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담 대사행장은 용담 스님의 문인인 혜암 윤장(惠庵玧藏, 생몰년 미상) 스님이 1768년 8월에 찬술한 것으로 『용담집(龍潭集)』에 수록되어 있다. 그 내용은 용담 스님의 행적과 일화, 시, 게송, 유촉(遺囑) 등의 구성이다. 행장에 따르면, 용담 스님은 22세에 화엄사로 가서 상월(霜月) 대사께 참예하였다. 또한 후록(後錄)에 혜암 스님이 흩어져 있던 용담 스님의 시와 게송 백여 수를 한 권으로 모았다는 기록을 통해 『용담집』 편찬에 혜암 스님의 역할이 컸음을 짐작케 한다.
원문
龍潭大師行狀
和尙法諱慥冠。字無懷。龍潭其號。俗姓金氏。南原人也。母曰徐氏。徐夢一龍昇天。因而有娠。以康熙庚辰四月初八日生。骨相靈秀。鋒頴峻銳。九歲入學。目所覽則無遺誦。十五歲前儒業已成。時入翰墨塲。累中日課第。鄕稱奇童。十六先失所怙。泣血三年。觀世無常。深有出籠之志。十九以出家。請于慈親。親知不可强而䚷之。遂投於甘露寺尙洽長老。仍以祝髮。受具於太虛堂就侃大德。鄕黨儒士。聞之歎曰。虎入空林。將有大咆。二十二發足向華嚴寺。初叅霜月大師。大師一見。深器之。服役數年。而二十四遍遊嶺湖。歷叅名師。曰影海洛庵雪峰南岳晦庵虎巖諸大和尙也。禪敎無不臻妙。則到處扣決。聲名大彰。是謂麝過春山。馨香難掩也。行脚旣了。唯以返照爲己業。收筆硯碎石上。在見性菴。讀誦起信。一日夜忽悟諸佛說只是這箇地。神心豁然。黎明諸經信手拈看。則言言果如中夜所悟底也。越三日。夢中神童。以册一凾。書十張。擎授和尙。而書面曰震谷。意其振東方之徵耶。和尙自覺後。益有明徹。宜褰緇帷納來學。而不以得少爲足。愈求前進。湖有冥眞堂守一大師。即月渚之高弟。宗眼明白。見處高峻。言中有響。句裡藏鋒者也。師聞而欲趍謁矣。冥眞亦聆師之風猷。先至師所。師喜曰。適我宿願也。問曰華藏遍一切處。現今天堂地獄。當在何處。一老答曰。懷州牛喫草。益州馬腹脹。又問曰。此是格外相見。實不頓入。更乞一轉語。答曰天下人求醫。灸猪左膊上。師於是覰其粤而服膺之。可謂神機相投也。三十三直入靈源菴。深以遠公十年影不出山之誓爲誓。而手築土窩於庵之東隅。又創一社於庵之西麓。名之曰佳隱。以爲終年宴息之所。而益務克己工夫。噫。劒靈光射菓熟香飄。碩德高士。八表爭趍。可謂海東折床會也。然師恒以自貶爲基故拒。雖膠固。其五里霧市。終難喝散。因衆紛擁。自化登門。可不謂之無爲而成者耶。被人所牽。竟未遂本誓。遍遊於廻門之深源。動樂之道林。智異之諸庵。普開化市。而以拈頌之旨。牢籠龍象。以圓頓之法。掀翻叢林者。二十餘年。其臨坍講法。則聲韻雄浪。說河如懸。言言句句。令人搆取立地。見者聞者。若換骨洗膓焉。而且於經論中。只要明宗。不巧釋文。純尙筌蹄者。或以提接無味譏之。己巳冬。霜月和尙。傳托鉢衣。以前後五侍。多所悟益。辛未春。告徒曰。知命過二。文字工夫。豈不愧㦲。遂作偈一律曰。强吐深懷報衆知。講坍虛弄說玄奇。看經縱許年靑日。念佛偏宜髮白時。生死若非憑聖力。昇沉無計任渠持。況復世間頗閙閙。白雲幽谷有歸思。揭示大衆。仍罷講焉。戊寅夏。門徒復請講受故。再開化塲於臺庵。翌年冬。還撤之。又作一律曰。閱經何歲月。空費鬂邊春。托病知人險。藏蹤厭世紛。谷風時至友。松月自來賔。㝎中知己在。於道喜相親。盖前後退衆。均習定慧者。頗同古人也。師之形儀魁岸。性度泓洋。處事以柔。臨衆以寬。宕無所碍。其卷舒機變。孰能思議耶。雖遊門之伍。未窺其墻。凡僧俗間來謁者。退且唶曰。面倍于耳聞。至乾隆壬午六月二十七日入寂焉。世壽六十三。法臘四十四。臨終時命侍者。寫一句偈曰。先登九品蓮臺上。仰對彌陁舊主人。次手書遺囑云。人生起滅。如雲起長空。元無所實。何可以不實爲實。願道友等。即時闍維云云。門人等一遵遺敎焉。闍維之夜神光周亘於內院洞天。在外者先見。門人軰收五箇舍利於第五齋夕。乃感夢也。分塔於三處。即甘露寺之剃髮處。波根寺之熟遊所。實相寺之入寂地也。又師所詠歌頌若干篇。曾散失之。而今僅得百餘首。刊行焉。然文章乃道人之餘事。凡有請則不經意而信筆揮之。若荊山之人。以玉抵鵲也。故或不中音律。於戯。敦碩神宇。仰不可窺。洶湧法海。俯不可測。實非弱辭所能稱述。而爲傳不朽。略記始末耳。
戊子仲秋日。門人惠庵玧藏謹錄。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번역문
용담 대사 행장(龍潭大師行狀)
화상의 법휘는 조관(慥冠)이요, 자는 무회(無懷)며, 용담(龍潭)은 그의 호이다. 속성은 김씨(金氏)이고, 남원(南原) 사람이다. 어머니는 서씨(徐氏)인데, 서씨가 한 마리 용이 승천하는 꿈을 꾸고 임신하였으며, 강희(康熙) 경진년(1700) 4월 8일에 낳았는데 골상이 신령하고 수승하였으니 창끝처럼 뾰족하고 산봉우리처럼 예리하였다. 9세에 입학하여 눈으로 열람하기만 하면 남김없이 암송하였고, 15세 이전에 유업(儒業)을 이미 완성하였다. 때로 한묵(翰墨)의 장에 들어가 일과제(日課第)에 여러 차례 합격하여 향리에서 기동(奇童)이라 칭하였다. 16세에 먼저 아버지를 잃고는 3년 동안 피눈물을 흘리면서 세상의 무상함을 관찰하고 새장을 벗어날 뜻을 깊이 품었다.
19세에 출가하겠다고 어머니에게 청하자 친지들이 억지로 말릴 수 없어 허락하였다. 결국 감로사(甘露寺) 상흡(尙洽) 장로에게 의탁하고 더불어 삭발하였으며, 태허당(太虛堂) 취간(就侃) 대덕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향당의 유사들은 이 소식을 듣고 “호랑이가 빈 숲에 들어갔으니 장차 크게 포효하겠구나.” 하고 탄식하였다. 22세에 걸음을 나서 화엄사로 향하였고, 처음으로 상월(霜月) 대사를 참예하였는데, 대사가 한번 보고는 깊이 그를 그릇이라 여겼다. 수년을 복역하고는 24세에 영남과 호남을 두루 유행하며 유명한 스님들을 두루 참방하였으니, 말하자면 영해(影海)[1]영해(影海, 1668~1754)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약탄(若坦)이다. 전라도 고흥 분천(粉川) 출신으로 10세에 출가하여 능가사(楞伽寺) 득우 장로(得牛長老)의 제자가 되었다. 17세에 수연(秀演)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이후 수연의 법을 이었다. 송광사(松廣寺)와 능가사(楞伽寺)에서 화엄의 교학을 강설하였다. 저서로 3권의 문집이 있었으나 2권은 없어지고 『영해대사문집(影海大師文集)』 1권만 전한다.ㆍ낙암(洛庵)[2]낙암(洛庵, 1666~1737)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의눌(義訥)이다. ‘낙암(洛巖)’이라고도 하고 능허(凌虛)라고도 하였다. 속성은 박씨(朴氏)로 경상북도 일선군(一善郡) 해평촌(海平村) 출신이다. 12세에 기양(基陽)의 곡대사(谷大寺)로 출가하여 황악산 모운(慕雲)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28세에 용문사(龍門寺) 상봉(霜峰)의 법을 잇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입적 직전에 “유골을 부도에 간직하거나 영정을 안치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제자 유기(有璣) 등이 행장을 짓고, 비는 현풍 유가사(瑜伽寺)에 세웠다.ㆍ설봉(雪峰)[3]설봉(雪峰, 1678~1738)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회정(懷淨)이다. 전라남도 영암 출신이며, 9세에 달마산(達磨山) 희명 장로(熙明長老)의 권유로 입산하여, 16세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그 후 문신(文信)에게 경론(經論)을 배우고 그의 법을 이었다. 청빈한 생활에 여러 경전에 통달하여 남방의 모든 승려들이 그를 선림종주(禪林宗主0라 불렀다. 법을 이은 제자로 각훤(覺喧) 등 16명이 있다. 다비 후 사리 1과와 영주(靈珠) 1매를 얻어 미황사(美黃寺)에 탑을 세웠다. 김진상(金鎭商)이 찬술한 비가 있다.ㆍ남악(南岳)[4]남악(南岳, ?~1732)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태우(泰宇)이다. 전라도 용성(龍城) 출신이며, 청허(淸虛)의 6세손인 추붕(秋鵬)의 법을 이었다. 참판 오광운(吳光運)이 찬한 비문에 의하면, 이덕수(李德壽)와 매우 친하였고, 이덕수는 그를 호남의 종승(宗乘)이라 평하였다. 저서로는 『남앙집(南岳集)』 1권이 있다.ㆍ회암(晦庵)ㆍ호암(虎巖)[5]호암(虎巖, 1687~1748)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체정(體淨)이다. 16세에 출가하여 지안(志安)의 법을 전수받았다. 대흥사 13대종사(大宗師) 중 제10종사이고, 영남의 명찰인 통도사와 해인사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만년에는 강석을 파하고 오직 선정(禪定)만 닦다가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내원통암(內圓通庵)에서 입적하였다. 등 여러 대화상들이었다. 선과 교에 있어서 오묘함에 이르지 못한 것이 없어 이르는 곳마다 건드리기만 하면 툭 터져 명성이 크게 드러났으니, 이것이 사향노루가 봄 산을 지나가면 퍼지는 향기를 막기 어렵다는 것이다.
행각을 마치고 나서는 오직 돌이켜 관조하는 것으로 자기 업을 삼고 붓과 벼루를 거두어 바위에다 박살을 내었다. 견성암(見性菴)에서 지내며 『기신론(起信論)』을 독송하던 어느 날 밤, 모든 부처님의 말씀이 단지 이 경지일 뿐임을 홀연히 깨닫고 신비로운 마음이 활짝 열렸다. 여명이 밝아 올 무렵에 여러 경을 손 가는 대로 잡고 살펴보니, 곧 말씀말씀이 과연 밤중에 깨달은 바와 같았다. 3일 후 꿈속에서 신비한 동자가 한 상자의 책과 열 장의 편지를 화상께 받들어 올렸는데, 그 편지 앞면에 진곡(震谷)이라 쓰여 있었으니, 그가 동방을 진동시킨다는 징조의 의미였을까? 화상은 스스로 깨달은 후에 더욱 명철해져 검은 장막을 추켜올리고 찾아오는 학인을 받아들여야 마땅했으나, 작은 것을 얻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욱 앞으로 나갈 것을 구하였다.
호남에 명진당(冥眞堂) 수일(守一) 대사가 계셨으니, 곧 월저(月渚) 스님의 고족제자로서 종안이 명백하고 견처가 고준하며 말씀에 메아리가 있고 구절 속에 칼을 감춘 자였다. 스님은 이 소문을 듣고 찾아가 뵙고 싶어 하였다. 명진 스님 역시 스님의 소문을 듣고는 먼저 스님의 처소에 이르렀다. 이에 스님이 기뻐하며 “마침 저의 숙원이었습니다.” 하고는 이렇게 물었다.
“화장세계가 모든 곳에 변재하다면 현재 천당과 지옥은 마땅히 어느 곳에 있습니까?”
수일 장로가 대답하였다.
“회주의 소가 풀을 먹었는데, 익주의 말이 배가 터졌구나.”
또 물었다.
“이렇게 격식을 벗어나 서로 만났지만 진실로 단박에 들어가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일전어를 청합니다.”
그러자 대답하였다.
“천하 사람들이 의원을 찾아 돼지 왼쪽 허벅지에다 뜸을 뜨네.”
스님이 이에 그 오의를 간파하고는 가슴으로 복종하였으니, 가히 신비로운 기틀이 서로 투합한 것이라 하겠다. 33세에 곧장 영원암(靈源菴)으로 들어가 십 년 동안 그림자가 산을 벗어나지 않겠다고 했던 원공(遠公)의 맹세로 깊이 맹세하였다. 그리고 암자 동쪽 모퉁이에 손수 흙집을 건축하였고, 또 암자 서쪽 기슭에 사(社)를 하나 창건하고는 그 이름을 가은(佳隱)이라 하였다. 이렇게 죽을 때까지 좌선할 장소로 삼고는 극기의 공부에 더욱 힘썼다.
아! 검이 신령하면 빛이 쏟아져 나오고 과일이 익으면 향기가 날리는 법이라. 석덕과 고사들이 팔도에서 다투어 달려왔으니, 가히 해동의 상다리가 부러지는 회상이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스님은 항상 자신을 낮추는 것으로 기반을 삼았기 때문에 거절하였다. 그렇게 비록 꿈쩍도 하지 않았지만 그 5리에 깔린 안개의 시장을 결국 고함으로 흩어버리기 어려웠다. 이로 인해 대중이 너도나도 옹립하여 저절로 등용문으로 변화했으니, 이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이룩한 자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람들에게 이끌려 결국 본래의 맹세를 완수하지 못하고, 회문산廻門山 심원사(深源寺)와 동락산(動樂山) 도림사(道林寺)와 지리산(智異山)의 여러 암자를 두루 유행하며 교화의 시장을 널리 열었다. 그렇게 염송(拈頌)의 종지로 용상(龍象)들을 우리와 새장에 가두고 원돈(圓頓)의 법으로 총림(叢林)을 확 뒤집어 놓은 것이 20여 년이었다.
그가 단에 자리하여 법을 강설하면 그 소리의 운이 웅장한 파도와 같고 그 설명이 강이 하늘에 매달린 것 같았으며, 한 마디 한 마디 한 구절 한 구절이 사람들로 하여금 설 자리를 만들게 하였기에 본 자 들은 자들이 마치 뼈를 바꾸고 창자를 씻은 듯하였다. 그리고 또 경론 중에서 단지 종지를 밝힐 것만을 요구하고 문장을 해석하는 것에 있어서는 교묘하지 않아 통발과 올가미[6]통발과 올가미(筌蹄) :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를 비유한다.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인 경론의 언구를 비유하는 말이다.만을 숭상하는 자들은 간혹 제접이 무미건조하다고 그를 나무랐다. 기사년(1749) 겨울에 상월 화상이 의발을 전하였는데, 앞뒤로 5년을 시봉하면서 깨달은 바가 많았다. 신미년(1751) 봄에 대중들에게 고하기를 “(상월 화상의) 명을 수행해 2년이 넘게 문자공부만 하였으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는가.” 하고는 결국 율시 한 수를 지었다.
强吐深懷報衆知 깊은 속내를 억지로 토해 대중에게 알리니
講坍虛弄說玄奇 강단에서 헛되이 희롱하며 현묘함과 기이함 설하였네
看經縱許年靑日 경전 보는 일 비록 젊은 날에야 허락되겠지만
念佛偏宜髮白時 백발이 되었을 땐 도리어 염불이 마땅하지
生死若非憑聖力 생사에서 만약 성인의 힘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昇沉無計任渠持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그를 지탱할 방도가 없지
況復世間頗閙閙 하물며 또 세간은 자못 시끌시끌해
白雲幽谷有歸思 흰 구름 그윽한 골짜기로 돌아갈 생각이네
이를 대중에 게시하고는 강의를 그만두었다. 그러다 무인년(1758) 여름에 문도들이 강의를 받고자 다시 청한 까닭에 다시 대암(臺庵)에서 교화의 장을 열었으나 다음해 겨울에 다시 그것을 철회하였다. 그때 또 율시 한 수를 지었다.
閱經何歲月 경전 열람한 것 그 세월 얼마던가
空費鬂邊春 귀밑머리의 청춘만 공연히 낭비했네
托病知人險 험한 인심을 알기에 병을 내세우고
藏蹤厭世紛 세상의 분분함이 싫어 종적을 감춘다
谷風時至友 골짜기 바람은 때맞춰 찾아 주는 벗
松月自來賓 소나무에 달님은 저절로 오는 손님
定中知己在 선정 가운데 지기가 있으니
於道喜相親 도를 기뻐하며 서로 가까이하리라
전후로 대중을 물리고 선정과 지혜를 균등히 익힌 것이 자못 옛사람의 행적과 같았다. 스님은 형체와 위의가 큰 언덕과 같았고, 성품과 도량이 넓은 바다와 같았으며, 부드러움으로 일을 처리하고 관대하게 대중에 임하였으며, 걸리는 바 없이 호탕하였으니, 그 거두고 펴는 기틀의 변화를 누가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겠는가? 비록 그 문하에 노닌 제자들이라 해도 그 담장 안은 엿보질 못하였고, 많은 승려와 속인들이 간간이 찾아와 알현하고는 물러나면서 또 “직접 뵈니 소문보다 배는 더하다.”며 감탄하였다.
건륭 임오년(1762) 6월 27일에 입적하셨으니, 세수는 63세이고, 법랍은 44세였다. 임종할 때 시자에게 명하여 게송 한 구를 받아쓰게 하시며 말씀하셨다.
先登九品蓮臺上 먼저 구품 연화대 위에 올라
仰對彌陁舊主人 옛 주인 아미타불을 우러러뵈리라
그런 다음 손수 유촉을 쓰셨다.
“사람의 삶 일어나고 사라짐이 구름이 허공에서 일어나는 것과 같아 원래 실체라 할 만한 것이 없다. 어찌 실체가 아닌 것을 실체로 여길 수 있겠는가. 도우들에게 바라노니, 즉시 다비하라. …….”
문인들이 그 유교를 한결같이 준수하였다. 다비하던 밤에 신비한 빛이 내원의 골짜기와 하늘에 두루 펼쳐져 밖에 있는 자들이 먼저 보았다. 문인들이 5재를 지내는 밤에 사리 5과를 수습하였으니, 바로 꿈에 감응한 일이었다. 이를 나눠 세 곳에 탑을 세웠으니, 즉 삭발한 곳인 감로사와 오랫동안 노닐던 곳인 파근사와 입적한 곳인 실상사였다. 또 스님께서 읊으신 가송(歌頌) 약간 편이 일찍이 산실되었는데 이제 겨우 백여 수를 모아 간행한다.
그러나 문장은 바로 도인의 여사이다. 무릇 청이 있으면 생각을 거치지 않고 붓 가는 대로 일필휘지하는 것이 마치 형산(荊山)에 사는 사람이 옥으로 까치를 쫓는 것 같았다. 따라서 간혹 음률에 맞지 않는 경우도 있다.
아! 도탑고 명석했던 신우(神宇)는 아무리 우러러도 엿볼 수 없고 세차게 용솟음쳤던 법의 바다는 아무리 굽어보아도 측량할 수 없으니, 진실로 허술한 글재주로 칭술할 바가 아니다. 그러나 전하여 사라지지 않게 하고자 그 시말을 간략히 기술할 따름이다.
무자년(1768) 8월 일에 문인 혜암 윤장(惠庵玧藏)이 삼가 기록하다.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관련주석
- 주석 1 영해(影海, 1668~1754)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약탄(若坦)이다. 전라도 고흥 분천(粉川) 출신으로 10세에 출가하여 능가사(楞伽寺) 득우 장로(得牛長老)의 제자가 되었다. 17세에 수연(秀演)을 찾아가 가르침을 청하고, 이후 수연의 법을 이었다. 송광사(松廣寺)와 능가사(楞伽寺)에서 화엄의 교학을 강설하였다. 저서로 3권의 문집이 있었으나 2권은 없어지고 『영해대사문집(影海大師文集)』 1권만 전한다.
- 주석 2 낙암(洛庵, 1666~1737)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의눌(義訥)이다. ‘낙암(洛巖)’이라고도 하고 능허(凌虛)라고도 하였다. 속성은 박씨(朴氏)로 경상북도 일선군(一善郡) 해평촌(海平村) 출신이다. 12세에 기양(基陽)의 곡대사(谷大寺)로 출가하여 황악산 모운(慕雲)으로부터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28세에 용문사(龍門寺) 상봉(霜峰)의 법을 잇고 후학 양성에 힘썼다. 입적 직전에 “유골을 부도에 간직하거나 영정을 안치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제자 유기(有璣) 등이 행장을 짓고, 비는 현풍 유가사(瑜伽寺)에 세웠다.
- 주석 3 설봉(雪峰, 1678~1738)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회정(懷淨)이다. 전라남도 영암 출신이며, 9세에 달마산(達磨山) 희명 장로(熙明長老)의 권유로 입산하여, 16세에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그 후 문신(文信)에게 경론(經論)을 배우고 그의 법을 이었다. 청빈한 생활에 여러 경전에 통달하여 남방의 모든 승려들이 그를 선림종주(禪林宗主0라 불렀다. 법을 이은 제자로 각훤(覺喧) 등 16명이 있다. 다비 후 사리 1과와 영주(靈珠) 1매를 얻어 미황사(美黃寺)에 탑을 세웠다. 김진상(金鎭商)이 찬술한 비가 있다.
- 주석 4 남악(南岳, ?~1732)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태우(泰宇)이다. 전라도 용성(龍城) 출신이며, 청허(淸虛)의 6세손인 추붕(秋鵬)의 법을 이었다. 참판 오광운(吳光運)이 찬한 비문에 의하면, 이덕수(李德壽)와 매우 친하였고, 이덕수는 그를 호남의 종승(宗乘)이라 평하였다. 저서로는 『남앙집(南岳集)』 1권이 있다.
- 주석 5 호암(虎巖, 1687~1748) : 조선의 승려로 법명은 체정(體淨)이다. 16세에 출가하여 지안(志安)의 법을 전수받았다. 대흥사 13대종사(大宗師) 중 제10종사이고, 영남의 명찰인 통도사와 해인사에 오랫동안 머물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만년에는 강석을 파하고 오직 선정(禪定)만 닦다가 금강산 표훈사(表訓寺) 내원통암(內圓通庵)에서 입적하였다.
- 주석 6 통발과 올가미(筌蹄) : 목적 달성을 위한 수단이나 도구를 비유한다. 즉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인 경론의 언구를 비유하는 말이다.
관련기사
-
조선불교통사-지리산 천은사 용담대사 행장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상편, 조선 영조 38년 조에 수록되어 있다. 조관 용담(慥冠龍潭, 1700~1762) 대사는 19세에 출가하여 22세에 화엄사 상월 대사를 만나 수학하였다. 대사의 행장은 문인 혜암 윤장(惠庵允藏) 스님이 1768년 8월에 찬술하였으며, 『용담집(龍潭集)』에 수록되어 있다. 원문 ○英祖顯孝王(李吟)在位五十二年 (壬午)三十八年(清乾隆二十七年) (備考)智異山泉隱寺龍潭大禪師行狀。(門人惠菴玧藏撰) … 二十二發足向華嚴寺。初叅霜月大師。大師一見深器之。服役數年而...
-
용담당탑용담당탑은 현대에 조성된 탑과 비가 모셔져 있는 승탑원 남쪽 구역의 왼쪽 끝에 자리한 용담 명허 스님의 탑이다. 용담 명허 스님은 2007년 1월 26일 오후 1시 30분, 세수 63세 법랍 38세로 열반하셨다. 용담당탑은 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원형의 돌을 얹어 기단(基壇)을 이승탑원은 화엄사 산문에서 일주문으로 향하는 경사로 왼쪽에 남북방향으로 길게 조성되어 있다. 화엄사에서 배출된 스님이나 중창을 주도한 스님 등 화엄사와 관계가 깊은 스님들의 탑(僧塔, 부도 浮屠)을 모셔놓은 공간으로 여러 승탑이 모여 있다고 해서 ...
더보기 +
관련자료
더보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