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허 휴정(淸虛休靜, 1520~1604) 스님은 법명이 휴정(休靜), 법호가 청허(淸虛)·서산(西山), 자가 현응(玄應), 속성은 최씨(崔氏)이다. 과거에 낙방한 뒤 지리산의 여러 사찰에 기거하면서 불법을 공부하다가 1540년(중종 35) 수계사(授戒師) 일선(一禪), 증계사(證戒師) 석희(釋熙)·육공(六空)·각원(覺圓), 전법사(傳法師) 영관(靈觀)에게 계(戒)를 받았다. 1552년(명종 7) 승과(僧科)에 급제하였고, 이후 대선(大選)을 거쳐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가 되었다. 1556년 37세에 선교양종판사직에서 물러나 묘향산으로 떠났다. 1589년(선조 22)에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받아 투옥되었다가 무죄로 석방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승군을 순안 법흥사(法興寺)에 집결시켜 명군(明軍)과 함께 평양을 탈환하였다. 그 공적으로 선조가 휴정을 팔도선교도총섭(八道禪敎都摠攝)으로 삼았으나 그는 연로함을 이유로 제자 유정(惟政)에게 이를 물려주었다.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에 ‘팔도도총섭은 휴정과 같이 도력이 깊고 덕망이 있는 승려가 맡았다’는 서술에서도 스님의 명망을 살필 수 있다.
서산대사는 선조가 한양으로 환도할 때 어가를 호위하였고, 이로써 ‘국일도 대선사 선교도총섭 부종수교 보제등계존자(國一都大禪師禪敎都摠攝扶宗樹敎普濟登階尊者)’의 칭호와 정2품 당상관 위를 하사받았다. 1604년 1월 묘향산에서 세수 85세, 법랍 67세로 입적하였다. 묘향산 안심사(安心寺)와 금강산 유점사(楡岾寺)에 부도(浮屠)가 있고, 해남 표충사(表忠祠)와 밀양 표충사, 묘향산의 수충사(酬忠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청허당집(淸虛堂集)』이 있다. 서문은 명문(名文)과 명필(名筆)로 유명한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찬술하였다. 『청허당집』 권2에는 휴정스님이 해질녘 화엄사를 지나며 바라 본 풍경을 읊은 「화암사를 지나며(過華嵒寺)」 시가 수록되어 있다.
화엄사에서 매년 3월 3일인 삼짇날마다 역대 조사(祖師)에게 꽃을 갖추고 헌다(獻茶)하는 의식을 위해 편찬한 『조사례(祖師禮)』의 ‘지리산 다섯 분의 위대하고 성스러운 스님(五大聖師)’ 중 한 분으로 서산대사가 보인다. 또한 화엄사 영전에 대사의 진영이 봉안되어 있는데, 그 제목(影題)은 ‘전등 호법 제세 청허당 서산대사(傳燈護法濟世淸虛堂西山大師)’이다. 화엄사 성보박물관 수장고에 서산대사의 가사와 발우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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