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국일도대선사벽암존자진영〉은 1780년(정조 4) 제작된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의 초상화이다. 합천 해인사(海印寺) 국일암(國一庵)에 봉안되었던 것으로, 현재 해인사성보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바탕의 재질은 비단이고, 크기는 세로 122.5㎝, 가로 83.1㎝이다.
화면 왼쪽 상단 붉은색 직사각형 안에 '사국일도대선사벽암존자진상(賜國一 都大禪師碧巖尊者之真相)’이라는 진영의 제목(影題)을 황색 글씨로 기록하였다. 그림 속 각성 스님은 발을 받침대 위에 올려놓고, 오른쪽을 향해 의자에 앉은 모습이다. 갈색 장삼 위로 붉은 바탕에 녹색 줄무늬가 있는 가사를 걸쳤다. 왼손은 불자(拂子)를 들고, 오른손은 무릎 위에 두었다. 의자에는 양 끝에 문양대가 있는 붉은색 법피(法被)를 둘렀다. 배경은 녹색 바탕에 운보문(雲寶紋)으로 장식하고, 바닥에는 붉은색 테두리를 두른 화문석(花紋席)을 깔았다.
화면 왼쪽 하단에는 '성상사년 경자 계동 상원일 회성우국일암실중(聖上四年庚子季冬上院日會成于國一菴室中)', ‘공유홍(工有洪)’, ’별정관(別政寬)‘이 적혀 있다. 배면에는 주서로 범자(梵字)를 적었다.
한편, 경기도 광주 만해기념관에 전시중인 각성스님 진영에는 스님이 하사받은 교지 문서가 함께 기록되어 있다.
벽암존자 영감기
「벽암존자 영감기(碧巖尊者影龕記)」는 호은 유기(好隱有璣, 1707~1785) 스님이 새롭게 제작된 국일암의 각성스님 진영을 본 뒤에 지은 것으로 『호은집(好隱集)』 권4에 수록되어 있다.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의 진영은 일찍이 해인사 국일암에 봉안되어 있어 사람들이 예배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남에 따라 진영이 흐릿해지자 1780년(정조 4) 각성 스님의 오세(五世)인 운파(雲波) 스님의 주도로 진영을 새롭게 제작하여 국일암에 봉안하였다.
벽암존자 영찬
「벽암존자 영찬(碧巖尊者影讃)」은 호은 유기(好隱有璣, 1707~1785) 스님이 영감기와 함께 지은 것으로, 『호은집(好隱集)』 권4에 수록되어 있다. 영찬에 앞서 서문에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의 법맥과 각성 스님의 오세(五世)인 운파(雲波)와 우선(愚善) 스님의 부탁으로 영찬을 쓴다는 찬술 배경을 서술하였다. 이어서 네 개의 ‘이(已)’ 자로 압운하여 영찬을 지었다.
원문
碧巖尊者影龕記
碧巖尊者影龕。峙於伽耶山國一菴。徃於仁廟朝。召見與語。深器之。賜國一都大禪師號。孝廟在邸一見。以爲釋家之棟梁。及登寶位。引入禁苑。問三敎同異後。降御札特問之。至於寵賚滿籝。搢紳諸公。亦皆愛慕。而元公斗杓。具公鳳瑞。交最密。初慈曹氏。夢古鏡而生尊者。歧嶷夙成。蚤樂空門。依於浮休尊者。師事不多年。得禪敎宗脉。受傳來鈯斧。自後名薌騰播。以山頭一橫。服與於兩朝殊遇。此由聖天雨露不擇高下也。菴頟國一以賜號也。奉影㡠者。以久住處也。然而厥龕沉暗。瞻禮者病之。幸於今春。門孫雲波振翼。撤舊龕。抽前十餘赤。[1]赤은 步의 오자인 듯하다. 另餙移㡠。遠而望之。怳如尊者之再生也。系出金氏。法諱覺性。碧巖其號也。其貫閥也。祝具也。寄歸也。歲元也。弟子能白谷所撰行狀中已具矣。今但以雲波改龕之誠。略書揭眉。
碧巖尊者影讃【并小引】
麗末我國太古和尙。入眞丹霞霧山。嗣臨濟宗石屋之法而來。傳之幻菴。幻菴傳之龜谷。龜谷傳之徐登階。徐登階傳之碧松。碧松傳之芙蓉。蓉門出浮休。休門出碧巖尊者。尊者五世。至雲波與愚善矣。一夕要尊者影讃。則愚文雖澀。而重違其請。乃强押四個已字。爰題一章。其詞曰。
畫虎而能及其虓乎。毛而已。
畫人而能及其衷乎。面而已。
今碧巖尊者之影。
能畫其聲德乎。衣帶而已。
愚之讃詞。
亦曷盡其尊者在世遍灑甘露法雨於無限天人之化乎。
難矣。筆路斯塞而已。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번역문
벽암 존자 영감기
벽암(碧巖) 존자[2]벽암(碧巖) 존자 :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자는 징원(澄圓), 속성은 김씨(金氏), 보은 사람.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0세에 화산(華山)의 설묵(雪黙)을 스승으로 섬겨 14세에 승려가 되었다. 부휴(浮休)를 따라 속리산ㆍ금강산ㆍ덕유산ㆍ가야산 등으로 다니면서 경을 공부하였고, 초서ㆍ예서를 잘 썼다. 임진왜란 때에 산중에서 피난하면서도 문난(問難)을 쉬지 않았다. 1593년 부휴를 따라 싸움터에 나가 해전(海戰)에 공을 세웠다. 20여 년 동안 부휴에게서 진수(眞髓)를 체득하였고, 계행이 청정하였으며, 쌍계사ㆍ화엄사ㆍ송광사를 중건하였다. 광해군 때에 요승의 무고로 부휴가 서울로 붙들려 갈 적에 따라갔다가 봉은사에 머물면서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總攝)이 되었다. 인조 때 남한상성을 쌓을 적에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승려들을 거느리고 성 쌓는 일을 감독, 3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보은천교원조국일도 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호를 받았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도 중 수천 명을 모집하여 항마군(降魔軍)이라 하고 북으로 올라가던 도중 화의가 이루어졌으므로 산으로 돌아왔다. 그 뒤 사신으로 일본에 가다가 중도에서 병으로 사퇴하였고, 화엄사에서 나이 86세, 법랍 72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는 『도중결의(圖中決疑)』 1권, 『간화결』 1권, 『석문상의초』 1권 등이 있다. 법제자는 처능(處能)이다.의 영감(影龕)은 가야산(伽耶山) 국일암(國一菴)에 모셔져 있다. 예전에 인조(仁祖, 재위 1623~1649)는 존자를 초대하여 말씀을 나누고 존자를 큰 그릇으로 여겨 국일도 대선사(國一都大禪師)라는 호를 하사하였다. 효종(孝宗, 재위 1649∼1659)은 재위 전 한번 만나 보고 석가의 동량으로 여겼고, 보위에 오른 후 궁궐(禁苑)에 초대하여 삼교(三敎)의 동이(同異)를 물은 후 어찰을 내려 특별히 안부를 물었으며, 광주리에 가득 하사품(寵賚)[3]총뢰(寵賚) : 총애하여 물건을 내려 주다는 뜻이다. 임금의 총애.을 내렸다. 여러 진신(搢紳)[4]진신(搢紳) : 벼슬아치의 총칭.들이 또한 모두 아끼고 앙모하였으니, 원두표(元斗杓)·구봉서(具鳳瑞) 두 분은 존자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처음에 어머니 조씨(曹氏)가 꿈에 오래된 거울을 보고 존자를 낳았다. 영특(歧嶷)[5]기의(歧嶷) : 높게 빼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남을 이르는 말이다.하고 조숙하여 어린 나이에 공문(空門)을 좋아하였다. 부휴(浮休) 존자에 의지하여 스승으로 모신 지 몇 해 되지 않아 선교(禪敎)의 종맥(宗脈)을 얻고 돌부(鈯斧)를 전해 받았다. 이후로 명성이 널리 퍼져 산머리에 으뜸으로 횡행하였다. 두 왕조의 특별한 대우를 받았으니, 이는 성천(聖天)의 우로(雨露)가 고하를 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암자 이름이 국일(國一)인 것은 임금이 내린 시호이기 때문이고, 이곳에 영정(影㡠)을 봉안한 것은 이곳이 존자가 오래 머문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영감(影龕)이 흐릿해져 우러러 예배하는 이들이 안타깝게 여겼다. 다행히 올봄 문손(門孫)인 운파(雲波)가 떨치고 일어나 옛 감실을 철거하고 10여 발짝 앞으로 내어 별도로 그려 영정(影㡠)을 옮기니, 멀리서 바라보면 황홀하게 존자가 다시 살아난 듯하였다. 그 가계는 김씨(金氏)이고, 법휘(法諱)는 각성(覺性)이며, 벽암(碧巖)은 호이다. 그 관향 문벌(貫閥)과 축발하고 구족계를 받은 것, 입적한 것, 연보 등은 제자 백곡 처능(白谷處能)이 찬한 행장 중에 이미 다 갖추어져 있다. 지금은 다만 운파(雲波)가 영감을 개수한 정성을 간략하게 써서 감실 머리에 건다.
벽암 존자 영찬【짧은 서문과 함께】
고려 말 우리나라 태고(太古) 화상이 진단(眞丹) 하무산(霞霧山)에 들어가서 임제종(臨濟宗) 석옥(石屋) 화상의 법을 이어받아 온 후 환암(幻菴)에게 전하고, 환암은 구곡(龜谷)에게, 구곡은 등계(登階)에게, 등계는 벽송(碧松)에게, 벽송은 부용(芙蓉)에게 전하였다. 부용 문하에서 부휴(浮休)가 나왔고, 부휴 문하에서 벽암(碧巖) 존자가 나왔고, 존자의 오세(五世)인 운파(雲波)와 우선(愚善)에 이르렀다. 이들이 어느 날 저녁 존자의 영찬을 부탁한즉, 내 글이 비록 껄끄럽지만 그 청을 어기는 것은 어려운 일이어서 억지로 네 개의 ‘이(已)’ 자로 압운하여 한 장을 지었다. 그 가사는 이러하다.
畫虎而能及其虓乎。毛而已。 호랑이를 그리되 포효하는 모습까지 미칠 수 있는가? 터럭일 뿐이고.
畫人而能及其衷乎。面而已。 사람을 그리되 그 속마음까지 드러낼 수 있는가? 얼굴일 뿐이다.
今碧巖尊者之影。 이제 벽암 존자의 영정에서
能畫其聲德乎。衣帶而已。 그 명성과 덕행을 드러낼 수 있는가? 의대(衣帶)일 뿐이다.
愚之讃詞。 나의 찬사여,
亦曷盡其尊者在世遍灑甘露法雨於無限天人之化乎。 이 또한 어찌 그 존자가 재세하던 때 감로(甘露)의 법우(法雨)를 무한한 천인(天人)에게 두루 뿌리던 교화를 다 드러낼 수 있겠는가?
難矣。筆路斯塞而已。 어렵도다. 붓의 행로가 이에 막힐 뿐이로다.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관련주석
- 주석 1 赤은 步의 오자인 듯하다.
- 주석 2 벽암(碧巖) 존자 :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자는 징원(澄圓), 속성은 김씨(金氏), 보은 사람.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10세에 화산(華山)의 설묵(雪黙)을 스승으로 섬겨 14세에 승려가 되었다. 부휴(浮休)를 따라 속리산ㆍ금강산ㆍ덕유산ㆍ가야산 등으로 다니면서 경을 공부하였고, 초서ㆍ예서를 잘 썼다. 임진왜란 때에 산중에서 피난하면서도 문난(問難)을 쉬지 않았다. 1593년 부휴를 따라 싸움터에 나가 해전(海戰)에 공을 세웠다. 20여 년 동안 부휴에게서 진수(眞髓)를 체득하였고, 계행이 청정하였으며, 쌍계사ㆍ화엄사ㆍ송광사를 중건하였다. 광해군 때에 요승의 무고로 부휴가 서울로 붙들려 갈 적에 따라갔다가 봉은사에 머물면서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總攝)이 되었다. 인조 때 남한상성을 쌓을 적에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승려들을 거느리고 성 쌓는 일을 감독, 3년 만에 공사를 마쳤다. 보은천교원조국일도 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호를 받았다.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 파천했다는 소식을 듣고 남도 중 수천 명을 모집하여 항마군(降魔軍)이라 하고 북으로 올라가던 도중 화의가 이루어졌으므로 산으로 돌아왔다. 그 뒤 사신으로 일본에 가다가 중도에서 병으로 사퇴하였고, 화엄사에서 나이 86세, 법랍 72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는 『도중결의(圖中決疑)』 1권, 『간화결』 1권, 『석문상의초』 1권 등이 있다. 법제자는 처능(處能)이다.
- 주석 3 총뢰(寵賚) : 총애하여 물건을 내려 주다는 뜻이다. 임금의 총애.
- 주석 4 진신(搢紳) : 벼슬아치의 총칭.
- 주석 5 기의(歧嶷) : 높게 빼어났다는 뜻으로 어릴 때부터 재능이 뛰어남을 이르는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