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사보은천교국일도대선사행장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은 법명이 각성(覺性), 호가 벽암(碧巖), 속성이 김씨(金氏)이다. 각성 스님의 행장은 백곡 처능(白谷處能, 1617~1680) 스님이 찬술하였으며, 『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에 수록되어 있다. 스님의 몰년과 구족계를 받은 연도에 대해서는 행장과 화엄사 금강문 앞에 있는 「국일도대선사비명(國一都大禪師碑銘)」(1663) 사이에 약간의 차이가 있고, 구족계를 받은 시점이 다르므로 법랍에도 차이가 있다. 자세한 사항은 아래의 〈표1〉 참조.
〈표1〉 벽암 각성의 행장과 비명 내용 비교
구족계몰년법랍
행장十五薙髢受具於寶晶大德庚子一月癸未(27일)昧爽夏臘七十一
비명十四落髮受具于寶晶老師庚子正月十二日(戊辰)禪臘七十二
원문
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行狀 和上諱覺性。字澄圓。自號碧嵓。生三山金氏。先世有簪組。左官于湖西。遂家三山。十歲隨雪默長老出家。十五薙髢受具於寶晶大德。爲人短矬。氣象嶷欝。顏容粹美。三十九齒。目光外射。人皆顒若。初母曺媼。夢一古鏡。墮入懷中。覺而有妊。以萬曆乙亥十二月丁亥誕師焉。師旣早從法戒。誦習經律。究其旨無蘊餘。時浮休大師。闡化於俗離。聞師爲法器。携入室。傳其髓。執筳者趨附。戊戌休移伽耶。師從之。天將李大人宗城。受命封倭。便道遊海印寺。覩師骨 相魁偉。謂休曰。伯樂之厩多駿駒。禪師侍者。可謂驥之子也。松雲政大師。甞以書抵休。賀其得嗣。無何休赴頭流。師亦摳衣。有一宰官訪休。扣證禪旨。令門徒各賦偈句。試其才否。時雲谷冲徽。逍遙太能。松月應祥。號爲三傑。同在會中。師偈先成一聯云。簾前瘦影僧看月。窓外淸香鳥拂梅。三傑皆束杠而止。宰官歎美之。其詩尖新。大率類是。師又留意墳典。自二敎百家。以至諸史稗記。靡不遍閱。又善草隷。筆勢遵媚。有右軍法。先是休會下一僧。遘疫疾暴亡。人以傳染忌之。師改衩衣。腰其屍。窆于礨嵌中。屬夜無月。熊虎嘷呶。未甞悸愳也。一日辭休。棲壽國菴。塊然入㝎。若承蜩者。浹旬日有澗鶂飛來。含將頂綿而去。又有毒虺從地出。噆一指無損傷。光海時。休爲狂僧所誣。拿至王獄。師亦坐是。雖在縲絏。怡然不撓。理官以大佛小佛稱之。翌日光海鞫治掖庭。目其道氣崚。言辭誙讜。心異之。解其纆繳。咨訪良久。光海甚歡。出錦襖二襲。分賜之令還。傾城駿奔。頂謁者無數。休入寂。衆請繼踵。師撝謙不居。衆志彌䔍。迺開堂於七佛蘭若玄侶臻萃。師從休入室者。殆三十載。自營厨務。凡所以執巾挈盂。不辭勞苦。有所疑曀。咨諏匪懈。旣傳秘印。大振臨濟宗旨。戊午秌。遷神興。衆盈七百。師煩於己事。宵遁。邁入太白山箭川洞。鞱光。越明年。轉入五臺山。結冬于上院菴。維時光海。設齋於淸溪蘭若。遣宮使。迓師說法。授金襴袈裟碧繡長衫。仁祖大王。踐祚之明年甲子。朝廷城南漢山。徵師爲八方都摠攝。役訖。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號。又錫衣鉢。因遣中使。出內醞侑之。師膜拜曰。貧道持不飮戒。豈甘醨哉。苐聖德泱泱。敢不一歃。中使義之。自是功德並著。聲振遐邇。爭名者疾詬。侜張興謗。欲置於死地。師無恚色。受訕如薺。壬申修葺華嚴寺。薦貨者塡衢。藹爲䕺林。丙子變。募義僧三千。號降魔軍。師爲僧大將。與湖南官軍。爲掎角之勢。仗義助援。仁祖聞而嘉之。兵罷還智異。因學者疑爭。述圖中決疑。叅商禪旨等語。立論甚當。析理尤的。其所以激揚者盖夥。庚辰春。移住雙溪精舍。增舊制而新之。八月相國元公斗杓。按節湖南。奏聞授師以紏正都摠攝印綬。俾住赤裳山城。緇徒訴干按廉。請移松廣寺爲敎魁。明年壬午。辭歸海印。厥六月朝廷徵師。充日本使价。師乘馹如京。謝病免。詣白雲山。隱居上仙菴。明年之寶盖山。大開法席。會關西觀察使具公鳳瑞。欽師道譽。迎入竗香山。孝宗大王。潜邸時。師謁於安陵逆旅。譚覈華嚴宗要。孝宗大加稱賞。及登寶位謂延城君李公時昉曰。老今無恙否。問之數四。其綸恩又若是。丙戌秋。返笻於俗離。與孤閑熈彥老師。卜隣徜徉。旣彥遷化。師宴晦于華嚴寺。弄餘年師平生能苦坐。善誨人。衲子請益。令叅箇無字。談論甚口。大夫無敢當其鋒者。待人恭勤。無驕佚傲放。事俵孤窮。二時粥飯。貧乞者盈門。烏鳶常隨。手中與食。見漁佃者。誥以殺戒。則至有焚網而懺謝者。至己亥十二月庚午。示微疾。越庚子一月。癸未昧爽。集衆告訣。衆哀噎擁。俠丈室。索伽陁。師拈拂揮令遠立。率爾題一偈曰。拈頌三十篇。契經八萬偈。何須打葛滕。可笑多事在。即擲筆而坐蛻。春秋八十六夏臘七十一。涓吉日。遂茶毗于寺之東嶺。會葬者萬餘。其喪龕之儀。奠羞之盛。古未之有。方下火。有白氣三道。亘空而西。俄而祥飊倐起。林麓變色。畏焦悲噪。越三日。門人收靈骨。以香湯薰沐之懇。禱于般若峯金剛窟。獲舍利三粒。皆白色。於是分靈骨。建方墳者凡四處。智異之華嚴。曺溪之松廣。伽耶之海印。俗離之法住云。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번역문
사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행장(賜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行狀)[1]백곡 처능스님이 스승인 벽암 각성스님을 위해 지은 행장이다. 스님의 이름은 각성(覺性), 자(字)는 징원(澄圓), 자호(自號)는 벽암(碧嵓)이며, 삼산(三山) 김씨(金氏)[2]삼산(三山) 김씨(金氏) : 현재에 삼산 김씨가 없으며, 삼산이라는 지명은 충청도에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각성 스님의 본관이 김해(金海)라고 된 곳도 있다.의 후손이다. 선세에 관직을 지낸 사람이 있었는데, 충청도에 좌천되어 왔다가 마침내 삼산에 자리를 잡았다. 10세에 설묵(雪黙) 장로를 따라 출가하고 15세에 머리 깎고 보정(寶晶) 대덕 스님에게 구족계(具足戒)[3]구족계(具足戒) : 비구나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을 말한다.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가 있다. 구족계를 받았다고 함은 정식으로 스님이 되었다는 뜻이다.를 받았다. 스님은 키가 작았으나 기상은 의젓하고 단정하였으며 외모는 수려하였다. 치아는 서른아홉 개, 눈빛이 강렬하여 사람들 모두 스님에게 공손하였다. 어머니 조씨(曺氏)는 오래된 거울 하나가 떨어져 품속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었는데, 꿈을 깬 뒤 아이를 가져 만력(萬曆) 을해년(1575, 선조 8) 12월 23일에 스님을 낳았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계율을 지키고 불경을 외우고 익히면서 그 의미를 남김없이 철저히 연구하였다. 당시 부휴 선수(浮休善修, 1543~1615) 대사가 속리산에서 불법을 널리 펼치고 있었다. 스님이 법기(法器, 불법을 깨우칠 만한 사람)라는 소문을 듣고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불법의 진수를 전하자, 동문수학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무술년(1598, 선조 31)에 부휴 대사가 가야산으로 옮겨 가자 스님도 따라갔다. 중국에서 온 장군 이종성(李宗城)이 명을 받아 일본의 풍신수길(豊臣秀吉)을 일본 국왕으로 봉하기 위해 내려가다가 해인사에 들렀을 때 스님의 뛰어난 골상(骨相)을 보고 부휴 대사에게, “백락(伯樂)의 마굿간에 있는 준마(駿馬) 중에 뛰어난 말이 많습니다. 선사(부휴)의 시자는 천리마라고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송운 유정(松雲惟政, 1544~1610) 스님도 부휴 대사에게 서신을 보내어 후계자를 얻은 것을 축하하였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부휴 대사가 지리산으로 갈 때에 스님이 역시 부휴 대사를 모시고 갔다. 어떤 관리가 부휴 대사를 방문하여 참선의 의미를 묻다가 제자들에게 각각 시를 짓게 하여 재주가 있는지의 여부를 시험하였다. 당시에는 운곡 충휘(雲谷冲徽)ㆍ소요 태능(逍遙太能)ㆍ송월 응상(松月應祥)을 삼걸(三傑)이라고 불렀다. 모두 함께 그 자리에 있었는데 스님이 게송 첫 번째 구절을 가장 먼저 지었다. 簾前瘦影僧看月   주렴 앞의 여윈 그림자 스님이 달구경하는 것이요 窓外淸香鳥拂梅   창밖 싱그러운 향기는 새가 매화 가지 스친 것이라. 그러자 삼걸이 다 붓을 놓고 게송 짓기를 중단하였으며 관리도 칭찬하였다. 스님이 지은 시는 신선하고 기이하며, 나머지 시들도 모두 그와 같았다. 스님은 또 삼분오전(三墳五典, 중국의 고전을 말함)에 뜻을 두어 유교와 도교 그리고 제자백가로부터 여러 가지 역사서와 패관잡기(稗官雜記)에 이르기까지 두루 읽어 보지 않은 책이 없었다. 또 초서와 예서를 잘 썼으며 필세(筆勢)가 힘차고 아름다워 서성(書聖)이라고 일컫는 왕우군(王右軍, 즉 王羲之)의 필법을 갖추고 있었다. 이보다 앞서 부휴 대사의 모임에 어떤 승려가 병에 걸려 갑자기 사망하였다. 사람들은 모두 전염병이라 하여 꺼렸지마는 스님은 차의(衩衣)[4]차의(衩衣) : 일반 남자들이 입는 평상복이다.로 갈아입고 시체를 허리에 차고 웅덩이에 묻어 주었다. 마침 밤이라 달빛도 없고 곰과 호랑이가 울부짖었지만 두려워하지 않았다. 어느 날 스님은 부휴 대사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수국암(壽國菴)에 머물렀다. 돌덩어리마냥 꼼짝 않고 선정(禪定)에 들어가 온정신을 쏟아부었다. 열흘이 지나자 물새가 날아와 정수리의 솜을 물고 가고, 또 독사가 땅에서 나와 손가락 하나를 깨물었으나 상처가 나지 않았다. 광해군(光海君, 재위 1608~1623) 때에 부휴 대사가 어떤 미친 중의 무고(誣告)로 감옥에 가게 되었는데 스님도 또한 그 사건에 연루되었다. 감옥에 있더라도 느긋하게 지내며 동요하지 않자 법을 집행하는 관리가 ‘큰 부처님’, ‘작은 부처님’이라고 불렀다. 다음날 광해군이 궁궐에서 직접 심문하였는데, 두 스님의 도의 기운이 뛰어나고 언사(言辭)가 곧고 바른 것을 보고는 마음속으로 기이하게 여겼다. 결박을 풀고 한참 동안 질문을 주고받았다. 광해군이 매우 기뻐하면서 비단 가사 두 벌을 가져오게 하여 나누어 주고는 돌아가게 하자, 온 성의 사람들이 모두 달려왔으며 절을 하는 사람도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부휴 대사가 세상을 떠나자 많은 사람들이 뒤를 잇기를 요청하였으나 스님은 겸손히 사양하였다. 많은 사람들의 뜻이 더욱 간절하였으므로 칠불암(七佛菴)에서 설법을 하였는데 뛰어난 스님들이 모여들었다. 스님은 부휴 대사를 모시어 거의 30년 동안 공부하면서 직접 주방일을 하고 스승을 위해 수건을 드리고 발우를 들고 다니면서 고생을 마다하지 않았다. 의문점이 있으면 질문을 해서 해답을 얻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스승의 학문을 전해 받고 임제종의 교리를 크게 떨쳤다. 무오년(1618, 광해군 10) 가을에 신흥사(神興寺)로 옮기자 7백 명의 많은 사람이 자리를 메웠다. 스님은 자신에게 일어나는 일을 번거롭게 여겨서 밤에 달아나 태백산 전천동(箭川洞)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듬해에 다시 오대산으로 자리를 옮겨 상원암(上院菴)에서 겨울 수행인 동안거(冬安居)를 하였다. 당시 광해군은 청계난야(淸溪蘭若)[5]청계난야(淸溪蘭若) : 청계사를 가리킨다. 난야는 아란야(阿蘭若)의 줄임말로 사찰을 의미한다. 두보의 시 〈알진제사선사(謁眞諦寺禪師)〉에 “蘭若山高處”라는 구절이 있다.에서 재(齋)를 올리면서 궁중의 관리를 보내어 스님을 영접하여 설법을 하도록 하고 금란가사(金襴袈裟)와 벽수장삼(碧繡長衫)을 보냈다. 인조 대왕(仁祖大王, 재위 1623~1649)이 왕위에 오른 이듬해인 갑자년(1624, 인조 2)에 조정에서 남한산에 성을 쌓을 때 스님을 불러 팔방도총섭(八方都摠攝, 전국 승려 총대장)으로 임명하였다. 공사를 마친 뒤에는 보은천교원조국일도대선사(報恩闡敎圓照國一都大禪師)라는 칭호를 하사하였다. 또 의발을 내리고 중사(中使)[6]중사(中使) : 왕명을 전달하는 궁중 내시이다.를 파견하여 술을 보내고 위로하였다. 스님이 무릎을 꿇어 절하고, “빈도(貧道)는 불음계(不飮戒)를 지키고 있습니다. 하지만 임금님의 은덕이 넓고 크니 어찌 감히 한 잔 마시지 못하겠습니까?”라고 하자, 중사가 의롭게 여겼다. 이때부터 공적과 덕행이 함께 드러나고 명성이 원근에 떨치게 되었다. 명성을 다투는 자들이 스님을 미워하여 비방을 일으켜서 사지(死地)로 스님을 몰려고 하였으나 스님은 성내는 기색이 없이 그 비방 받기를 냉이처럼 달게 여겼다.[7]냉이처럼 달게 여겼다 : 『시경』 「패풍(邶風)」 〈곡풍(谷風)〉에서 “누가 씀바귀를 쓰다고 했나, 내게는 냉이처럼 달다.(誰謂荼苦。 其甘如薺。)”라고 하였다. 어떤 고생도 감수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임신년(1632, 인조 10)에 화엄사(華嚴寺)를 수리하자 돈을 내는 사람들이 거리를 메웠으며 성대하게 총림(叢林)[8]총림(叢林) : 승려들의 참선 수행 전문 도량인 선원(禪院),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 교육기관인 율원(律院) 등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한다. 현재 송광사ㆍ수덕사ㆍ통도사ㆍ해인사ㆍ백양사 등 국내에 다섯 곳이 있다.이 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의승(義僧) 3천 명을 모집하여 항마군(降魔軍)이라 부르고 스님은 승군 대장이 되었다. 호남의 관군(官軍)과 더불어 도와주는 형세를 이루어 정의를 외치면서 나라의 어려움을 도왔다. 인조는 소식을 듣고 가상하게 여겼다. 난리가 끝나자 지리산으로 돌아갔다. 학자들의 의문과 논쟁을 기본으로 해서 『도중결의(圖中決疑)』와 『참상선지(參商禪旨)』 등의 글을 지었다. 논리를 세운 것이 매우 타당하고 이치를 분석함이 매우 적절하여 사람들의 공부에 자극을 준 것이 매우 많았다. 경진년(1640, 인조 18) 봄에 쌍계사로 거처를 옮기어 옛 체제를 보태기도 하고 새로이 만들기도 하였다. 8월에 재상 원두표(元斗杓)가 호남 안절사(按節使)로 부임하였다. 조정에 보고하여 스님에게 규정도총섭(糾正都摠攝)의 인수(印綬)를 내리고 적상산성(赤裳山城)에 머물게 하니, 스님들이 안렴사(按廉使)에게 하소연하여 스님은 송광사(松廣寺)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이듬해인 임오년(1642, 인조 20)에 스님은 해인사로 돌아왔으며 6월에 조정에서 스님을 불러 일본으로 가는 사신으로 넣자 스님은 말을 타고 서울로 가서 병이 있다고 하여 사신 행차를 면하게 되었다. 백운산(白雲山)으로 가서 상선암(上仙庵)에서 은거를 하였다. 이듬해 스님은 보개산(寶蓋山)으로 가서 법회를 크게 열었다. 마침 관서 관찰사 구봉서(具鳳瑞)가 스님의 학식과 명성을 흠모하여 묘향산으로 맞아들였다. 효종 대왕(孝宗大王)이 왕세자로 있을 때 스님은 안릉(安陵)의 여관에서 인사를 하면서 화엄종의 핵심을 설명하였는데 효종(당시는 왕세자)이 크게 칭찬하였다. 나중에 왕위에 오르자 연성군(延城君) 이시방(李時昉)에게 “각성(覺性) 노선사는 별 탈이 없느냐?”라고 하면서 서너 차례 물었으니, 스님께서 효종에게 받은 은혜가 이와 같았다. 병술년(1646, 인조 24) 가을에 속리산으로 가서 고한 희언(孤閑熙彦) 노사(老師)[9]고한 희언(孤閑熙彦, 1561∼1647) : 부휴 선수의 제자이다.와 이웃해 살면서 왕래하였다. 희언 스님이 입적하자 스님은 화엄사에서 조용히 불법에 정진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스님은 한평생 동안 좌선을 열심히 하였으며 사람들을 가르침에 뛰어났다. 스님들이 불법 수행에 도움이 될 만한 것을 요청하면 그들로 하여금 ‘무(無)’ 자를 깊이 연구하게 하였다. 담론(談論)에도 매우 뛰어나 사대부도 스님의 날카로운 말솜씨를 감당하지 못하였다. 스님은 사람을 대할 때는 공손하고 정성스러웠으며 교만하거나 방자한 일이 없었으며, 외롭고 곤궁한 이들을 도와주려고 노력하였다. 이시죽반(二時粥飯)[10]이시죽반(二時粥飯) : 스님들이 옛날에 아침에는 죽, 낮에는 밥으로 하루 두 끼만 먹었음을 말한다. 여기서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을 뜻한다.하기 위해 찾아온 가난한 사람들이 문에 가득하였다. 까마귀나 솔개가 항상 따라다니므로 손수 음식을 주었다. 물고기 잡는 이나 사냥꾼을 보면 살생을 해서는 안 된다고 타이르니, 어망을 불태우고 참회하는 사람도 있었다. 기해년(1659, 효종 10) 12월 경오일[11]경오일 : 1659년 12월에 경오일은 없다. 경오일은 1659년 11월 13일, 또는 1660년 1월 14일이다.에 스님이 가벼운 병세를 보이다가 이듬해인 경자년(1660, 현종 원년) 1월 27일 새벽에 승려들을 불러 영원한 이별을 알리자, 승려들은 슬퍼 흐느끼면서 장실(丈室)로 모시고 들어가 게송을 청하였다. 스님은 불자(拂子)를 들고 휘두르면서 승려들을 멀찌감치 서 있도록 한 뒤에 게송 한 구절을 지었다. 拈頌三十篇   염송 삼십 편과 契經八萬偈   계경 팔만 게는 何須打葛滕   무엇하러 언어 문자로 분별하는가? 可笑多事在   일만 많이 벌여 가소롭구나. 그리고는 즉시 붓을 던지고 앉아서 열반하시니, 나이는 86세이고 하랍(夏臘)은 71년이었다. 길일을 택해 절의 동쪽 고개에서 다비를 하였는데, 장례식에 모여든 사람이 만여 명이나 되었다. 사리를 안치하는 의식과 제사에 올린 음식의 성대함은 예전에도 없었다. 화장하기 위해 불을 붙이자 세 갈래 흰 기운이 허공에 뻗치더니 서쪽으로 갔다. 조금 있더니 상서로운 바람이 갑자기 불어오고 숲은 모습이 변하더니 슬퍼서 우는 듯하였다. 삼 일이 지난 뒤에 제자들이 영골(靈骨)을 수습하였다. 향탕(香湯)으로 목욕시키는 간절한 정성으로 반야봉(般若峯) 금강굴(金剛窟)에서 기도를 올린 덕분이었다. 사리 세 알을 획득하였으니 모두 하얀색이었다. 이에 영골을 나누어 네 곳에 불탑을 세웠다. 지리산 화엄사, 조계산 송광사, 가야산 해인사, 속리산 법주사이다.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관련주석
  • 주석 1 백곡 처능스님이 스승인 벽암 각성스님을 위해 지은 행장이다.
  • 주석 2 삼산(三山) 김씨(金氏) : 현재에 삼산 김씨가 없으며, 삼산이라는 지명은 충청도에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각성 스님의 본관이 김해(金海)라고 된 곳도 있다.
  • 주석 3 구족계(具足戒) : 비구나 비구니가 지켜야 할 계율을 말한다.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가 있다. 구족계를 받았다고 함은 정식으로 스님이 되었다는 뜻이다.
  • 주석 4 차의(衩衣) : 일반 남자들이 입는 평상복이다.
  • 주석 5 청계난야(淸溪蘭若) : 청계사를 가리킨다. 난야는 아란야(阿蘭若)의 줄임말로 사찰을 의미한다. 두보의 시 〈알진제사선사(謁眞諦寺禪師)〉에 “蘭若山高處”라는 구절이 있다.
  • 주석 6 중사(中使) : 왕명을 전달하는 궁중 내시이다.
  • 주석 7 냉이처럼 달게 여겼다 : 『시경』 「패풍(邶風)」 〈곡풍(谷風)〉에서 “누가 씀바귀를 쓰다고 했나, 내게는 냉이처럼 달다.(誰謂荼苦。 其甘如薺。)”라고 하였다. 어떤 고생도 감수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 주석 8 총림(叢林) : 승려들의 참선 수행 전문 도량인 선원(禪院), 경전 교육기관인 강원(講院), 계율 전문 교육기관인 율원(律院) 등을 모두 갖춘 사찰을 말한다. 현재 송광사ㆍ수덕사ㆍ통도사ㆍ해인사ㆍ백양사 등 국내에 다섯 곳이 있다.
  • 주석 9 고한 희언(孤閑熙彦, 1561∼1647) : 부휴 선수의 제자이다.
  • 주석 10 이시죽반(二時粥飯) : 스님들이 옛날에 아침에는 죽, 낮에는 밥으로 하루 두 끼만 먹었음을 말한다. 여기서는 당시 가난한 사람들의 음식을 뜻한다.
  • 주석 11 경오일 : 1659년 12월에 경오일은 없다. 경오일은 1659년 11월 13일, 또는 1660년 1월 14일이다.

관련기사

지리정보

    • 내용
  • 위로
  • 불국토
    문화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