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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열록-화엄사기

화엄사기(華嚴寺記)는 『백열록(栢悅錄)』에 수록된 화엄사 관련 산문이다. 산문은 범해 각안(梵海覺岸, 1820~1896) 스님의 글이며, 내용은 각황전 중창 설화를 적은 것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당시 각황전을 3층으로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3층의 각황전이 왜란으로 소실된 이후는 2층인 것도 밝히고 있다. 또 산문의 말미에 3년의 중창 기간과 장육불상을 봉안 한 것, 후불단에 화엄석경 안치한 것도 확인 할 수 있다. 『백열록』은 금명 보정(錦溟寶鼎, 1861~1930) 스님이 해남 대흥사에 머물면서 추사 김정희, 다산 정약용, 초의 의순(草衣意恂, 1786~1866), 범해 각안 등의 글을 필사하여 엮은 문집이다. 문집은 1책으로 서(書), 찬(贊), 송(頌), 서(序), 기(記), 제문, 선문답, 모연문, 명(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정 스님은 법호가 금명, 법명이 보정, 자가 다송(茶松), 속성이 김씨(金氏)이다. 17세에 송광사 금련(金蓮) 스님에게서 출가하고, 이후 경파(景坡) 스님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화엄사에서 개강하였고, 이후 송광사에서 후학을 양성하다가 나이 70세, 법랍 53세로 입적하였다. 저서로 『금명집』, 『백열록(栢悅錄)』, 『다송문고(茶松文稿)』, 『다송시고(茶松詩稿)』, 『조계고승전(曹溪高僧傳)』 등이 있다.
원문
華嚴寺記【원주: 禮縣】 剏三層覺皇殿。而奉安丈六佛像之時。 八寺九菴。齊會于一處。擇定化主。安蜜末二器。入手不著者。定化主。一會人第起。入手皆着。唯供養主僧不著。自蔚山新興寺來住者也。已定化主。持勸出行。日曉頭夢。有一老人曰。持勸登途。初逢者。勸善云云。伊日持勸。出寺門外。有一婆。荷笥而來。化主放杖。合手而立。至誠勸善。此婆不勝勤切。假稱曰。暫徃溪潭。洗濯內袴。良久不出。化主徃見。則投潭已死。化主惧哀。并至由徑路并日而行。隱於北山。三年不出。時國王生一男。兩手堅握。含口而不言者。已六年矣。化主出山入都。市人負國男遊街。國男見化主。卽下地伸兩手。合掌而言曰。此華嚴寺化主僧也。生來初言行伸手也。兩手有紋曰。華嚴寺大施主。國君召化主。改衣裳。吿緣起。使不下送。使道伯主其事。三年吿功。奉丈六佛。石板刻華嚴經一秩。安後佛壇。故名其寺曰華嚴。壬亂倭賊破碎。今則二層也。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번역문
화엄사기(華嚴寺記)【원주: 구례현】 3층의 각황전(覺皇殿)을 창건하고 장륙불상(丈六佛像)을 봉안할 당시, 여덟 곳의 절과 아홉 곳의 암자 대중이 한곳에 모두 모여 화주(化主)를 정하기로 하였다. 이때 두 개의 그릇에 밀가루를 넣고 손을 넣어 밀가루가 달라붙지 않는 스님을 화주로 정하기로 하였다. 한곳에 모인 스님들이 차례로 일어나 손을 넣어 보니 모두 달라붙었는데, 오직 공양주 스님만 달라붙지 않았으니, 울산 신흥사(新興寺)에서 온 스님이었다. 스님은 화주로 정해진 후 권선문을 지니고 길을 나섰다. 어느 날 먼동이 틀 무렵 꿈에 한 노인이 나타나 말하기를, “권선문을 지니고 길을 나설 때 처음 만나는 사람에게 권선하시오.”라고 하였다. 그날 권선문을 지니고 절문 밖을 나서는데, 한 할머니가 대나무 상자를 등에 지고 오자, 화주는 지팡이를 놓고 합장하여 서서 지성으로 선행을 권하였다. 할머니는 간절함에 겨워 거짓으로 말하기를 잠시 계곡 물에 속곳을 빨겠노라 하였으나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다. 화주가 가서 보니 노파는 계곡 못에 몸을 던져 이미 죽어 있었다. 화주는 두렵고 슬퍼 함께 오솔길을 따라 이틀을 가서 북쪽 산에 숨은 뒤 3년 동안 나오지 않았다. 당시 국왕은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두 손을 굳게 움켜쥐고 떼지 않으며,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은 지가 벌써 6년이었다. 화주가 산을 나서서 서울에 들어가 보니 시정 사람들이 왕자를 등에 업고 거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왕자가 화주를 보더니 즉시 땅에 내려서는 두 손을 펴고 합장하여 말하기를 “이분은 화엄사 화주승이다.”라고 하며 태어난 후 처음으로 말하고 걸어가서 손을 편 것이다. 두 손에는 지문이 있었는데 ‘화엄사 대시주(華嚴寺大施主)’ 여섯 글자였다. 국왕이 화주를 부르자 화주는 옷을 고쳐 입고 연유를 말하였다. 국왕은 그를 내려 보내지 않도록 하고 도백(道伯)에게 그 일을 주관하도록 하여 3년 만에 완공을 알렸다. 이에 장륙불상을 봉안하고 석판각(石板刻) 『화엄경(華嚴經)』 한 질을 후불단(後佛壇)에 안치하여, 그 절의 이름을 화엄사(華嚴寺)라 하였다. 임진왜란 때 왜적들이 부숴서 지금은 2층이다.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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