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대화엄사 임제종 36세 적손 원화 대선사 행장 초는 『다송문고(茶松文稿)』 권1에 수록되어 있는 행장이다. 원화 덕주(圓華德柱, 1839~1893) 대선사는 임제종 36세 적손(嫡孫)으로서 1853년 17세에 출가하여, 1866년 28세에 화엄사에서 건당(建堂)하였고, 1893년 세수 55세, 법랍 38세로 입적하였다.
원문
智異山大華嚴寺臨濟宗三十六世嫡孫圓華大禪師行狀草(乙卯冬)
師諱德柱。字守微。號圓華。潭陽人也。姓鄭氏。貫潭陽。父基喆。世衣冠。母吳氏。夢星殞入懷。仍而有娠。道光十九年【원주: 朝鮮憲宗五年日本天保十年也】。己亥五月二十五日生。天資穎悟。頂圓準隆。眼奪星光。唇點蓮華。但家道不贍。每長恨不讀。年七八遊必學庠之傍。竊聽絃誦之聲。或併同侶之筴。或拾落地之頴。臨讀不覺移晷。執筆忘却枕食。日必兩食。夜必一宿。身不卞裘麻之衣。足不得靴袜之踐。目必誦而敎之。耳必記而傳之。人稱非常之才云。知[1](역) ‘知’는 ‘志’의 오자인 듯함.學之年。能訓通史。閱盡書籍。父老所謂童蒙敎員云爾。十五歲癸丑。俱遭雙親之痛。嗚呼哀哉。身且窮矣。我安適歸乎。十七乙卯。轉到智異山華嚴寺。山水秀明。寺宇宏傑。心意如注。盍以住居。仍托迹山門。行吟寺菴。有西藕大師。見而器之。乃爲削染。受戒於抱虛大德。無乃南岳靈之所引我耶。爰恣遊學。受經於四大宗匠【원주: 曹溪山優曇菡[2](역) ‘菡’은 ‘涵’으로 표기되기도 함.溟方丈山抱虛應月】。受具戒於優曇禪師。對經入定。沒覺飯鍾之大鳴。探格索隱。現拔講軒之微楔。四書六經。更扣於王某之高見。三藏百家。鑽極於方外之雄辯。可謂髫專魯誥。冠討竺墳者。何專美於古哉。二十[3](역) ‘二十’은 ‘二十八’의 오류인 듯함.歲丙寅【원주: 同治五年李王三年】。建幢於華嚴大道場。法父卽碧嵓十世孫斗月大師是也。泝其源則芙蓉之十三世。臨濟之三十六世孫也。芿住本山金井庵。腥薌發露。蟻慕幽谷。開堂普說。應接方來也。三十歲戊辰春。有客自無何而來者。請其詩。求其名。固讓乎詩。但記乎名矣。居數月有邏取之御命。小無忌色。乘馹上京。抵訓練法衙。對捕將問草[4](역) ‘草’는 ‘招’의 오자인 듯함.。毉嘻。手攙龍頷。心珠發光於佛海波瀾。身犯虎穴。慧刃輝晃於法律釰戟。所謂罪名白地無中出。心事靑天在上知。罪歸罪。功歸功。無事蒙放而還。奚啻金躍大冶。抑亦珠還合浦。是知佛鏡自鑑於無罪之命。法力益彰於有數之分。自是名播有鄕。譽飛無翼。請益者。海進雲圍。四大庵之靈源。泉隱寺之修道。宜其結夏之講院。大華嚴之寶積。九層臺與鳳泉。恒是安居之敎場。手不釋圓明之珠。大悲呪爲課。口不掇方廣之偈。妙蓮花爲業。食不兼饌。服不重侈。爲公必先。營私在後。對靑眼而討論。唯恐不問。與白衣而酬酌。常欲無言。歛迹壺中。大會之論雲興。愈歛迹而不赴。鞱光廡下。曹溪之請膠固。益鞱光而不應。所著妙蓮記會鏡錄。手所寫七書大典。南華經諸家語錄。行于世。光緖十九年癸巳五月二十五日。示微疾。曰四大是假。五蘊非實。無以名顯於世。無以假爲其實。至三十日黎明灌浴趺坐已。奄然而化。世壽五十五法臘三十八。掛眞于本寺。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번역문
지리산 대 화엄사 임제종 36세 적손 원화(圓華) 대선사의 행장 초고(을묘년(1915) 겨울)
선사의 휘는 덕주(德柱), 자는 수미(守微), 호는 원화(圓華)이며 담양(潭陽) 사람이다. 속성은 정씨(鄭氏)로서 관향은 담양(潭陽)이고 부친 기철(基喆)은 대대로 의관(衣冠)을 갖추었다. 모친 오씨(吳氏)는 별이 품 안으로 떨어지는 꿈을 꾸고는 잉태하여 도광(道光) 19년【원주: 조선 헌종 5년 일본 천보(天保) 10년이다】 기해년(1839) 5월 25일에 출산하였다. 천성이 영특하고, 정수리는 둥글고 코는 우뚝하며 눈빛은 별빛을 앗을 정도요 입술은 연꽃을 점찍은 듯했다. 다만 집안이 넉넉하지 못해 책을 읽지 못함을 늘 안타까워했다.
7, 8세에 노는 곳은 늘 서당의 옆이어서, 글 읽는(絃誦) 소리를 몰래 듣곤 했다. 간혹 동료의 책을 같이 보기도 하고, 땅에 떨어진 붓(穎)을 줍기도 하면서, 독서를 하게 되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붓을 잡으면 침식(枕食)을 잊을 정도였다. 낮에 두 끼를 먹고 밤에 잠을 한번 자면서, 몸에는 갖옷과 삼베를 구별하지 않고 발에는 갖신과 버선을 얻지 못하였지만, 보는 건 반드시 외워서 가르쳤고 들으면 반드시 기억하여 전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비상한 재주라고 칭찬하였다고 한다. 배움을 알게 되는 나이에 능히 역사서를 가르치고 서적을 다 보니 어른들이 ‘어린 선생님’이라고 일컬었다고 한다.
15세 계축년(1853)에 부모님 상을 함께 당하니 아아, 슬프도다, 궁박하게 되었으니 나는 어디로 갈꼬.
17세 을묘년(1855)에 지리산 화엄사에 이르게 되니 산 좋고 물 맑으며 사찰이 웅장하여 마음이 쏠리니 어찌 머물지 않겠는가. 그래서 산문에 자취를 의탁하고 사찰 암자에서 거닐며 글을 읊었다. 서우(西藕) 대사가 보고는 기특하게 여기고 삭발하게 하고, 포허(抱虛) 대덕에게 계를 받으니 남악(南岳, 지리산)의 영령이 나를 이끈 것이 아닌가. 이에 마음껏 다니며 공부를 하니 4대 종장(宗匠)【원주: 조계산 우담(優曇)과 함명(涵溟), 방장산 포허(抱虛)와 응월(應月)】에게 경전을 배우고 우담(優曇) 선사에게 구족계를 받았다.
경전을 대하고 선정에 듦에 공양을 알리는 종(飯鍾)이 크게 울리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격식을 찾고 숨은 뜻을 찾음에 강헌(講軒)의 은미한 기미를 드러내었다. 사서육경(四書六經)에 대해서는 왕모(王某)의 고견을 다시 물었고, 삼장(三藏)과 백가(百家)에 대해서는 방외의 대가(雄辯)들에게 남김없이 탐구하였다. 가히 ‘어려서는 유교 경전을 탐독하고 커서는 불교 경전을 탐구하였다’ 하리니, 어찌 고인이 이런 아름다움을 독차지 할 것인가.
28세 병인년(1866)【원주: 동치(同治) 5년, 이왕(李王, 고종) 3년】에 화엄사 대 도량에서 건당(建幢)하니 법부(法父)는 즉 벽암(碧嵓)의 10세손인 두월(斗月) 대사였다. 근원을 거슬러 가면 부용(芙蓉)의 13세손이요 임제(臨濟)의 36세손이 된다. 그렇게 본산(本山) 금정암(金井庵)에 주석하니 비린내가 드러나자 개미가 좋아하여 골짜기에 그윽하듯 하였기에, 개당보설(開堂普說)하여 오는 이들을 응접하였다.
30세 무진년(1868) 봄에 어디선가 손님이 와서는 시를 청하고 이름을 구하기에, 시는 굳이 사양하고 다만 이름만 적어 주었다. 몇 달 지나 체포(邏取)하라는 어명이 내렸는데, 조금도 꺼리는 기색이 없이 역마(驛馬)를 타고 상경하였다. 훈련법아(訓練法衙)에 이르러 포도대장의 문초를 받았다. 아아, 손으로 용의 턱을 찌르니 심주(心珠)가 불해(佛海)의 파도에서 빛을 발하고, 몸소 범 굴을 범하니 지혜의 칼(慧刃)이 법률의 칼과 창보다 휘황찬란하다. 이른바 죄명이 명백하게 나올 곳이 없고 마음(心事)을 하늘이 위에서 아심이라. 죄는 죄로 돌아가고 공은 공으로 돌아가니 무사히 방면되어 돌아왔다. 어찌 쇠가 대장장이 앞에서 펄펄 뛰는 것뿐이겠는가, 또한 진주가 합포(合浦)로 돌아옴이라. 이에 불경(佛鏡)이 무죄한 운명을 저절로 비추고 법력이 운수의 나뉨을 더욱 드러냄을 알겠다. 이로부터 명성이 고을에 퍼지고 명예가 날개 없이도 드날렸다. 그래서 배우고자 하는 이가 조수가 밀려오고 구름이 에워싸듯 하니, (지리산) 사대암(四大庵)의 영원사(靈源寺)와 (지리산) 천은사(泉隱寺)의 수도암(修道庵)은 마땅히 하안거를 지내는 강원(講院)이요 대 화엄사의 보적암(寶積庵)과 구층대(九層臺)와 봉천암(鳳泉庵)은 항시 안거하는 교장(敎場)이었다.
손에는 원명(圓明, 둥글고 밝은) 염주를 놓지 않으며 대비(大悲)의 주문을 일과로 삼고, 입으로 방광(方廣, 크고 넓은) 게송을 끊이지 않으며 묘연화(妙蓮花)를 업으로 삼았다. 음식은 반찬을 겸하지 않았고 의복은 사치를 하지 않으며, 공적인 일을 반드시 먼저 하고 사적인 일은 뒤에 했다. 반가운 이(靑眼)를 만나 토론하면 묻지 못할까 걱정이요, 재가신자(白衣)와 대화할 때면 항상 말이 없고자 했다. 자취를 호중(壺中)에 감추고서 대회의 논의가 구름처럼 일어도 더욱 자취를 감추고 나아가지 않았고, 처마 밑에서 재능을 감추니(鞱光) 조계(曹溪)의 청이 굳세어도 더욱 재능을 감추고 응하지 않았다. 저술한 『묘연기(妙蓮記)』와 『회경록(會鏡錄)』, 손수 베껴 쓴 『칠서대전(七書大典)』과 『남화경(南華經)』과 『제가어록(諸家語錄)』이 세상에 유통된다.
광서(光緖) 19년 계사년(1893) 5월 25일에 가벼운 질병을 보이시며, “사대(四大)는 가합(假合)이요 오온은 실제가 아니니 이름을 세상에 드날리지 말고 가합을 실제로 여기지 말라.”고 했다. 30일 새벽에 목욕하고 가부좌 하더니 이윽고 입적하셨다. 세수(世壽)는 55세요, 법랍(法臘)은 38세였다. 진영을 본사에 걸어두었다.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관련주석
- 주석 1 (역) ‘知’는 ‘志’의 오자인 듯함.
- 주석 2 (역) ‘菡’은 ‘涵’으로 표기되기도 함.
- 주석 3 (역) ‘二十’은 ‘二十八’의 오류인 듯함.
- 주석 4 (역) ‘草’는 ‘招’의 오자인 듯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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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송문고-화엄사 원화 함장께 올리는 글화엄사 원화 함장께 올리는 글(上大華嚴寺圓華凾丈文)은 『다송문고(茶松文稿)』 권2에 수록되어 있다. 글은 1887년 원화 덕주(圓華德柱, 1839~1893) 스님께 올린 글로, 원화 덕주 스님의 법맥과 행적, 저자의 발원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화 덕주 스님은 임제종 36세손으로 화엄사에서 1866년 건당하였다. 원문 上大華嚴寺圓華凾丈文(丁亥春) 夫諸佛列祖之傳禪傳敎。若義天之慈雲法雨。菩薩群生之得髓得皮。如福地之種瓜耕稻。盡開方便門而逗機。悉從眞如海而流出。唯我大宗匠。德雲潤身。法雨沃心。仰觀宗脉之源源。浮休碧嵓爲遠世祖。俯考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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