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속편구례지와 속수구례지

『속편구례지』는 1922년 도유사(都有司) 고정한(高定漢) 등이 간행한 지리지로 『봉성지(鳳城誌)』의 편제에 따라 상·하편으로 구성하되, 내용을 수정·증보한 것이고, 『속수구례지』는 『속편구례지』를 개정·증보하여 1962년 6월 30일 구례향교에서 유학자들이 상·하편으로 발간한 지역단위 지리지이다. 『속편구례지』와 『속수구례지』에 보이는 화엄사에 관한 내용은 체제와 구성이 동일하여 후자의 것만을 소개한다. 경오등록서(庚午謄錄序, 1870)의 지소청(紙所廳) 항목은 『봉성지』와 동일하며, 영문(營門)과 관아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책임지고 조달하는 지소청에서 그 값으로 화엄사에서 41냥(兩) 5전(錢)을 차출한 일이 적혀 있다. 사립신명학교(私立新明學校)는 화엄사 보제루에 설립된 사립불교학교이다. 『속수구례지』에서는 1908년에 건립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다른 기록에서는 1904년에 설립되었다(‘한국역사용어 시소러스’, 국사편찬위원회 참조) 하여 설립년에 약간의 차이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유리건판으로 화엄사 신명학교 학생의 단체사진 1장이 남아있어 당시 학생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신명학교의 교사로 한상봉(韓相鳳, 1877~?)이 확인된다. 사립신명학교와 관련하여 윤종균(尹鍾均, 1861~1941)의 『유당시집(酉堂詩集)』 권2, 병진고(1916) 편에 ‘화엄사 십해(十解)’의 9번째 풀이 「보제루 신학교(普濟樓新學校)」 시가 수록되어 있다. 명승고적 편에서는 구례 명승의 하나로 동북쪽에 위치한 화엄사를 언급하고, 도선국사의 사도촌 전설을 간략히 소개하였다. 불우 편의 내용은 화엄사의 지리적 위치, 신라시대부터의 연혁, 승려, 전각규모, 소장유물, 벽암각성비명, 일제강점기 화엄사와 선암사의 본말사 문제, 화엄사에 대한 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일 개산조(開山祖) 연기대사(緣起大師)부터 제이십일 혜암당(惠庵堂) 윤장대사(玧藏大師)까지의 스님은 화엄사 영전에 봉안된 진영 및 『조사례(祖師禮)』에 등장하는 역대 스님과 대동소이하다.
번역문
○ 경오등록서(庚午謄錄序, 1870)의 지소청(紙所廳) 각 영문(營門)과 관아(官衙)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책응(責應)하는 곳이다.각 호당 조(租) 1두씩을 거두어 노임으로 주었다. 화엄사 41냥 5전, 청계사 21냥, 각 면(面)의 면전(面錢) 44냥과 소목대전(燒木代錢) 16냥과 관수미(官需米) 2석을 만들어 본전으로 삼고 사용하였다. ○ 사립신명학교 융희 무신년(1908)에 화엄사, 천은사 두 절이 화엄사 보제루에 함께 설립하고, 경비는 해당 사찰에서 가져다 썼다. (지금은 없어졌다.) ○ 명승고적 남쪽의 오산(鰲山), 동쪽의 용대(龍臺)와 연곡(燕谷), 동북쪽의 화엄(華嚴), 천은(泉隱)과 장강(長江) 일대가 가장 이름난 명승이다. … 사도촌: 도선국사가 이인(異人)을 강변에서 만나니, 이인이 모래를 모아 산천 순역(順逆)의 이치를 그려서 비결을 전해 주었다고 한다. ○ 사찰(寺刹) 화엄사(華嚴寺) 군(郡)의 동쪽 10리 마산면 동북쪽에 있다. 지리산 반야봉(般若蜂)을 등에 지고 있고, 앞으로는 섬진강물을 뜰 수 있을 듯하며, 왼쪽에는 일류봉(日留峰)이 있고, 오른쪽에는 월류봉(月留峰)이 있다. 간좌곤향(艮坐坤向)이며 하늘이 만든 깊은 곳이다. 남방(南方)의 큰 도량이 되었으며, 통칭 화엄사(華嚴寺)라고 한다. 예전에는 화엄법류사(華嚴法流寺), 황둔사(黃芚寺), 화엄사(華嚴寺) 등으로 불렀고, 신라 진흥황(眞興王) 4년(543) 갑자년 양무제(梁武帝) 대동(大同) 10년(544)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창건하였다. 백제 법왕(法王, 혹은 효순왕(孝順王), 재위 599∼600)이 승려 3천여 명을 화엄사에서 승적(僧籍)에 올렸다.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인평 11년(642)에 자장법사(慈藏法師)가 증축하였고, 헌강왕(憲康王, 재위 875∼886) 때에 도선(道詵) 법사가 증축하였다. 고려 문종(文宗, 재위 1046∼1083)이 삼도의 모곡(耗穀)을 사용하여 거듭 불당(佛堂)을 새로 지었으며, 인종(仁宗, 재위 1122~1146)이 정인왕사(定仁王師)에게 명하여 거듭 새롭게 하였으며, 충숙왕(忠肅王, 재위 1313∼1330, 복위 1332∼1339)이 조형왕사(祖衡王師)에게 명하여 감전(紺殿)을 중수하여 살게 하였다. 조선 세종(世宗) 6년 갑진년(1424)에 명을 내려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삼고, 선조(宣祖) 26년 계사년(1593)에 병화(兵禍)로 인해 무너졌다. 인조(仁祖) 8년(1630)에 벽암선사(碧巖禪師)에게 명하여 중수하였고, 효종 2년 신묘년(1651)에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 승격첩(昇格帖)을 하사하였다. 숙종 27년 신사년(1701)에 계파당(桂坡堂) 성능(聖能)이 조정의 기부금으로 각황전(覺皇殿)을 중건하여 화엄대도량(華嚴大道場)임을 드러내었고, 28년 임오년(1702)에 대화엄사(大華嚴寺)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으로 승격하였다. 제일(一) 개산조(開山祖) 연기대사(緣起大師)는 오로지 마명용수(馬鳴龍樹) 보살의 대승불교를 종주로 하여, 화엄(華嚴)과 기신(起信)의 유현(幽玄)하고 묘한 뜻을 깊이 공부하여, 삼천 명의 교의학자(敎義學者)를 가르치고 길러 해동에 유통시킨 탓으로, 승사(僧史)에 해동화엄종(海東華嚴宗)의 비조(鼻祖)로 추대되어 있다.【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해동명승기(海東名勝記)에 ‘연기는 신라인으로 그 어머니를 따라 이 산에 들어와 절을 만들었다.’고 한다.】 제이(第二) 해동교주(海東敎主) 원효보살(元曉菩薩)이 신라 선덕여왕(善德女王, 재위 632∼647) 때 화엄사의 해회당(海會堂)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의하니, 이때에 종풍(宗風)이 크게 진작되었다.【성은 설씨(薛氏)요. 신라 압량부(押梁部) 불촌(佛村) 사람이다. 어릴 때 이름은 서동이다. 어머니가 꿈에 유성이 품에 날아드는 꿈을 꾸고 임신하여 낳으니, 낳을 때 오색 구름이 땅에 가득하였다.】 제삼(第三) 해동화엄초조(海東華嚴初祖) 의상법사(義相法師)는 신라 문무왕(文武王) 15년(675)에 왕명을 받들고 10개 사찰에 교리(敎理)를 전하니, 이때에 화엄 종풍(宗風)이 가장 성(盛)하였다. 대사가 보던 경전(經典)이 화엄사에 많이 있고, 해장전(海藏殿)을 화엄대학교(華嚴大學校)로 삼았던 까닭으로 화엄사를 화엄종찰(華嚴宗刹)로 삼았다.【김한신(金韓信)의 아들이 원효와 더불어 당에 들어가 종남산에서 지엄(智儼)을 뵈니 지엄이 입실을 허락하였다. 십찰(十刹)은 태백산의 부석사, 원주의 비마라사, 가야의 해인사, 비슬의 옥천사, 금정의 범어사, 지리산의 화엄사 등이다.】 제사(第四) 도선국사(道詵國師)가 화엄사에서 머리를 깎고 화엄대경(華嚴大經)을 읽고 공부하니, 수천 수백의 학도(學徒)들이 놀라 복종하며 신(神)이라 불렀다. 【최유청(崔惟淸)의 비에 '성은 김이요. 영암 사람이다. 혹은 신라 태종(太宗, 재위 654~661) 때 설(薛)의 손자라고도 한다. 어머니 강씨가 꿈에 밝은 옥구슬을 삼키고 임신하여 낳으니 영특하였다. 고려 태조(太祖, 재위 918~943)를 설득하여 5백 선림(禪林)을 세우고 3천 사원(寺院)을 만들게 하였다. 무설지설(無說之說) 무법지법(無法之法)을 깨달아 마음으로 주고받았다.】 제오(第五) 정행법사(正行法師)가 선현(先賢)의 자리를 이어 잡화경(花經)의 원돈(圓頓)의 묘한 뜻을 전하였고, 낭원국사(郞圓國師)가 머리를 깎고 도(道)를 물으니 이때 종풍(宗風)이 부쩍 진흥되었다. 【낭원의 성은 김이요 이름은 개청(開淸)이며, 계림 사람이다.】 제육(第六) 별대덕(別大德) 현준(賢俊, 최치원의 모형(母兄)). 현준법사가 헌강왕(憲康王)의 명복을 빌기 위해 화엄경사(華嚴經社)를 조직하고 광학장(光學藏) 31칸을 지어서 화엄(華嚴), 기신(起信) 양대(兩大) 본경(本經)을 쓰고 종풍(宗風)을 크게 넓혔다. 제칠(第七) 홍경(洪慶) 선사. 후당(後唐) 천성(天成) 3년 고려 태조 11년(928) 8월에 사문(沙門) 홍경(洪慶)이 당 나라의 민부(閩府)에서 대장경(大藏經) 1부를 싣고 예성강(體成工)에 도착하니 왕이 친히 그를 영접하고 제석원(帝釋院)에 두었다. 제팔(第八) 준소(俊韶) 주지는 고려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 1055~1101)의 승통(僧統)으로 화엄의 승풍(僧風)을 크게 넓혔다. 제구(九) 정인왕사(定仁王師)가 고려 인종(仁宗, 1122~1146)의 명을 받고 화엄사를 새로 중수하여서 가르침을 베풀고 머물렀다. 제십(第十) 조형왕사(祖衡王師)가 충숙왕(忠肅王)의 당부로 감전(紺殿)을 중수하고 이 절에 주석(住錫)하였다. 제십일(第十一) 부용 영관(芙蓉靈觀, 1485-1571) 대사의 문하에서 청허(淸淸)와 부휴(浮休)라는 두 명의 대법사가 나와서 조선의 불교를 바로잡아 회복하였다.【진주 사람으로 이름은 영관(靈觀)이고 호는 은암선자(隱嚴仙子)다.】 제십이(第十二) 청허(淸虛, 1520~1604)가 총판(想判)이다. 【선조 25년 승통(僧統)을 두고 승려를 모집하려 할 때, 조정에서 향산(香山)의 옛 승관(僧官)인 휴정(休靜)을 불러 승려를 모집하여 군사로 만들게 하였다. 휴정이 뭇 사찰에서 수천 명을 불러 모아 제자 의암(義巖)으로 총섭(總攝)을 삼았다.】 제십삼(第十三) 부휴 선수(浮休善修) 대사가 조선 중엽에 일어나서, 화엄의 법석(法席)을 이어서 도(道)를 중흥시키니, 총림(叢林)이 일국(一國)의 종주(宗主)로 추종하였다.【선조 17년 갑신년 부휴가 화엄사에 주석하였다.】 제십사(第十四) 겸선교판(兼禪敎判) 자운당(慈雲堂) 윤눌(潤訥) 대사가 임진년(1592)의 부역(負役)에 통제사(統制使)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분투하여 나라를 지키다가, 창과 화살에 맞아 들판에서 죽으니 충무사(忠武祠)에 배향(配享)하였다. 【예조첩(禮曹帖)에 부종수교(扶宗樹敎) 전불심일(傳佛心日) 겸판선교사(兼判禪敎事) 우세승풍(祐世僧風)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 겸 대선사(兼大禪師) 기인보국(起仁輔國) 자운등계자(慈雲登階者)라고 되어 있다.】 제십오(第十五) 중관 해안(中觀海眼, 1567~?) 선사는 청허 휴정(淸虛休靜)의 고제(高弟)다. 오랫동안 화엄사 용문암(龍門庵)에 주석하며 일찍이 지리산 대화엄사의 사적을 지었고, 임진년(1592)에 진주에서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남원 귀정사(歸政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제십륙(第十六) 청매당(靑梅堂) 인오(印悟, 1543~1623) 선사가 명을 받들어 조사위(祖師位)를 정하니 조당(祖堂)이 다시 열렸다. 【『청매집(靑梅集)』에 '제5대성사문(祭五大聖師文)'이 있다.】 제십칠(第十七) 벽암(碧巖) 국일도(國一都) 대선사(1575~1660)가 연기대사의 법석(法席)을 이어서 원선(圓禪)의 두 가르침을 크게 넓히니, 조사(祖師)의 도가 크게 일어났다. 또 국가에 공이 있었으니 그가 남긴 공훈이 역사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법명은 각성(覺性)이다. 인조 갑자년(1624)에 남한산성을 쌓았는데 승려 각성을 팔도도총섭으로 삼아 치도(繼徒)가 성을 쌓는 것을 통솔하였다. 병자년(1636)에 성을 쌓는 일이 끝나자 그 공으로 보은천교원조 국일도 대선사가 되었고 의발을 특별히 하사하였다.】 제십팔(第十八) 대가당(待賈堂) 희옥(熙玉) 도승통(都僧統)이 벽암국사와 더불어 함께 국가에 공이 있었던 관계로 나라에서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 대선사(大禪師)를 하사하였다. 【남한산성을 쌓을 때 팔도도승통 겸 남한도총섭 직위를 정하는 첩(帖)을 하사하였다. 희옥이 만방으로 부휴를 (그 직(職)에서) 면하게 하려고 하여, 이에 부휴의 법제(法弟)였던 벽암을 선택하여 공무를 집행하였다.】 제십구(第十九) 백곡당(白谷堂) 처능(處能, 1617~1680)이 자리에 올라 벽암(碧巖)의 향기로운 자취를 이어 불일(佛日)을 크게 밝혔으며, 또 판선교(判禪敎) 도총섭(都摠攝)으로서 불교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게 되자 불교를 폐하는 것을 간(諫)하는 소(疏)를 올려 논의가 잠잠해졌으니, 이때 총림(叢林)이 그에게 도움을 받은 바가 있었다. 【현종 2년(1661)에 도성내에 자수원과 인수원 등 비구니가 거처하는 두 곳 절을 폐하라는 명을 내렸다. 이는 부제학 유계의 상소 때문이었다. 처능이 상소를 올려 간(諫)하였다.】 제이십(第二十) 겸팔도도통섭(兼八道都摠攝) 계파당(桂城堂) 성능(聖能, 생몰년 미상)이 자리에 올랐고, 계파가 역시 벽암(碧巖)의 법석(法席)을 이어 불당을 새로 지었다. 또 팔도도총섭으로서 북한산성을 쌓았고 승규(僧規)를 통솔한지 30여 년에 전국의 선림(禪林)이 그를 의지하고 그에 힘입은 바가 있었다. 【선사가 『북한지(北漢誌)』를 편찬하였다.】 제이십일(第二十一) 혜암당(惠庵堂) 윤장(玧藏, 생몰년 미상) 대사가 총림(叢林)이 추촌(追尊)하여 도총섭(都摠攝) 직위를 3번 지냈다. 감사(監司)의 무고를 받아 제주로 귀양가서 잡혀있었다.【순천 대흥사에서 강설하다가 화엄사로 옮겨 강단을 열었으며, 1,500여 무리가 그를 따라 40여 리에 늘어섰다. 감사의 무고를 입어 귀양을 갔다.】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신라 무무왕(文武王, 재위 661∼681)의 명을 받아 화엄경 80권을 돌에 새겨 보관하였고, 헌강왕이 죽으니 왕비 권씨가 명복을 비는 데 도움을 주고자 상재(上宰) 김보림(金甫林), 소판(蘇判) 김일(金一) 등에게 명(命)을 내려 화엄경을 돌에 새기고, 각황전벽간경(覺皇殿壁間經)으로 삼았으나 6번이나 불에 넘어져 부셔졌다. 옛 것을 좋아하는 세인(世人)들이 파편을 감추어 가져 가니 지금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이 헌강왕을 위해 화엄경사(華嚴經社)를 결성하였다고 하며, 별대덕(別大德) 현준(賢俊)이 정강왕 때에 광학장(光學藏)을 세우고 화엄경사(華嚴經社)를 결성하여 진(晉) 나라 의희본(義熙本) 화엄경 60경과 당(唐) 나라 정원본(貞元本) 화엄경 40권을 필사(筆寫)하니 화엄종(華嚴宗)이 이때에 크게 떨쳐 일어났다.
  • 각황전(覺皇殿): 1동, 2층, 가로 7칸 세로 5칸, 이진휴(李雲休) 서액(書額)
  • 대웅전(大雄殿): 5칸, 의창군(義昌君) 이광(李光, 1589~1645) 서액
  • 원통전(원통전): 3칸
  • 나한전(羅漢殿): 3칸
  • 명부전(冥府殿): 5칸
  • 응향각(凝香閣): 3칸
  • 삼전(三殿)
  • 영산전(靈山殿)
  • 적묵당(默黙堂)
  • 보제루(普濟樓)
  • 종각(鐘國)
  • 만월당(滿月堂)
  • 천왕문(天王門)
  • 금강문(金剛門)
  • 덕장전(德藏殿)
  • 일주문(一柱門): 의창군(義昌君)이 지리산화엄사(智異山華嚴寺) 6자를 썼다.
  • 부도전(浮屠殿): 대원왕(大院王)이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5자를 써서 걸었다.
  • 9층사리탑(九層舍利塔)
  • 개산조(開山祖) 연기부도
  • 9층탑(九層塔)
  • 등롱(燈龍): 내량(奈良) 동대사(東大寺)의 등롱(燈籠)과 더불어 동양의 쌍벽이라 한다.
  • 로주(露柱)
  • 5층탑찰간(五層塔刹竿)
  • 종동(宗憧)
  • 석지옹(石池翁)
  • 벽암비(碧巖碑)
  • 자운승부도(慈雲僧浮屠)
  • 부용부도(芙蓉浮屠)
  • 소요탑(逍遙塔)
  • 연기탑(緣起塔)
  • 연기모탑(緣起母塔)
  • 벽암부도(碧巖浮屠)
  • 5층덕운탑(五層徳雲塔)
  • 용담부도(龍潭浮屠)
  • 운곡선사부도(雲谷禪師浮屠)
  • 송송대사부도(松松大師浮屠)
  • 희견보살상(喜見菩薩像)
  • 홍각등계첩(弘覺登階帖) 1매: 천계(天啓) 2년(1622) 3월 하사하였다.
  • 대선사각첩(大禪師覺帖) 1매: 천계(天啓) 2년(1622) 9월 하사하였다.
  • 보은천교원조(報恩闡敎圓照) 국일도(國一都) 대선사(大禪師) 교지(敎旨) 1매: 천계(天啓) 6년(1626) 11월 하사하였다.
  •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 승격첩(昇格帖) 1매: 순치(順治) 7년(1650) 6월 하사하였다.
  • 동승격(同昇格) 도총섭(都摠攝) 사령서(辭令書) 1매: 순치(順治) 7년(1650) 6월 0일
  • 대화엄사위선교양종대가람(大華嚴寺爲禪敎兩宗大伽藍) 승격첩(昇格帖) 1매: 강희(康熙) 41년(1702)
  • 삼보인(三寶印)하사 예조문서(禮曹文書) 1매
  • 남한북한(南漢北漢) 팔도(八道) 승군(僧軍) 통제(統制) 총융청(摠戎廳廳) 공조연서완문(工曹連書完文) 1매
  • 선조어필첩 금자(金字) 1부, 법화경 금자해서(金字楷書) 1부, 금잔(金盞) 1쌍, 금제유정용두(金制鍮鉦龍頭) 및 당모양(唐模樣) 1개 (인조(仁祖) 4년(1626) 벽암선사(碧巖禪師)에게 하사하였다.)
  • 벽암 국일도 대선사 가사 1벌
  • 서산대사 가사 1벌
  • 발우 1건
  • 대범종(大梵鐘) 1개
  • 고(鼓) 1개
  • 전답(田沓) 총 1,003두락 23만 1,924평
  • 산림(山林) 225만평
경신년에 국내의 큰 사찰을 30본사(本寺)로 정하고 나머지는 말사(末寺)를 삼아서 본사에서 관리케 하였더니, 화엄사가 잘못 순천 선암사의 말사로 편입되었다. 화엄사가 선암사와 더불어 다투어 상부에 원통함을 말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작년 12월에 선암사가 김학산(金鶴傘)이라는 중을 보내 화엄사의 주지라 칭하고 관리를 하려고하니, 뭇 승들이 모여들어 김학산을 때려 죽게 하여 화엄사 중에서 지금 감금된 자가 장보운(張普雲) 등 14명이다.(금년 여름 조사관이 와서 이 절이 말사가 된 것은 학무과장 도변(渡邊)이 사악한 일을 한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춘추(春秋)의 주의(誅意)법으로 이를 논하자면 도변(渡邊)이 우두머리요 학산이 종이 된다.) 사보은천교원조 국일도 대선사 벽암비명 무릇 유학(儒學)과 불교(佛敎)는 도(道)를 이루는 것이 달라서 서로 같이하지 못하여도, 행업(行業)을 살펴보면 역시 보고 느끼는 것과 관련이 있다. 공곡(空谷)에서 빛을 숨기고 은거하는 것은 오히려 독선에도 미치지 못하는 것이나, 기원(祇園)에서 은혜를 베풀면 공(功)은 세상을 널리 구제하는 쪽으로 무성해져서, 큰 비석에 영원히 드리울 것이니 실로 선림이 만족하리라. 벽암대사의 상족(上足)이 천리길 산과 물을 넘고 건너 서호(西湖)에 있는 나를 찾아와서, 손에 행장(行狀)을 들고 비명(碑銘)을 청함이 날이 갈수록 더욱 절실해지니, 내가 차마 그 정성을 져버릴 수가 없어서 마침내 행장(行狀)에 의거하여 서문(序文)을 짓는다. 대사의 법명은 각성(覺性)이요 벽암(碧巖)은 호다. 호서(湖西) 보은(報恩) 사람이다. 속성은 김해 김씨(金氏)요. 그 선조는 의관(衣冠)이었다고 한다. 대사의 부친이 일찍이 현(縣)의 서쪽에 복거(卜居)하니 관상가가 말하길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큰 승려가 되리라고 하였다. 모친 조씨(曺氏)는 자식이 없어서 부부가 같이 재결(齋潔)하고 북두(北斗)에 기원하고, 꿈에 오래된 거울을 보고 임신을 하여 대사를 낳으니, 만력(萬曆) 을해년(1575) 12월 정해일이었다. 풍채와 골격이 상응하고 눈망울이 번개처럼 빛났다. 부모에게 효도를 지극히 하였고, 어려서도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9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슬픔이 지나쳐 겨우 회복하였다. 상(喪)이 끝난 후 홀연 지나가는 중을 만나니 마음이 선(禪)을 배우는 데로 기울었다. 어머니를 거듭 떠나며 돌연 느끼고 깨우치는 바가 있어 마침내 화산(華山)으로 가서 설묵 대사에게 예(禮)를 표하고 그를 스승으로 섬겼다. 14세에 머리를 깍고 보정 노사에게서 구족계를 받았다. 부휴대사(浮休大師)가 화산(華山)에 도착하여 그를 크게 기이하게 여기며 진실한 법을 가지고 힘쓰게 하니, 이에 부휴대사를 따라 속리산에 들어가 덕유산, 가야산, 금강산 등을 두루 돌며 매일 패엽(貝葉)을 보았고, 이로부터 서로 따르며 잠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임진란(1592) 때에 송운(松臺) 유정대사가 의려군(義旅軍)을 불러 모아 동쪽을 막으니 부휴대사를 대신해서 가서 안부를 물었고, 산에서 도적을 피하고 있을 때도 반드시 손에 경문(經文)을 들고 어려운 곳을 물어보았다. 계사년(1653)에 송운 유정대사가 부휴대사를 조정에 천거하여 격문을 써서 부르고 위에 아뢰니, 대사 역시 칼을 지팡이 삼아 천장(天將)을 따라가서 바다에서 적을 물리치니, 명나라 사람들이 대사를 보고는 지극히 칭찬을 하였다. 경자년(1660)에 칠불난야(七佛蘭若)에서 하안거(夏安居)를 할 때 부휴대사가 병이 들어 강의를 접고 대사에게 양도했다. 사양을 해도 어쩔 수가 없어서 자리에 올라 토론을 하여 심원한 도(道)를 크게 떨쳤다. 병오년(1666) 가을에 어머니 상(喪)을 당하자 문도(門徒) 대중과 헤어져서 속리산 가섭굴(迦葉窟)에서 명복을 비는 제사를 올리며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바를 능히 감당해 내었다. 부휴대사(浮休大師)의 문하에서 공부를 한지 20여 년에 입실(入室) 제자로서 법(法)을 전수(傳受) 받고, 계(戒)를 수행함이 특히 뛰어났으며, 연(緣)을 따라 여러 가지 현상이 나타나도 담담하였다. 곡식을 끊어도 배가 고프지 않았고, 밤을 새워도 졸지 않았으며, 항상 낡고 얇은 옷을 입고 방장실(方丈室)에서 결가부좌하니, 책상자를 짊어진 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감로(甘露)가 두루 뿌려졌다. 스스로 삼잠(三箴)을 지어서 문도(門徒) 제자(弟子)들을 경계하였는데 대개 “생각에는 간사함이 없어야하고, 얼굴에는 부끄러운 빛이 없어야 하며, 허리는 굽히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신령스런 눈빛을 한 번 비추매 물이 잔잔해져서 빛을 머금고, 화엄경을 엄숙히 게송하니 큰 귀신이 퇴각하였으며, 깨끗한 땅에 시체를 묻으니 요괴가 홀연 사라졌고, 사나운 호랑이가 길을 지켜줌에 이르렀으며, 순한 까마귀가 어깨에 모여들었다. 닭을 사로잡아 살려주니 보답할 줄 알고, 고기는 그물을 불사르니 감사함을 머금었다. 날고 달리는 것들도 교화(敎化)가 되거늘 하물며 가장 영험한 인간에게 있어서랴? 뭇 산의 많은 사찰(寺刹)을 만들거나 중수(重修)하였으니 쌍계사(雙溪寺)의 동찰(東刹)과 화엄사(華嚴寺)의 중창(重創)과 송광사(松廣寺)의 가람(伽藍)이 그 큰 것이요 나머지는 생략한다. 광해군(光海君) 때에 옥사(獄事)가 일어났는데 부휴대사와 대사가 요승(妖僧)의 무고를 당하여 함께 서울로 압송되니, 광해군이 두 대사를 보고는 기이하게 여겨 방면(放免)하여 부휴대사는 산으로 돌려보내고, 대사는 봉은사(奉恩寺)에 머물게 하여 판선교도총섭(判禪敎都總攝)으로 삼으니, 경사대부(卿士大夫) 등 많은 이들이 함께 하였고, 동양위(東陽尉)가 특히 서로 좋아하였다. 얼마 되지 않아 남쪽으로 되돌아갔다. 인조(仁祖) 때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쌓을 때, 의론(議論)하는 자들이 임금에게 대사를 부를 것을 아뢰어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으로 삼았다. 승려를 영솔하고 감독하여 3년 만에 공사마침을 고(告)하니, 보은천교원조 국일도 대선사 호칭을 하사하였고, 의발을 같이 하사하였다. 병자년(1636)에 지리산에 있으면서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행차한다는 것을 듣고는 이에 북을 울리고 울면서 문도(門徒)를 깨우쳐 말하길 ‘우리 승려들도 또한 왕의 백성이요. 널리 세상을 구제하는 것을 근본으로 삼는데, 나라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 앉아서 보기만 하랴?’하고는 곧 군복을 입고 일어나서 격문을 돌려 남도의 승려를 모으니 수 천 명이었다. 서로 이끌고 북으로 가다가 도중에서 적이 물러갔다는 소리를 듣고는 통곡하면서 다시 남쪽으로 내려왔다. 뒷날 일본에 사신(使臣)으로 갈 것을 명(命)하니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나섰다가 중도에 이르러 노환이 심해지므로 산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효종(孝宗)이 아직 잠저에 있을 때 손수 편지를 보내고 먹을 것을 보내더니, 왕위에 올라서는 조정(朝廷)의 의론(議論)을 수용하여 총섭직(總攝職)을 제수하고, 적상산(赤裳山)의 사고(史庫)를 지키게 하였다. 앉아서는 남쪽 승려의 기풍을 교화하고, 널리 진실한 교법(敎法)을 펼치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뭇 명산을 떠돌아다녔으니, 위로는 부안(扶安)의 변산(邊山)에 오르고, 아래로는 남해(南海)를 굽어보았고, 다시 화엄사의 방장실(方丈室)에서 생활하였다. 기해년(1659) 여름에 효종(孝宗)이 승하하니 휘(諱)를 받들며 슬피 울었다. 그해 가을 9월에 약한 감기 기운이 있었는데, 문도(門徒)들에게 행업(行業)에 힘쓰고 나라의 은혜에 보답하라 일렀으며, 비(碑)를 세우지 말라고 하였다. 경자년(1660) 정월 12일에 제자들이 대사가 장차 입적(入寂)하려는 것을 알고 게송(偈頌)을 청하니 이에 붓대를 잡고 쓰기를 “대장경 팔만 게(偈)와 염송(拈頌) 30권이 이리(二利)에 충분한데, 무엇하러 별도의 게송(頌)을 짓겠는가?” 하였다. 이윽고 태연하게 돌아가시니 세수(世壽) 85세 선랍(禪臘) 72세였다. 공손히 모시어 다비를 행하니 삼남(三南)의 각 절에서 온 칠중(七衆)이 골짜기를 가득 메웠고, 사리 3개가 나오니 절의 서쪽 기슭으로 가서 사리를 석종부도에 묻었다. 대사가 불교를 계승한 것은 부용 영관대사로부터 온 바가 있가 있고, 임제(臨濟)가 남긴 법(法)을 잡은 것이다. 부휴대사, 청허대사, 휴정대사가 모두 영관대사를 모셨으며, 휴정대사가 송운 유정대사에게 법을 전하고, 부휴대사가 벽암에게 법을 전했다고 한다. 저술한 것으로는 『선원집(禪源集)』, 『도중결의(圖中결의)』 1권, 『간화결의(看話결의)』 1편, 『석문상의초(釋門喪儀抄)』 1권이 있으며 그 제자들이 많이 현관(玄關)을 열었다. 비명(碑銘)을 청한 자는 계율(戒律)이니 내가 일찍이 도남(圖南)했을 적에 벽암이 구례현으로 와서 보고 나에게 계장(桂杖)을 주었을 때 계율(戒律)이 따라왔었고, 수년 전에 계율이 다시 낙하(落下)에 있는 나를 찾아온 적이 있으며, 지금은 대사를 위하여 왔으니 참으로 각별하다 하겠다. 이런 관계로 비명(碑銘)을 짓는다. 대사의 높은 행동 효친(孝親)이 근본이며, 속세를 버림으로 진여(眞如)를 얻었도다. 지혜(智慧)의 칼로 의심을 끊어 내매, 깨달음의 동산에서 무리보다 뛰어났고 자비(慈悲)로 대중을 구제할 때는, 나루를 건너는 보벌(寶筏)이었도다. 수많은 미혹(迷惑) 한 번에 뚫리니, 한밤에 새벽을 얻은 듯 하였고, 바다에서는 큰 고래가 따르고, 산에서는 사나운 호랑이가 복종하였도다. 고기는 연못에서 즐거워하고, 까마귀는 집에서 따랐으며, 은혜(恩惠)는 대천(大千) 세계에 두루 퍼졌고, 의로움은 어려움을 구할 때 드러났도다. 공(功)은 성루(城樓)에 있고, 도(道)는 연이은 봉우리 같이 높았으니, 몸은 선림(禪林)에 있었어도, 마음에는 나라뿐이었도다. 외로운 구름은 머무르지 않고, 가는 파도는 그치지 않으매, 학(鶴)은 가까이 머물 곳을 잃고, 갈매기는 깨어진 잔에 놀랐도다. 산천(山川) 색(色)이 변하니 용상(龍象)에게 슬픔이 일어났지만, 빈가(頻伽)가 남긴 소리는 아직 저 멀리 구름을 두르고 있도다. 눈에는 아직도 빛이 남았고 정신(精神)도 모두 사라지지 않았으니, 오직 바위처럼 우뚝 솟아 세세(世世)토록 홀로 푸르리라. 강희(康熙) 2년(1663) 계묘(癸卯) 8월 세우다. 이경석(李景奭)이 짓고 오준(吳俊)이 쓰다. 조계원(趙啓遠)이 전액(篆額)을 썼다. 화엄선암 본말사 경쟁전(華嚴仙巖本末寺競爭傳) 조선(朝鮮)의 명산(名山) 고찰(古利)이 왕왕 많은 군(郡)에 바둑알이 뿌려진 것처럼 있으나, 오직 구례(求禮)의 화엄사(華嚴寺)와 순천(順天)의 선암사(仙巖寺)가 세상에서 천년고찰로 일컬어진다. 그러나 화엄사는 백제 성왕 22년(544) 중국 양무제(梁武帝) 대동(大同) 10년(544)에 창건되었으니, 화엄사의 고문서에 자세하게 나와 있으며, 또 삼국의 역사에도 실려 있으니 순천의 선암사와 더불어 스스로 선후(先後)의 구별이 있다. 한사(韓社)가 무너지고, 소위 상부(上府)에서 파견한 승려들이 신법(新法)의 와중에서 종종 일을 만들어 낸 것이 이미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국내의 사찰을 그 창시(始)의 선후(先後)를 밝혀서, 선자(先者)는 본사(本寺)로 삼고 후자(後者)는 말사(末寺)로 삼는다고 하였다. 이는 상부(上府)의 훈령(訓令)이지만 구례의 화엄사와 순천의 선암사는 상호간에 서로 본사(本寺)라는 각자 지론(持論)을 가진 시간이 약간 흘렀다. 순천 선암사의 중 김학산(金鶴傘)이 평소 부도지협(浮屠之俠)으로 나이가 오십이 넘었어도 일을 만나면 풍파를 일으키고, 승려로서 두려워하고 복종해야 하는 것을 생각지 않으므로, 비록 마을의 소년일지라도 괴이하게 여겨서 쳐다보지 않음이 없었다. 마침 선암사의 본사 말사 논쟁을 만나니, 그 무리 5, 6명을 이끌고 샛길로 화엄사에 들어와서, 화엄사의 뭇 승려를 손으로 불러 모으고 두 다리를 뻗고 앉아 눈을 부릅뜨며 말하길 “나는 선암사의 중 학산이다. 너희가 들어본 적이 있는가? 지금 내가 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선암사와 화엄사의 본사 말사 여부는 내가 결단하리라. 화엄사의 차례를 말하자면 마땅히 선암사의 말사에 처한다.”고 하며, 이로써 하늘을 가르키고 땅에 그림을 그리며, 여기서 여기까지라고 말을 하니, 말이 다 끝나기 전에 절의 뭇 승들이 한 입으로 침을 뱉으며 욕을 하고, 화엄사의 삼국(三國) 이래 창건(創建)을 기록한 문서를 제출하여 일일이 가리키며 고증(考證)을 하니, 학산이 눈을 흘겨보다가 한참 지나서 말하길, “자그마한 사실은 내가 취할 바 아니다.”하며 손을 들고 목소리를 높여 말하길, “너희들이 내 말을 듣지 않으면 장차 우환이 도래하리라.”하고는 마침내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학산이 다시 5, 6명의 무리를 이끌고 화엄사의 적묵당에 와서 앉고는 뭇 승(僧) 등을 불러 모아 말하길 “나는 선암 본사의 허가를 받아 지금 화엄 말사의 주지가 되어 왔다. 너희들이 모두 알았으니 나를 따르고 또 말사의 신구(新舊) 부첩(簿牒)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주지라는 것은 절의 우두머리 승(僧)이며 예전의 소위 총섭(總攝)이라는 것이다. 이때에 절의 크고 작은 승려들이 북을 한 번, 두 번 울리매, 세 번째 울리기도 전에 일제히 적묵당 위에 일어서서 용감하고 예리한 승려 14명을 뽑아 한 목소리로 서로 응(應)하며 말하길 “어찌 이놈을 박살내지 않으리오?” 하면서, 이쪽 저쪽에서 손으로 그를 때리고 마침내 절 문 밖으로 끌어내어서 팔죽지를 꺾고 이빨을 부러뜨려서 마을 입구 서촌(西村) 가게에 이르러 버리니, 몸을 뒤척이며 끙끙 앓은 지 삼 일 만에 학산이 죽었다. 이때에 순사가 곁에 있어서 본 군(郡)의 경찰서에 보고하니 14명의 중들이 먼저 스스로 죄수가 되어 경찰서로 달려가기를 다투어서, 수일만에 경찰서에서 순천으로 압송되고 또 순천에서 광주법원으로 압송되었다. 법원에서 그 해를 보내며 각자 살인죄로 징역형을 받았다고 한다. 묘원자(卯園子)가 말하길 우리 군에서 공자를 배우는 자들은 그 불자(佛者)의 무리를 모두 방외(方外)의 무리로 보나, 가령 우리 군(郡)의 일로 다음에 그런 횡역(橫役)이 와서 학산과 같은 부류가 있게 한다면, 군(郡)의 인사들이 당일 처리하는 바가 과연 14명의 중들이 선두를 다투어 출두하는 것과 같이 할 자들이 몇 명이나 되겠는가? 승려들이 한 행위가 진실로 패악한 행위이나 5백 년에 겨우 한 번 볼까 하니 전하지 아니할 수 없다. 임술년 10월 5일 소회산방거사(小晦山房居士) 양천(陽川) 허규(許奎) 짓다.(이상 순종 임술지조등(照謄)) 각황전중수전말(覺皇殿重修顚末) 각황전(覺皇殿)은 곧 본사의 대법당(大法堂)이다. 신라 문무왕 때에 의상법사(義相法師)가 창건하고, 고려 때는 왕궁에서 국고금을 기부하여 개수하였고, 조선 숙종(肅宗) 때 크게 중수(重修)한 이후 3백 년에 서까래는 무너지고 단청(丹靑)은 흐릿해지고, 지붕의 이끼가 끼는 것이 나날이 급하게 되나, 절은 힘이 없어 다만 어찌해야 하나만을 부르짖을 뿐이었다. 선사(禪師) 진응 혜찬(震應慧燦, 1873~1942)이 경륜(經倫)으로 처리하려 하여도 결과가 없었다. 순종(純宗) 후 25년 임신년(1932)에 이르러 만우(曼宇) 정병헌(鄭秉憲, 1891~1969) 화상(和尙)이 주지가 되어서 정성을 갖추고 총독부(總督府)에 탄원하여 후한 도움을 얻었고, 도(道)와 군(郡)이 향응하며 또 각 사찰(寺利)이 차례대로 정성을 보내오니 모금한 돈이 총 12만여 전(錢)이었다. 이로써 병자년(1936)에 집을 짓기 시작하여 신사년(1941)에 이르러 공사를 마치니, 6년의 기한동안 공사(公私)가 협동하여 재물을 모으고 공사(工事)를 감독하여 모두 걷어내고 새로 지어 새로운 자재로 꾸미니 대단히 아름다웠다. 이는 실로 법계(法界)의 일대 위업이며, 역대 중수(重修) 역사상 가장 큰 일이었다. 국내 삼대 건물 중에 하나이며 국보 제378호가 되었다. 광복 후 기축년(1949) 여순사변에 지장암(地藏庵)과 절 근처의 여관이 파괴되고, 경인년(1950) 동란에 내원암(內院庵)과 보적암(寶積庵)이 파괴되었다. 신묘년(1951)에는 작전(作戰)으로 인해 산승(山僧)들이 하야(下野)하였으며, 절이 빈지 7년 만에 상원암(上院庵), 보운암(普運庵)과 만월당(滿月堂: 寺宗務所)이 화재로 소실(燒失)되었다. 을미년(1955) 11월에 이승만 대통령 사찰(寺刹) 정화유시(淨化諭示)로 인해 외래 비구승들이 입주하였다. 병신년(1956)에 김갑용(金甲用) 대사가 황전리 북쪽에 법장암(法藏庵)을 창건하였고, 같은 해 김서구(金西九) 대사가 봉성산 기슭에 충령사(忠靈寺)를 건축하였다. 정유년(1957) 8월에 재래승(在來僧)이 외래승과 더불어 광주지방법원 순천 지원에 소송을 하고, 사찰가처분하에 입주하였다. 무술년(1958) 1월에 가처분이 일부 취소되었으며, 재래승이 봉천암, 구층암, 금정암에 주거하였고, 3월에 재래승이 순천지원에서 승소하였다. 기해년(1959) 7월에 또 광주고등법원에서 승소하고, 박원응(朴源應) 대사가 지장암(地藏庵)의 옛 터에 도석암(道石庵)을 중건(重建)하였다. ※출처: 구례향교 저, 구례역사문화연구회 한장원·김정복 옮김,『속수구례지』 상·하, 구례문화원, 2009. *이 책은 저작권법의 보호를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복제를 금하며, 이 책의 전부 혹은 일부를 이용하려면 반드시 사전에 구례문화원의 동의를 받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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