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광양군 옥룡면 추산리 옥룡사 터에 있던 신라말의 선승 선각국사 도선(先覺國師 道詵, 827~898)의 비이다. 최유청(崔惟淸, 1093~1174)이 짓고 정서(鄭敍, 생몰년 미상)가 써서 전면은 처실(處實)이 후면은 정충(正忠)이 새겨 1173년에 세웠다. 1150년(의종 4)에 비문을 짓기 시작해서 비문은 선각국사가 영암에서 모친의 영이로 태어나 출가하여 화엄사에서 수학하며 대의에 통달하고 혜철대사에게 나아가 배우고 여러 선지식을 찾아다니다 옥룡사를 중수하고 정진하기를 35년 동안 하여 수백명의 제자를 길러냈으며 헌강왕의 초청으로 경주에 갔다가 옥룡사에 돌아와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 그리고 입적 후 박인범에게 비문을 짓도록 했으나 비를 세우지 못한 것과 음양오행술을 연마한 것, 왕건의 부친 왕융을 만나 앞으로 태어날 왕건이 왕이 될 것을 예언한 것, 고려조에 들어 법계를 추증하고 숙종은 왕사로, 인종은 국사로 추봉하고 의종은 비를 세우도록 하였음을 기술하였다. 음기에는 1150년에 비석을 새겼으나 국청사에 방치되어 있던 것을 국사의 법손의 주청으로 의종의 재가를 얻어 비를 세우기 시작하여 1172년(명종 2)에 비를 세우고 1173년(명종 3)에 최유청이 음기를 지어 새겼음을 서술하고 당시의 문손 10여 명과 법손들이 유지하는 4개 사찰을 열거하였다. 오래 전의 인물을 기리는 비를 세우는 과정의 번거로움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출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국립문화재연구원
원문
海東白雞山玉龍寺贈諡先覺國師碑銘幷序
翊聖同德功臣守大尉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集賢殿大學士判尙書刑部事監修國事上柱國臣崔惟淸奉宣撰
朝散大夫尙書禮部侍郎翰林侍讀學士知制誥賜紫金魚袋臣鄭叙奉宣書
上嗣位之四年十月辛酉詔臣惟淸曰惟先覺國師道德茂盛於國家功業最深我祖宗累加封贈所以致崇極於大師其盛德大業未文傳之朕有恧焉仁考旣命汝以撰述其敬之哉臣聞命惶悸退理其藁得其事實之詳者迺序次而紀之師諱道詵俗姓金氏新羅國靈巖人也其世系父祖史失之或云是太宗大王之庶孽孫也母姜氏夢人遺明珠一顆使呑之遂有娠彌月不近葷腥唯以持經念佛爲事旣乳育夐異凡兒雖在提孩於嬉戲啼泣之間其意有若敬畏佛乘之爲者父母知其必爲法器心許出家年至十五頴悟夙成兼解技藝遂祝髮隷月遊山華嚴寺讀習大經不閱歲已通大義文殊之妙智普賢之玄門皆契入無遺學徒百千咸所駭眼以爲神聰至文聖王八年年二十矣忽自念曰大丈夫當離法自靜安能兀兀守文字間耶于時惠徹大師傳密印於西堂智藏禪師開堂演說於桐裡山求益者多歸之師迺摳衣禪門請爲弟子大師嘉其聰敏接以至誠凡所謂無說之說無法之法虛中授受廓爾超悟年二十三受具戒於惠徹大師旣達了義遊無定所躡烟霞臨泉石尋幽逐勝未甞怠息或於雲峯山上穿洞安禪或於太伯巖前結茅坐夏名稱普聞寰海尊其道德而心忻伏之迹須多然非要者不錄曦陽縣白鷄山有古寺曰玉龍師遊歷至此愛其幽勝改葺堂宇洒然有終焉之志宴坐忘言三十五年羊肉引蟻四方雲趍學者執巾匜奉杖屨爲弟子者常數百人根機差殊一雨普潤目擊神授虛往實歸獻康王敬其高德遣使奉迎一見大悅留止禁中每以玄言妙道開發君心未幾不樂京輦懇請還歸本寺忽一日召弟子曰吾將行矣夫乘緣而來緣盡則去理之常也何足久居此乎奄然而寂時大唐光化元年三月十日也享年七十二四衆號泣如慕如癡遂遷座立塔于寺之北岡遵遺命也孝恭王聞之悼歎特贈諡曰了空禪師名塔曰證聖慧燈門人洪寂等懼先師之景行不傳啣涕奉表乞爲紀述王迺命瑞書學士朴仁範爲碑文而竟未鐫于石始師之未卜玉龍也於智異山甌嶺置庵止息有異人來謁座下啓師云弟子幽棲物外近數百歲矣緣有小技可奉尊師儻不以賤術見鄙他日於南海汀邊當有所授此亦大菩薩救世度人之法也囙忽不見師奇之尋往所期之處果遇其人聚沙爲山川順逆之勢示之顧視則其人已無矣其地在今求禮縣界土人稱爲沙圖村云師自是豁然益硏陰陽五行之術雖金壇玉笈幽邃之訣皆印在胷次爾後新羅政教寢衰有危亡之兆師知將有聖人受命而特起者囙往遊松岳郡時我世祖在郡方築居第師過其門曰此地當出王者但經始者未諳耳適有靑衣聞之入白世祖遽出迎入咨其謀改營之師因曰更後二年必生貴子於是譔一卷書實封之進世祖曰此書上未生君子然須年至壯室而後授之耳是歲新羅獻康王立唐乾符二年也四年我太祖果誕降于前第逮壯得其書觀之於是知天命有所屬遂剗除冦暴肇造區字恭惟神聖豈甞有心於天下哉其所以撥亂反正躋民壽域洪業休德傳之無窮者雖復天輔有德民懷于仁然其啓聖期於化元定成命於幽數其原皆自吾師發之蓋其功烈巍巍赫赫如此之盛宜在褒大而追崇之故顯王有大禪師之贈肅祖加王師之號逮于我聖考恭孝大王丕揚列聖所以念功報德之意遂進封爲先覺國師仍遣使告禮行事于本寺影堂今上又命刻其事以壽其傳盛哉其無以復加矣臣甞試言之夫帝王之將興其威靈氣燄必先有以動蕩於物者故高材絶識者塡然而起或爲之先或爲之後以致其用焉若國師之於太祖其事甚偉蓋先識之於降生之前而施其効於身歿之後其神符冥契有不可思議者於戱師之道其詣於極者與佛祖合其寓於跡者若張子房之受書於神釋寳誌之預言未兆一行之精貫術數者耦歟師所傳陰陽說數篇世多有後之言地理者皆宗焉銘曰
過去諸佛有微妙法非文字詮非思修攝超然直指一念千刼惟我國師優入其域善學無學眞空不空眞正法眼四闢六通推其緖餘寓數術中不憑蓍筮懸解無窮舊邦俶擾新命猶閟先終知終未至知至譔書預獻國祚攸始作周興漢如掌斯指聖人聿起膺籙受圖乃眷所屬發之自吾人雖隔世事若合符殊功偉績與山河俱歷歲三百風流如在瞻仰高躅掀天磊勒碑舊祠揭示千載咨爾山君守護無怠
天德二年歲次庚午七月乙亥九日癸未立頴悟三重大師臣處實奉宣刻字
(陰記)
先覺國師碑陰記碑旣鐫石之明年臣與叙俱爲讒邪所搆或流或貶朝士皆忌惡臣等百喙攻擊必欲置之死地以滿讎人之腹雖祖師事蹟不繫於臣之賢不肖而以故無有出一言碑當立者其石遂委棄於國淸寺門廡之下二十餘年塵䨪土蝕幾使非常功烈泯滅而不聞于後世洎我聖上陛下龍飛御極剗除亂跡整頓百度惟新善政國師法孫雲巖寺住持重大師志文者以其事訴屈于大史氏遂取旨召光陽縣貢舡載其石送于玉龍寺上迺遺內侍良醞署承朴逢均蒞其事大史挈壺正李陽靖相其地石工召華嚴寺僧衆役夫徵光陽求禮二縣軍人監務員將仕郞衛尉主簿韓彥邦將仕郞衛尉主簿康立諝督其役住持志文實摠其事不日而成爲堂三間以大定十二年壬辰歲十月十九日竪碑訖趺石峻整階基堅完實可以傳千祀萬祀而不傾圯者矣其堂直寺之東北二百步許眞爽塏之壤也志文又告于上曰願依本朝王國師碑文舊式於石背載法孫弟子大德已上職名以垂示于來裔癸巳五月二十九日奏依臣於是尋其宗派得所謂正孫者一十人附于左方云
松林寺住持重大師逈均玄
岬寺住持重大師旼彥
重大師之曉
重大師志淵
重大師彦宣
重大師宗純
重大師處靈
大師慧溫
大德惠資
大德惠儀
金紫光祿大夫守司空中書侍郞平章事集賢殿大學士判尙書禮部事致仕臣崔惟淸奉宣記
癸巳六月十四日判許幷刻法孫傳持寺四所
大中十年丙子祖師結菴甌嶺與神人相會開創米□寺十二年戊寅開創求禮縣道詵寺與神人聚沙劃三國圖處開創三國寺咸通六年乙酉創雲岩寺
門人玉龍寺住持重大師臣志文奉宣立石
普賢住持大悟重大師臣機俊奉宣書
門人叅學臣正忠奉宣刻字
※출전: 『東文選』 권117
※출처: ‘문화유산 연구지식포털’, 국립문화재연구원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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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통사-도선국사 본비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상편, 신라 효공왕 2년 조에 수록되어 있다. 도선국사본비(道詵國師本碑)는 고려 최유청(崔惟淸)이 찬술한 것이다. 도선국사(道詵國師, 827~898)는 자가 옥룡자(玉龍子), 호가 연기(烟起)이다. 15세에 출가하여 월유산(月遊山) 화엄사(華嚴寺)에서 수학하였다. 대장경에 통달하였으며 풍수지리에 밝았다. 비문에 보이는 설화는 사도촌(沙島村) 마을 이름의 유래이다. 원문 (備考)道詵國師本碑 年十五。穎悟夙成。遂祝髮。𨽻月遊山華嚴寺。讀習大經。學徒百千。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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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사열전-도선국사전원문 道詵國師傳 師名道詵。字玉龍。號烟起。姓崔氏。朗州鳩林村人也。其母崔氏。冬喫於井瓜娠。生無父。從母姓。生而棄林。衆鳩乳養。異而復收。因名鳩林。十三歲。隨唐船入唐。唐一行禪師。甞曰。洞水逆流。則傳吾道者來。門人記其言。一日門人。走報曰。今日洞水逆流矣。一行聞之。即具威儀。出門外。道詵忽來叅。行曰。待之久矣。何其遲也。相與大悅。即迎入留。詵。盡得其術而告去。行。別曰。吾道東矣。珎重。仍寄一封丹書而誡曰。愼勿速開。囑王氏家。待七年後開示。詵。到松都。宿王隆家。仰觀天象。俯察地理。歎曰。明年必生貴子。以救塗炭之苦。隆。聞之。倒屣而出。明年果生王建太祖。隱山碑略曰。一行。囑道詵云。佛者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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