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주관(石柱關)은 전라도의 구례와 경상도의 하동을 잇는 섬진강을 따라 내륙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일찍이 이곳에는 고려 말에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진영이 설치되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진영이 있던 옛 터에 다시 석주관성을 쌓았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의 군대가 호남으로 진격해 왔을 때,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 1554~1597)이 8월 16일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후 9월에 구례의 왕득인(王得仁, 1556~1597)이 의병을 모아 일본군과 싸웠으나, 11월에 석주관 전투에서 모두 전사하였다. 왕득인의 아들 왕의성(王義成)이 이정익(李廷翼), 한호성(韓好誠), 양응록(梁應祿), 고정철(高貞喆), 오종(吳琮) 등 구례의 젊은 선비들을 중심으로 의병을 모았고, 여기에 화엄사의 승군의 지원을 받아 다시 석주관에서 맞섰으나, 왕의성을 제외하고 대부분 전사하였다. 왕의성은 그 뒤 병자호란 때 의병활동에 참여하여 전라도군량장(全羅道軍糧將)으로 활약하였다. 이후 왕득인을 위시로 하여 석주관에서 싸웠던 7인을 가리켜 일명 ‘석주관칠의사(石柱關七義士)’로 칭하였다.
한편, 1798년(정조 22) 화엄사 대웅전 수리 당시 천정에서 ‘기서화엄사화상승□(寄書華嚴寺和尙僧□)’ 격문(檄文)과 ‘정유란 일기(丁酉亂日記)’가 발견되었다.
격문은 정유재란 당시 석주관 전투에서 싸우던 왕의성을 포함한 젊은 선비 6인의 이름으로 작성된 글로 화엄사에 군량과 승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같이 발견된 일기는 당시 화엄사에서 이들의 요청에 따라 군량 103석을 지원하고 승군 153인을 보냈으나,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고 승장(僧丈) 여일(如一)이 정유년 11월에 기록하였다.
화엄사에서 발견된 이 두 자료를 근거로 하여 구례 ‘석주관칠의사’의 의병활동 사실이 증명되어 후에 이들에 대한 추앙·선양사업이 추진되었고, 나아가 전란 당시 화엄사 승군의 활약 및 사찰의 경제적 지원이 있었음을 세상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외에 구례에서 편찬된 지방지와 구례 일대에서 활동한 유학자의 문집에 ‘칠의사 순절’에 관한 여러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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