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암 국일도 대선사 비명은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의 입적 3년 후인 1663년(현종 4) 계묘년 8월에 건립된 벽암 각성의 비로 화엄사 금강문과 성보박물관 앞에 있다. 스님은 법명이 각성(覺性), 법호가 벽암(碧巖), 속성이 김씨(金氏), 충북 보은 사람이다.
비신의 전면에는 전액(篆額), 제명(題名)과 서(序)가 적혀 있고, 후면에는 건립일, 제작에 참여한 재가자와 문도의 명단이 적혀 있다. 전액은 ‘국일도대선사비명(國一都大禪師碑銘)’이고, 예문관직제학 조계원(趙啟遠)이 썼으며, 비신 상단에 가로로 적혀있다. 제명은 ‘사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명병서(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銘幷序)’로 해서체로 썼다. 비문은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썼으며, 서체는 홍문관제학 오준(吳竣)이 썼다.
비는 받침돌 귀부(龜趺)와 본체인 비신(碑身), 귀면(鬼面)이 특이하게 조각된 이수(螭首)로 구성되어 있다. 귀부는 지대석과 한 돌로 제작되어 있으며, 머리에 뿔이 하나로 표현된 용두형(龍頭形)이다. 배갑(背甲)에는 6각형의 귀갑(龜甲)이 조각되어 있으며, 배갑 가운데 복련(覆蓮)으로 장식된 비좌(碑座)가 조각되어 있다. 이수는 특수한 형태로 세 부분으로 구분된다. 큰 구름이 조각되어 있는 아랫단, 앞뒤로 두 마리의 큰 용이 새겨진 이수, 상륜(相輪) 혹은 보주(寶珠)를 조각해 놓은 상단으로 구분되며 각각의 석재가 다르다. 총 높이는 418㎝, 이수 높이는 120㎝, 귀부 높이는 100㎝, 비신 높이는 198㎝, 비신 폭은 100㎝, 비신 두께는 26㎝이다.
스님의 몰년과 구족계를 받은 연도에 대해서는 행장과 비명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비명의 내용은 비문을 쓰게 된 경위, 행장에 의거한 벽암 각성 대사의 출신과 행적, 대사의 잠언, 입적게송 등으로 구성된 서(序)와 말미의 명(銘)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명은 그 명문이 목판으로도 제작되었으며, 현재 화엄사 성보박물관에 소장중이다.
한편, 국사편찬위원회 발간 ‘『해외사료총서 15권 일본소재 한국사 자료 조사보고 Ⅲ』, 京都大學 부속도서관 소장 『金石集帖』 자료 현황 편’에 벽암각성비 탁본이 수록되어 있다. 구례 화엄사 벽암대선사비는 2009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원문
(앞 면)
國一都大禪師碑銘
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碧巖碑銘幷序
原任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領議政兼領 經筵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世子
師李景奭 譔
崇祿大夫行議政府左叅䝺兼知 經筵春秋館事弘文館提學五衛都捴府都捴管吳 竣 書
嘉義大夫行承政院都承㫖兼 經筵叅贊官春秋館修撰官藝文館直提學尙瑞院正趙啓逺 篆
夫儒釋異道不相謀而夷攷行業亦關觀感鏟采空谷義猶歉於獨善布恵祗園功則茂於廣濟永垂穹石實愜禪林碧巖大師之上足跋渉千里謁余於西湖手状請
銘累日益切余不忍孤其誠遂据状而序之其状曰大師法諱覺性碧巖其號湖西報㤙人俗性金海之金其先有衣冠云師之父甞卜居于縣西相者曰生子必為大沙
門母曹無子相與齋㓗禱北斗夢古鏡有娠生師萬暦乙亥十二月丁亥也風骨霜凝眼珠電耀䔍孝于親幼不喜戱九嵗怙過毁僅全既沒丧忽遇過僧傾心學禪阿
孃重離旋有感悟遂之華山禮雪而師之十四落髮受具于寳晶老師浮𠇾到華山大異之勉以真筌乃従𠇾師入俗離山轉厯德裕伽耶金剛䒭山日閱貝葉自是相
随不蹔離壬辰之難松雲政大師倡義旅軍關東為𠇾徃問避寇于山必手經問難癸巳松雲薦𠇾于 朝檄陣上師亦杖釼従天將破賊于海中漢人見師盛贊之庚
子結夏于七佛蘭若𠇾病輟講讓於師師辞不獲登座討論玄風丕振丙午秋丧母謝徒衆修齋薦福於俗離之迦葉窟能堪人所不堪盖業于𠇾門二十餘年入室傳法
戒行絶髙随縁泊如絶粒而不飢通宵而不睡常衣銷瘦結跏丈室負笈者雲集甘露徧灑自撰三箴以戒徒弟盖思不妄面不愧腰不屈也神珠一照㝎水㴠光華嚴肅
倡大厲退却浄地埋胔妖魅頓絶至有猛乕護路馴鴉集肩鷄獲活而知報魚燒網而䘖感飛走猶化况在最靈諸山衆園或刱或修如䨥溪之東刹華嚴之宏制松廣之
伽藍乃其大者餘可略也光海時獄事興𠇾師為妖僧所誣師偕入亰光海見兩師竒之放𠇾還山留師於奉㤙寺為判禪敎都捴攝卿士大夫多與之東陽尉特相善未
㡬南歸 仁祖朝城南漢議者白 上徵師為八道都捴攝領緇徒監築三年而告訖 賜報㤙闡敎圎照國一都大禪師號衣鉢竝錫焉丙子在智異山聞 車駕幸
南漢乃鳴皷泣諭衆曰吾屬亦王民况以普濟為宗 國事急矣其忍坐視即衣戎衣而起檄召南僧来赴者數千相率而北道聞敵退痛哭而南後 命使日東不敢辭
行到中途以老病甚請還山 孝宗龍潛時手札餉以物及即位用朝議授以捴攝之印俾衛赤裳史閣坐化南僧風廣演真乘居無何浮逰諸名嶽上扶安之邊
山俯南海還栖方丈之華嚴寺己亥夏孝宗賔天奉諱哀呌秋九月微感勗門徒以力業白酬 國㤙戒勿樹碑庚子正月十二日弟子䒭見其將寂請偈於是搦管
手冩曰大經八萬偈拈頌三十卷足以兼二利何須別為頌既悠然而化寄世八十六嵗禪臘七十二共奉而闍毗之三南傾寺七衆填谷三舍利騰出即寺之西麓蔵諸
石鍾大師之承竺敎厥有所自芙蓉靈觀接臨濟之遺緖浮𠇾與淸虗𠇾静俱事觀静傳之松雲𠇾傳之碧巖云其所著有禪源集圖中决疑一卷看話决疑一篇釋門丧
儀抄一卷其弟子多闡玄關請銘者律戒也余甞圖南碧巖来見於求禮縣贈余以拄杖戒随之數年前戒又訪余於洛下今為師来良甚勤矣係以銘曰
師之髙行本於孝親師之捨俗淂師之真慧刃㫁疑覺苑冠倫慈航濟衆寳筏通津衆迷頓豁如夜淂晨海怗長鯨山伏猛乕魚樂于潭鳥馴于宇恵遍大千義著急難功
存堞壘道髙峯巒迹是禪林心猶國耳孤雲不駐逝波未止鶴近錫鷗驚㫁杯山川變色龍象興哀頻伽遺韻尙繞雲隈眼有餘照神不俱寂惟巖屹立終古獨碧
※교열: 불교학술원
번역문
(앞 면)
국일도 대선사 비명(國一都大禪師碑銘) (전자(篆字)로 씀)
사보은천교 원조국일도 대선사(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 벽암(碧巖) 비명(碑銘) 병서(幷序)
원임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겸영경연 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 세자사 이경석(李景奭) 지음
숭록대부 행의정부좌참찬 겸지경연 춘추관사 홍문관제학 오위도총부도총관 오준(吳竣) 글씨 씀
가의대부 행승정원도승지 겸경연참찬관 춘추관수찬관 예문관직제학 상서원정 조계원(趙啓遠) 전자(篆) 씀
무릇 유교와 불교는 이치가 달라 도를 함께 도모할 수 없고 수행과 학업을 고찰하면 또한 보고 느끼는 것에 가로막혀 있다. 대패로 빈 구멍을 파낸다는 뜻은 오히려 자기만 옳다고 행동하는 것만 못하다. 기원정사(祗園)에서 은혜를 베푸니 공적은 널리 구제하는 일에 빼어나고 하늘에 길게 드리워 높으니 실로 선림(禪林)에 흡족하다. 벽암(碧巖)대사의 상수제자가 천리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서호(西湖)로 나를 찾아왔다. 행장을 손에 들고 글을 써줄 것을 청하였는데 날이 갈수록 더욱 절실하였다. 내 그 정성을 차마 져버릴 수 없어 결국 행장에 의해 글을 쓴다.
행장에 따르면, 대사의 법명은 각성(覺性)이고 벽암(碧巖)은 그 호이다. 호서(湖西) 보은(報恩) 사람으로 속성은 김해(金海) 김씨(金)이고 그 선조는 사대부였다고 한다. 대사의 아버지가 일찍이 현의 서쪽에 살 만한 곳을 골랐는데 관상을 보는 자가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큰 승려가 될 것이라고 하였다. 어머니 조(曹)씨가 자식이 없었는데 함께 깨끗이 목욕재계하고 칠성신(北斗)에게 빌자 오래된 거울을 꿈에서 보고 임신하였다. 대사를 낳으니 만력(萬曆) 을해년(선조 8, 1575) 12월 정해(丁亥)일이었다. 풍채와 기골이 바르고 엄정하였고 눈은 번개처럼 빛났다. 부모에 효성이 지극하였고 어려서도 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9살에 아버지를 잃고서 몸이 매우 여위었다가 겨우 나았다. 이미 복상을 끝낸 후 돌연 지나가는 승려를 만나고는 선(禪)을 배우는데 마음이 기울었다. 어머니와 거듭 헤어졌는데 점차 느끼고 깨닫는 것이 있어서 마침내 화산(華山)으로 가서 설묵(雪默) 대사에게 절하고 스승으로 섬겼다. 14세에 머리를 깎고 보정노사(寶晶老師)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부휴(浮休: 善修)가 화산에 왔는데 그를 매우 남다르게 여기고 진실한 법(眞筌: 眞詮=眞諦)을 권면하였다. 곧 부휴대사를 따라 속리산(俗離山)으로 들어갔고 덕유산(德裕), 가야산(伽耶), 금강산(金剛) 등을 옮겨 다녔다. 날마다 경전을 보는 것이 이로부터 계속되었고 잠시도 놓지 않았다. 임진년(선조 25, 1592) 난에 송운 유정(松雲惟政) 대사가 관동(關東)에서 의려군(義旅軍)을 불러 모았다. 부휴선사에게 가서 묻고는 산에서 적을 피하였는데 반드시 경전을 손에 들고 어려운 곳을 물었다. 계사년(1593) 송운이 부휴를 조정에 천거하여 격문으로 부르고 위에 아뢰니 대사 또한 칼을 잡았다. 명나라 장수를 따라 바다에서 적을 격파하였는데 중국 사람들이 대사를 보고 매우 칭송하였다. 경자년(1600) 칠불난야(七佛蘭若)에서 하안거(結夏)를 하였는데 부휴가 병이 들어서 강석을 거두고 대사에게 물려주었다. 대사가 사양하였지만 할 수 없어서 법좌에 올라 토론하니 현묘한 기풍이 크게 떨쳐졌다. 병오년(1606) 가을 모친상을 당하니 문도 대중을 떠나 속리산 가섭굴(迦葉窟)에서 재(齋)를 행하고 복을 빌었다. 남이 견디지 못하는 것을 감당할 수 있었으므로 부휴 문하에서 20여 년간 수업하여 입실(入室)제자로 법을 전수받았다. 계를 실천함에 뛰어났고 인연에 따라 태연하고 담박하였다. 곡기를 끊고도 굶주리지 않았고 밤을 새우고도 잠을 자지 않았으며 늘 옷은 닳고 헤져 있었다. 방장실(丈室: 方丈, 住持의 방)에 결가부좌를 하니 책 상자를 짊어지고 오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단 이슬 같은 가르침이 골고루 뿌려졌다. 스스로 세 개의 잠(箴)을 지어 문도를 경계하였다.
思不妄 생각함에 거짓이 없다.
面不愧 얼굴에 부끄러움이 없다.
腰不屈也 허리를 굽히지 않는다.
신비한 구슬이 한 번 비추니 고인 물에 빛을 담근다. 화엄(華嚴)을 엄숙히 외우니 큰 악귀가 퇴각한다. 깨끗한 땅에 썩은 고기를 묻으니 요괴가 단박에 없어진다. 심지어 사나운 호랑이가 길을 지켜준 적도 있었고 따르는 까마귀가 어깨에 모여들었으며 닭은 다시 살아나 보답할 줄을 알고 그물을 태우자 물고기는 감사함을 머금었다. 날고 달리는 동물도 오히려 교화하였는데 하물며 인간에 있어서야! 여러 산사(山園: 山寺)를 혹은 창건하고 혹은 중수하였는데 쌍계사(雙溪)의 동찰(東刹), 화엄사(華嚴)의 대대적 중창, 송광사(松廣) 가람이 그 중 큰 것이며 나머지는 생략한다. 광해군 때 옥사(獄事)가 일어났는데 부휴선사가 요승의 무고를 당하니 대사가 함께 서울로 들어갔다. 광해군이 두 대사를 보고 범상치 않게 여겨서, 부휴선사를 석방하여 산에 돌아가게 하였고 대사를 봉은사(奉恩寺)에 머물게 하여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摠攝)으로 삼았다. 공경과 사대부 여럿이 대사와 친하였는데 동양위(東陽尉: 申翊聖)와 특히 사이가 좋았다. 얼마 안 있어 남쪽으로 돌아갔다. 인조대에 남한(南漢)산성을 쌓을 때 의논하는 이들이 주상에게 아뢰고 대사를 불러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삼고 승도를 영솔해서 축성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3년이 지나 공역이 끝났다고 보고하니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의 칭호를 하사하였고 아울러 의발을 내려주었다. 병자년(인조 14, 1636) 지리산(智異山)에 머물렀는데 임금의 수레가 남한산성에 행차하였음을 들었다. 이에 북을 치고 눈물을 흘리며 대중을 깨우쳐 말하기를, “우리 승려들도 임금의 백성인데 하물며 널리 구제함(普濟)을 근본으로 삼음에야! 나라 일이 시급하니 차마 앉아서 관망할 수 없구나” 하였다. 바로 군복을 입고 궐기하였고 격문으로 남녘의 승려들을 불러들이니 달려 온 자가 수천 명이었다. 이끌고 북쪽 길로 가는데 적이 퇴각하였음을 듣고는 통곡하며 남으로 돌아왔다. 이후 동쪽 일본으로 가는 사신으로 임명되었는데 감히 사양하지 못하다가 사행이 중도에 이르러 노환이 심해졌기에 청하여 산으로 돌아갔다. 효종은 즉위 전에 편지를 보내고 물건을 보내주었는데 즉위함에 이르자 조정의 의논으로 총섭(摠攝)의 직책을 제수하고 적상산(赤裳)의 사각(史閣)을 지키게 하였다. 앉아서 남녘 승려의 기풍을 교화하고 널리 진실한 법을 펼쳤다. 머문지 얼마 안 되어 여러 명산을 유력하였는데 부안(扶安)의 변산(邊山)을 올려다보고 남해(南海)를 굽어본 후 지리산(方丈) 화엄사로 돌아와 주석하였다. 기해년(1659) 여름 효종이 승하하자 제사를 올리고 슬피 울었다. 가을인 9월에 미미한 병세가 있었는데 문도들에게 수업에 힘쓸 것을 권면하였고 나라의 은혜를 갚으라고 하면서 비석은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경자년(현종 1, 1660) 정월 12일 제자들이 대사가 장차 입적할 것을 알고 게송을 청하였다. 이에 붓을 잡아 손수 쓰기를,
“대경(大經) 8만 게송과 염송(拈頌) 30권이 충분히 자리(自利)와 이타(利他)의 두 이로움을 갖추었는데 어찌 별도로 게송을 지을 필요가 있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편안하게 입적하니 세상에 몸을 맡긴지 86년, 법납(禪臘)은 72세였다. 함께 받들어서 다비를 행하였는데 삼남(三南) 온 절의 불제자들이 골짜기를 메웠다. 사리 세 개가 튀어 나오자 절의 서쪽 기슭 부도에 봉안하였다. 대사가 불교를 계승함은 저 부용 영관(芙蓉靈觀)으로부터 말미암은 것이니 임제(臨濟)가 남긴 법맥을 접한 것이다. 부휴와 청허 휴정(淸虛 休靜)은 모두 영관을 섬겼는데 휴정은 송운(松雲)에게 전하였고 부휴는 벽암(碧巖)에게 전수하였다고 한다. 저술로는 『선원집도중결의(禪源集圖中決疑)』 1권, 『간화결의(看話決疑)』 1편,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 1권이 있으며 제자 중 다수가 현묘한 이치에 통하는 관문(玄關)을 열었다. 글을 써줄 것을 청한 이는 율계(律戒)이다. 내 일찍이 원대한 뜻을 품었는데(圖南), 벽암이 와서 구례현(求禮縣)에서 만나보고 나에게 지팡이를 주었다. 율계가 그를 수행하였는데 수년 전에 율계가 또한 낙하(洛下)로 나를 방문하였고 지금 스승을 위해서 왔으니 참으로 매우 부지런하다. 이런 관계로 비명을 짓는다.
대사의 높은 행실은 부모께 효도함에 근원하였고
대사가 속세를 버린 것은 대사의 진면목을 얻은 것이다.
지혜의 칼은 의심을 끊었고 깨달음의 터에서 인륜을 높이 숭상하며,
자비의 배는 중생을 구제하고 보배로운 뗏목으로 나루를 건넌다.
수많은 미혹이 단박에 흩어지니 밤에 새벽을 맞는 것과 같도다.
바다에서는 큰 고래가 따르고 산에서는 사나운 호랑이가 복종하며
물고기는 못에서 즐기고 새는 집에서 따른다.
은혜는 대천세계에 두루 미치고 의리는 시급한 어려움에서 드러난다.
공적은 성채에 있고 도는 산봉우리보다 높구나.
자취는 선림(禪林)에 있지만 마음은 오히려 나라에 있을 뿐이다.
외로운 구름은 머물지 않고 가는 파도는 멈추지 않는다.
학은 가까이 머물 곳을 잃고 갈매기는 쪼개진 잔에 놀란다.
산천의 색이 변하고 고승은 슬픔을 일으키는데
절에는 소리가 남아 오히려 구름을 감싸서 돈다.
눈에는 빛이 남아 있고 정신은 함께 없어지지 않았구나.
생각건대 바위(巖)가 우뚝 솟아 있는 것이 예로부터 홀로 푸르도다.
※출처: 『화엄사 벽암국일도대선사비』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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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통사-사보은천교 국일도대선사 벽암비명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상편, 조선 현종 원년 조에 수록되어 있다. 「사보은천교국일도대선사벽암비명(賜報恩闡敎國一都大禪師碧巖碑銘)」은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이 입적한지 3년 뒤, 스님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1663년 계묘년 8월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당시 영의정 이경석(李景奭)이 찬(撰)하였고, 좌참찬 오준(吳竣)이 글씨를 썼다. 전액(篆額)은 승정원 도승지 조계원(趙啓遠)이 썼다. 내용은 비문을 쓰게 된 경위, 행장에 의거하여 대사의 출신과 행적,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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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편구례지와 속수구례지『속편구례지』는 1922년 도유사(都有司) 고정한(高定漢) 등이 간행한 지리지로 『봉성지(鳳城誌)』의 편제에 따라 상·하편으로 구성하되, 내용을 수정·증보한 것이고, 『속수구례지』는 『속편구례지』를 개정·증보하여 1962년 6월 30일 구례향교에서 유학자들이 상·하편으로 발간한 지역단위 지리지이다. 『속편구례지』와 『속수구례지』에 보이는 화엄사에 관한 내용은 체제와 구성이 동일하여 후자의 것만을 소개한다. 경오등록서(庚午謄錄序, 1870)의 지소청(紙所廳) 항목은 『봉성지』와 동일하며, 영문(營門)과 관아에서 사용하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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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기록원 기록물행정안전부 국가기록원 누리집에서 제공하는 화엄사와 관련된 기록물이다. 약 1천 3백여 건이 확인되며, 크게 일반문서류, 도면류, 사진·필름류, 녹음·동영상류, 카드류, 정부간행물 등으로 분류된다. 1950년대부터 2021년까지 생산된 자료로 국가기록원(본원), 대전 행정기록관, 부산 역사기록관, 성남 나라기록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시청각 기록물로는 1956년 이승만 대통령 내외의 화엄사 시찰 방문, 1961 · 1972 · 1973 · 1975 · 1977 · 1986 · 1991 · 1991 · 1992 · 1993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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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창선생문집-두류산유록「두류산유록(頭流山遊錄)」은 김택술(金澤述, 1884~1954)의 『후창선생문집(後滄先生文集)』 권17에 수록된 기행 일기이다. 그는 자가 종현(鍾賢), 호가 후창(後滄), 본관이 부안이다. 배일당(排日黨)으로 지목되어 여러 차례 고문을 받았으며, 단발령과 창씨개명에 불응하였다. 저서로 『후창선생문집』이 있다. 『후창선생문집』은 본집 31권 15책, 속집 11권 5책으로 서(書), 서(序), 기(記), 제발(題跋), 찬(贊), 애사, 제문, 상량문, 비문, 행장, 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망국의 원인과 고금의 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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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집-화엄사기화엄사기(華嚴寺記)는 『경암집(鏡巖集)』권하에 수록된 화엄사 관련 산문이다. 화엄사의 지리적 위치, 창건, 화엄사에 거처한 승려, 당시에 남아 있던 전각과 유물에 대한 감상 및 소장처에 대한 내용이다. 이는 당시의 전각 및 유물 연혁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화엄사의 초창을 신라 진흥왕 5년(544)으로 기술한 점이 특징이다. 『경암집(鏡巖集)』은 경암 응윤(鏡巖應允, 1743~1804) 스님의 문집이다. 그는 법명이 관식(慣拭)이고, 속성이 민씨(閔氏), 본관이 여흥(驪興)이다. 문집은 1804년(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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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송문고-만일암 중수 모연문만일암 중수 모연문은 『다송문고(茶松文稿)』 권1에 수록되어 있다. 내용은 앞부분에 신라 자장 스님의 창업, 고려 초 연기 스님(즉 도선)의 개산(開山), 2층의 각황전과 화엄석경, 사사자 삼층석탑, 벽암각성비, 화엄사 소속 암자 등 화엄사의 역사에 대한 것이다. 이어서 화엄사 소속 암자 중 하나인 만일암의 중수를 모연하는 취지를 기록하고 있다. 원문 萬日重修募緣文(華嚴寺) 娑婆在成住壞空中。若海漚之起滅。須彌處水火風雨上。似空縷之聚分。理數由而循環。世界以之隱現。猶器世界之不久。況人間物之長存。唯此某處羅代王孫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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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암 각성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은 법명이 각성(覺性), 호가 벽암(碧巖), 속성이 김씨(金氏)이다. 스님의 일생은 화엄사에 건립된 국일도대선사비명(國一都大禪師碑銘)과 백곡 처능(白谷處能, 1617~1680) 스님의 『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에 기재된 행장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각성 스님은 1575년(선조 8) 12월 정해(23일)에 출생하고, 10세에 설묵(雪默)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15세에 보정(寶晶) 스님께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임진왜란 때 해전(海戰)에 참전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항마... -
벽암 각성 비벽암 국일도 대선사 비명은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의 입적 3년 후인 1663년(현종 4) 계묘년 8월에 건립된 벽암 각성의 비로 화엄사 금강문과 성보박물관 앞에 있다. 스님은 법명이 각성(覺性), 법호가 벽암(碧巖), 속성이 김씨(金氏), 충북 보은 사람이다. 비신의 전면에는 전액(篆額), 제명(題名)과 서(序)가 적혀 있고, 후면에는 건립일, 제작에 참여한 재가자와 문도의 명단이 적혀 있다. 전액은 ‘국일도대선사비명(國一都大禪師碑銘)’이고, 예문관직제학 조계원(趙啟遠)이 썼으며, 비신 상단에 가로로 ... -
국일도대선사벽암비명 목판『국일도대선사벽암비명(國一都大禪師碧巖碑銘)』 목판은 1663년(현종 4)에 조선 후기 문인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지은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의 비문을 음각으로 새긴 것이다. ‘사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로 시작되는 목판을 비롯하여 비문의 일부인 3판만 현재 남아 있다. 목판 앞뒤에 모두 판각되어 있고, 마구리는 본래부터 제작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목판의 전체 크기는 세로 33.2cm, 가로 55.0cm 내외이다. 비문을 새긴 것이기에 광곽이나 판심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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