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1년 조선총독부는 ‘사찰령·사찰령시행규칙’을 제정, 반포하였고, 이 과정에서 전국의 사찰은 30개의 본사와 그에 속한 말사의 형태로 관리되었다. 또한 1924년 11월 20일 사찰령시행규칙을 개정하여 구례 화엄사를 추가로 포함하여 31본산을 성립시켰다. 일제는 1932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를 추모하기 위한 박문사(博文寺)를 세우고, 조선불교의 총본산으로 삼아 조선불교를 통제하려 하였다. 이를 저지하기 위해 1935년 ‘31본산주지회의’를 열었고, 여기에서 ‘조선불교선교양종 종무원’이라는 불교계 대표기관을 설립하였다. 이때 각황사의 재건축을 논의하였다.
이후 불교계는 1941년 4월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을 제정하여 ‘사격을 총본사·본사·말사의 3종(제7조)’로 하고, ‘태고사(현 조계사)’를 총본사로 지정(제8조)‘하였다. 즉, ‘조선불교 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의 인가를 통해 조계종이라는 새로운 불교계 대표기관이 수립된 것이다. 제1대 종정에 한암 중원(漢巖重遠, 1876~1951) 스님을 추대하고, 그 해 6월 총본사에서 종무를 시작하였다. 종정에 추대된 중원 스님은 종정취임을 승락하여 8월 총독부로부터 종정 취임인가를 받았다. 9월 종무 고문 6명과 종무총장의 명단을 발표하고, 종무원에는 서무부, 교무부, 재무부의 부서를 두었다. 그리고 종회법, 승규법 등을 제정, 발표하였다.
1945년 광복을 맞이한 불교계는 일제가 제정한 ‘사찰령’을 부정하고 ‘조선불교조계종총본산태고사법’과 31본산제를 폐지하였다. 그 대안으로 ‘조선불교교헌’을 제정하고, 이전 본산체제를 각 도에 교구 교무원을 설치하여 각 도 교정의 중심으로 삼도록 하는 도별 교구제로 전환하였다. 즉, 서울의 중앙총무원과 13교구의 체제를 형성한 것이다. 이 도별 교구제는 불교정화운동의 과정을 거쳐 비구와 대처의 통합종단까지 유지되는데, 이후 불교재건비상종회는 통합종단의 종명을 현재의 대한불교조계종으로 정하는 한편 도별 교구제를 폐지하고 오늘날의 교구제인 25교구 본사제를 제정하였다.
1941년 5월 조선총독부가 발행한 이 문서는 양장으로 엮었고, 모두 36장(張)이다. 앞표지에는 ‘소화 16년 5월 1일 조선불교조계종 총본사 태고사법(昭和十六年五月一日 朝鮮佛敎曹溪宗總本寺太古寺法)’이라 인쇄되어 있고, 묵서로 ‘조선불교 조선불교 사찰감(朝鮮佛敎 朝鮮佛敎 寺刹監)’이라 적혀있다. 태고사법 뒤에는 사찰의 본말 관계 및 순위표가 첨부되어 있고, 41쪽에 본사 화엄사 소속으로 15개의 말사가 기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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