의 유해를 빻아 원효의 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봉안하였다. 그 후 손자인 설중업(薛仲業)이 779년~780년 일본에 사신으로 다녀왔는데, 이때 일본의 상재(上宰)가 설중업이 원효의 손자임을 알고 시를 지어 주는 등 환대를 해주었다. 귀국한 설중업이 봉덕사(奉德寺) 승려 등과 함께 당시 권력자였던 각간(角干) 김언승(金彦昇, 후대의 헌덕왕)의 후원을 받아 「서당화상비」를 세웠다. 그러나 「서당화상비」는 일찍 훼손되었는지 이 비문을 인용한 자료가 없는 상황이다.
서당화상비 탁본(왼쪽)과 조각(오른쪽)
입적 후 화쟁국사(和諍國師) 시호의 추증
이후 고려시대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에 의해 원효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이루어졌다. 의천은 요 황제의 요청에 따라 고려에 있던 승려들의 저술을 보내면서, 일부 남아 있던 원효의 『화엄경소』를 『화엄종요』와 합본하여, 10권으로 만들어 보냈다. 이때 원효를 성사(聖師)라 극찬하였다. 그리고 의천은 당시의 배움에 게으른 사람들이 도무지 원효를 알지 못함을 한탄하며 이것이 마치 ‘동쪽 집에 공자가 산다.’라는 말과 같다고 하였다. 그리고 『금강삼매경론』을 지은 원효를 인도의 마명(馬鳴)과 용수(龍樹)에 비견하기도 하였다. 「분황사 원효성사를 제사드리는 글(祭芬皇寺曉聖文)」에서는 자신이 어려서부터 불법(佛法)을 사모하며 선철(先哲)들의 글을 두루 살펴보았으나 성사(聖師)보다 뛰어난 이가 없었다고 하였다. 이처럼 원효에 대한 의천의 평가는 나아가 숙종 6년(1101) 8월에 원효를 의상과 함께 국사(國師)로 추증하며 화쟁국사(和諍國師)의 칭호를 주고 분황사에 비석을 세우게 하는데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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