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침계에게 보내는 편지는 박규수(朴珪壽, 1807~1877)가 1851년(철종 2) 전라좌도(全羅左道) 경시관(京試官)에 부임하여 화엄사에 방문했을 때의 일을 1852년(철종 3) 새해 무렵 침계 윤정현(尹定鉉, 1793~1874)에게 보낸 것이다. 편지에서 그는 당시 화엄사가 신라시대의 뛰어난 건축물이자 여러 조사들이 머문 곳인데, 왜구에 의해 화엄석경이 파손된 뒤 지금까지도 수습되지 않고 있음을 탄식하였다. 또한 중국인들이 화엄석경을 본다면 서법이 아름다워 탁본하여 보물로 전했을 것이라는 언급에서 화엄석경에 대해 높이 평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화엄석경에 대해서는 윤종균(尹鍾均, 1861~1941) 역시 그 강건한 서체를 찬미하였다.
이 편지는 박규수의 문집 『환재집(瓛齋集)』 권9에 수록된 친구들에게 보낸 69통의 편지 중 하나이다. 『환재집』은 11권 5책으로 시, 서(序), 제문, 묘지명, 소(疏), 계(啓), 서독(書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박규수는 자가 환경(瓛卿), 호가 환재(瓛齋), 환재(桓齋), 본관이 반남(潘南), 시호가 문익(文翼)이고, 박지원의 손자이다. 출사하지 않고 독서하다가 42세(1848)에 증광시 대책으로 급제하였다. 홍문관 수찬, 한성부 판윤, 형조 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하였다. 저서로 『환재집(瓛齋集)』·『환재수계(瓛齋繡啓)』가 있다.
원문
上尹梣溪
攀別歲周。遂闕候儀。葢卒卒鹿鹿。無意之甚。乃至於斯。自訟亦自憐。庶幾其下諒而恕之也。歲華且寒。益不勝景溯之忱。際伏承下書。欣荷之餘。伏審玆下。撫按體候神相萬安。伏慰無任區區。北土高凉。宜乎水泉適人。而乃有不服之祟何也。向遊西邑。人皆言水土甚佳。獨不得利。至今有咯血之證。始知禀質各殊。有適有不適如是耳。侍生幸無大疾苦。但衰相頗多。彈束趍造。每難自力。不知如此不已。竟成如何樣子。奈何奈何。下惠諸品。感鐫不已。眞興王碑頃從他人聞之。方俟一本之賜。幸玆得之矣。細玩百回。第一書法遒婉謹嚴。東方古刻。罕見其比。眞興之爲諡爲號。從未有攷證處。旣曰太王則似是尊崇之語。恐非當朝之稱謂矣。且羅代之呑並句麗。在眞興卒後歷六世九十二年。至文武之世。爲唐高宗緫章元年。眞興之世。羅界無由至於今之咸興矣。此碑之立。恐在呑並以後。而其首稱眞興太王者。恐有追述先懿之事。不得不如此。而其下文全缺。無以爲辨矣。雖謂非眞興當時所立。亦不失爲我東金石之祖耳。
昨秋試士湖南。歷求禮華嚴寺。爲羅代傑搆。而東方諸祖師莫不卓錫於玆。本有華嚴石經。爲倭寇槌碎。今尙有斷刻之堆積者。書法絶佳。若使中國人見之。雖殘缺如此。必應拓出傳寶。不令埋沒乃爾。殊可恨耳。
紙縮姑不備。伏祈歲時之際。爲國自重。
※출처: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이성민 (역), 2017
※출처: 『한국고전종합DB』, 한국고전번역원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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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석경화엄석경은 국내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석경이다. 석경의 모서리에 고정과 연결을 위한 홈이나 구멍이 있는 것으로 보아 벽처럼 세워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경판의 크기는 세로 52㎝, 가로 65㎝, 두께 2.7~6.4㎝, 폭 3.1~34㎝이다. 글씨 위쪽과 아래쪽에 가로로 그은 선과 세로로 행간을 구분하는 계선을 긋고, 그 안에 경전의 내용을 새겼다. 파편 석경에는 적게는 몇 자에서 많게는 50여 자의 글자가 있으며, 해서체로 쓰였다. 석경은 경문, 변상도, 범어 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은 품(品)으로 구분된다. ... -
유당시집-화엄경을 돌에 새김「화엄경을 돌에 새김」은 칠언절구로 ‘화엄사 십해(十解)’의 여섯 번째 풀이다. 이 시는 윤종균(尹鍾均, 1861~1941)의 『유당시집(酉堂詩集)』 권2, 병진고 편에 수록되어 있으며, 1916년에 찬술된 것이다. 시의 내용은 화엄석경이 봉안된 위치, 왜란으로 인한 훼손, 서체의 강건함에 대해 읊은 것이다. 화엄석경의 서체에 대해서는 박규수(朴珪壽, 1807~1877)의 「윤 침계에게 보내는 편지(上尹梣溪)」에서도 그 아름다움을 적고 있다. 원문 華嚴石刻 六解 華嚴經石刻卽覺皇殿壁而兵火中破碎字劃蒼雅遵勁在覺皇殿佛床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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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황전각황전은 왕실의 지원으로 1702년(숙종 28)에 계파성능(桂波性能)스님이 재건한 불전이다. 이 자리에는 장륙전이라는 이름의 불전이 있었고, 내부에 화엄석경이 봉안되어 있었으나, 정유재란 때 건물은 소실되고 화엄석경은 파괴되어 만여 점이 넘는 조각으로만 남아 있다. 전란 이후 벽암 각성스님의 중창 당시 대웅전만 재건되고 장육전은 재건하지 못하였는데, 1699년에 홍각, 등계, 성능스님이 영남 예천 학가산에서 와서 재건의 업적을 이어 2층 7간의 대전을 원통전과 함께 재건하였다. 공사는 1699년(기묘) 봄부터 17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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