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편지는 이기(李沂, 1848~1909)가 갑오년(1894) 여름 황현(黃玹, 1855~1910)에게 보낸 것으로 『이해학유서(李海鶴遺書)』 권6, 서독(書牘) 편에 수록되어 있다. 편지글에는 황현에 대한 안부를 시작으로 시국에 대한 걱정, 화엄사에 올라가 피서나 하며 어지러운 세상일(즉 동학농민운동)을 잊고자 하나 성시(城市)에 살고 있어 그러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 지인들의 근황 이야기가 담겨있다.
원문
答黃雲卿 玹 書 甲午
卽承惠敎。備審潦炎。哀軆支將。復有閒暇及於讀禮。足慰企望之心。某三家二十餘口。貿粮喫過。或日經營。不過升斗之間。按歌調舞。已無暇給。而又奚暇於憂世邪。無事得謗。自是命賦。而况非無事者邪。兄敎至此。感荷何極。京國之擾。不如不聞。稍覺氣下也。東徒猶不釋兵。屯住於古阜,泰仁,興德,茂長等地。若凉生則勢必復起。苟不廓然掃淸。恐無安靖之日。肰誰秉國成。可謂古今一歎也。如得十斗米。便上華寺避暑。且與世不相聞。是乃素志。而逗遛城市。寔所赧肰。惟兄信此言也。近日完府來信絶少。李石亭去留。尙未探知。在意。而甯齋令哭弟。某亦因轉便聞之。天不助善人久矣。只得付之常事而已。餘不備。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
번역문
황운경(黃雲卿) 현(玹)에게 답(答)함. 갑오년
즉일(卽日) 혜서(惠書)를 받아 보고 장마와 혹염(酷炎)이 계속되는 요즈음 애체(哀體)를 잘 지탱하고 또 한가한 여가에 예서(禮書)를 읽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그러기를 바라던 이 마음 매우 위로가 되옵니다.
기(沂)의 3가(家) 20여(餘) 식구(食口)는 양식을 팔아먹고 지내며 혹은 날마다 생업(生業)에 힘을 쓰지만 1승(升) 1두(斗)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노래하며 춤출 여가도 없는데 어느 여가에 세상을 걱정하겠습니까? 아무 이유도 없이 비방을 들은 일은 운명적으로 타고난 일인데 하물며 일이 없는 사람도 아니오니 더 말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형(兄)의 교시(敎示)가 여기에까지 미치니 그 감사한 마음 어찌 끝이 있겠습니까? 서울의 소요(騷擾)는 안 듣는 것보다 못하지만 조금은 기운이 빠진 것을 느낍니다. 그리고 동비(東匪)들은 병대(兵隊)를 해산(解散)하지 않고 고부(古阜)·태인(泰仁)·흥덕(興德)·무장(茂長) 등지에 주둔하고 있으므로 만일 시원한 바람이 생기면 새로운 형세는 다시 일어날 것이니 그들을 깨끗이 쓸어버리지 않으면 편안할 날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누가 국가(國家)의 평안(平安)을 책임질 수 있겠습니까? 이것은 고금(古今)이 한결같이 탄식할 일입니다. 만일 10두미(斗米)만 생기면 화엄사(華嚴寺)로 올라가서 피서(避暑)나 하며 세상 일에 관심을 갖지 않으려고 합니다. 이것이 제가 가지고 있는 본래의 생각입니다만 성시(城市)에 머무르고 있으니 매우 부끄러운 일입니다. 형(兄)께서는 이 말을 믿어 주시기 바랍니다. 요즈음은 완부(完府)에서 오는 서신(書信)이 매우 드물어 이석정(李石亭)이 있는 곳을 알 수 없으므로 저의 마음속에 그 모습이 가물거리고 있습니다. 영재(寗齋) 이건창(李建昌)은 아우를 잃었다고 합니다. 기(沂)도 이 소식을 인편(人便)으로 들었습니다. 천하(天下)에 착한 사람을 돕지 않은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다만 범상한 일로 여길 뿐입니다. 그럼 남은 말은 다 갖추지 못하옵니다.
※출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관련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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