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성지』는 1800년(정조 24) 현감(縣監) 김최행(金最行, 생몰년 미상) 등이 편찬한 구례 지역의 읍지로 건치연혁, 행정구역 명칭, 성씨, 풍속, 산천, 토산, 학교, 역(驛) 등 인문지리와 행정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화엄사에 대한 기록은 경오등록서(庚午謄錄序, 1870)의 지소청(紙所廳) 절목(節目), 불우(佛宇), 고적(古跡), 절의(節義), 제영(題詠) 편목 등에서 보인다. 1870년 현감 이우석(李禹錫, 1819~?)이 쓴 경오등록서에는 영문(營門)과 관아에서 사용하는 종이를 책임지고 조달하는 지소청에 그 값으로 화엄사에서 41냥(兩) 5전(錢)을 차출한 일이 적혀 있다.
불우 편에서는 화엄사의 지리적 위치, 옛 명칭인 황둔사(黃屯寺)에 대한 소개, 창건(544)과 신라시대의 연혁, 『화엄경(華嚴經)』(80권)의 석경 제작,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당시 화엄사 승의군의 활약과 왜군에 의한 화엄사의 소실, 벽암 각성의 중창, 각황전의 중건, 전각 및 소속 암자의 명칭 등이 수록되어 있다.
정유재란 석주관 전투 당시 화엄사의 활약은 고적과 절의 편에도 기록되어 있다. 고적 편에서는 화엄사 홍(弘) 화상과 정유일기를 소개하며 화엄사에서 군량 103석과 승군 153명을 지원했음을 기록하였고, 절의 편에서는 화엄사에서 군량미와 승군을 지원한 일을 기록하였다.
원문
○ 庚午謄錄序, 縣監李禹錫
夫事之大小而弊未嘗不隨則其捄弊之責在人而
不在乎事也是以弊之大者易見而或優游因循小
者易忽而或潛滋暗長不有變通之道則俱底於莫
可收拾之域者一也雖以一事之微苟有弊汲汲焉
救之如不及何況膺百里分憂之 命係萬姓咨怨
之弊也哉顧此彈丸一縣介在泰山嵁巖之中蕭然
十室荒涼特甚客館衙舍之外各樣公廨之不可無
者固已多闕雖其存者擧皆頽圮不成貌樣而草舍
居半竝與許多繚垣而晝茅宵綯春秋覆蓋之役督
責於民民之愁苦也久矣糴而外峙風雨不除朽敗
相仍民之鮮食者亦病之余於莅政之初已諗其民
瘼莫大於斯妄生修擧之圖以效一日之責而邑弊
財嬴計無所出或圖債营门或捐俸區劃鳩材陶瓦
募工設施露者倉之草者瓦之 聖廟焉庖廚之館
宇焉廏廊之犴圉而庫之房之以至于武院奴廳而
凡新構者五十有餘間官廳書所戎廨補庫之屬掇
補修葺者亦幾如之各處墻垣之周遭重複者通計
爲一千數百間而幷代甎瓦庭楹之蕪穢者門關之
欹圮者一切釐正然後稍變爲假門樣子不但觀瞻
之一新其於苫覆朽粟之弊庶可永除而紵窮民一
分之力矣邑有古城而敗堞弊關全沒備禦之勢而
其控扼之形江山之勝最藉南門故遂乃繕治而仍
創一樓於其上蓋取麗譙之制而兼作遊觀之所樓
觀有無似不有關於民瘼而關防由是而增重山水
由是而增輝則其於疏虞荒蕪之弊不可謂等閑也
嗚呼余以不才猥荷民社之寄來典此土已閱歲籥
而惠不究民徒事末務营繕半載貽弊民間豈不歉
然而此出於一勞安民之計則蔀屋生靈亦應垂恕
而不抵於虐民之歸歟且念惟務目前不思來頭則
不出數年其弊自如不有悠遠之計策殊無祛瘼之
實效創設一廳名之曰修理廳置水田貯米斛逐年
取殖以爲隨毁隨補之資而定監色董其事凡係修
理之役使之專管物力旣些事且草創非敢曰大有
禆益而若言其爲民祛弊焦思竭慮則備矣至於愈
久藉力之責都在於任掌者勤慢節用之如何而固
不關於初頭財力之多寡耳後來君子諒我設立之
意另加申飭有始有終使闔境殘氓保有實惠則豈
非幸歟有節目
紙所廳卽营門及官用紙地責應之所
每戶租一斗式收合以給助役價華嚴寺四十一兩
五錢淸溪寺二十一兩各面錢四十四兩燒木代錢
十六兩官需米二石作爲本價取用氷庫在縣北白
蓮洞下舊在縣西今移于此監官一人座首兼察 色吏一人
戶長兼察 庫子二名 藏氷所以供 進上也每
戶四丈式鑿納其弊莫甚縣監李宗祥捐俸出四百
兩錢付于蠲役廳以什三例取殖又落穀中米二十
石亦爲添補隨年貿藏永蠲民瘼
○ 佛宇, 華嚴寺
(華嚴寺) 在縣東十里智異西麓 鷄林古記一名黃屯
寺 梁武帝大同十年 新羅眞興王所創 唐貞觀新羅
善德王時 慈藏大師建塔 唐高宗新羅眞德王 朝元
曉大師 設講於海㑹堂 文武王時 國師義湘承王
命 以石板刻華嚴經八十卷 留于寺 景德王時 勅
令重新 其時大寺八屬菴八十一 憲康王時道詵
國師繼創修道 萬曆丁酉倭入石柱時 本邑義兵
爭赴備禦 寺僧亦應檄軍糧一百三石運下僧軍一
百五十三名 與諸義士同死於賊 賊銜憤入寺 放火
三層法堂碎盡所藏石板 石片至今積在
仁祖朝以覺性僧爲八道都總攝 築南漢城訖 賜報恩
圓照大禪師號寺 前有碑【白軒李景奭撰提學吳峻書】 大雄殿【義昌】 君書額
左右石塔高十餘丈 覺皇殿【參判李震休書額】 有丈
六三佛 觀音殿 羅漢殿 冥府殿 普濟樓
禪堂 僧堂 啓明寮 滿月堂 德藏殿 天王
門 金剛門 一柱門【義昌君書額】 (屬庵)九層 鳳泉
影仙 內院 金井 浮屠殿【有石塔藏釋伽舍利】 寶積
上院 億萬庫在洞口遺址尙存 赤旗菴在文殊
洞 我
太祖討倭雲峯時使先鋒豎 赤旗於此以覘石柱故名焉
○ 古跡(古蹟)
肅宗癸未因持平崔啓翁疏贈兵曹參議【貢生入積屍中得生詳言
公死節事還入死】貢生亦享別廟姓孫名無傳王義成與
李廷翼韓好誠梁應祿高貞喆吳琮倡義討賊時檄
文寄書華嚴寺和尙僧弘【一字缺】別無他言當此國
家板蕩之時亡親【王義成父得仁】首義興兵接戰石柱矢窮
力盡天時不利痛切終天痛切終天肆余踵義收殘
將報君恩更雪父讐方進石柱之際李生員廷翼
韓生員好誠梁生員應祿高生員貞喆吳生員琮各
率奴僕百餘名搜乞山野又得避亂人數百名同聲
齊㑹擊殺倭賊累百嬴糧告乏餘卒盡飢奈何奈何
汝等亦是王化中一民應有一死之心幸率多小
緇徒兼負寺穀以助一心勤王以完大事千萬幸
甚丁酉某月某日蠹破石柱義兵所六義士列書姓名華嚴寺丁
酉亂日記糧一百三石運下石柱大將所僧軍一
百五十三名與諸義士同死於一字缺中本縣監洪
彝浩報狀云前而檄紙爲起義之眞蹟後而日記爲
死節之明證谷城縣監金熙采以藏發差使過石
柱見地勢之要衝慨七義士泯沒以設鎭置防褒忠
獎節之義上疏爲道伯所止湖西過客詩石爲
天柱處義士昔防秋烈日荒城出腥塵古磧收繞辰
星北拱朝海水東流客亦有肝膽醉來擊劍愁都
事鄭胄煥詩磊落七忠義生竝萬曆秋節何綿竹壯
功未朔方收石勢天擎柱川聲血漲流悠悠千古事
殘堞夕陽愁馬峯山城在縣北五里城址宛然瓦
礫堆積三韓時設險避兵之地云沙圖村在縣東
五里僧道詵嘗遇異人於此異人聚沙圖山川逆順
之理授以秘訣云屯垈在縣北十里雲陽令李元遺
墟舊邑基在放光旨郞坪客舍及獄基尙有其
名云
○ 節義
韓好誠字敬甫右議政襄節公礭五世孫參判健曾孫
慷慨有智謀丁酉亂縣監李元春赴死南原一境空
虛乃撃劍奮赴曰國事如此誠得死所遂與同志
義士李廷翼梁應祿高貞喆吳琮各率家僮募兵山
野同進石柱時同鄕王義成以復讐擧義亦到石柱
兩軍合勢大衄賊陣斬獲累百級賊血漬水巖崖盡
赤又傳檄于華嚴寺得軍糧及緇徒以遏賊路俄而
賊之後軍大至衆寡相懸竟死於賊
○ 題詠
寄華嚴寺讀書諸友 海西吳廷吉
夜靜人閑落桂花
禪壇消息問何如
藍田山下應相訪
竹外茅詹是我家
謝諸友見訪客在華嚴寺
烟霞路幾重
寒泉鳴古澗
密竹映疏松
塔影雲邊落
山容雨後濃
長卿多病久
無計得相從
※출처: ‘규장각 원문검색서비스’, 규장각한국학연구원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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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석주관 전투와 화엄사석주관(石柱關)은 전라도의 구례와 경상도의 하동을 잇는 섬진강을 따라 내륙으로 통하는 관문이다. 일찍이 이곳에는 고려 말에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해 진영이 설치되었고, 임진왜란 때에는 진영이 있던 옛 터에 다시 석주관성을 쌓았다. 1597년 정유재란 당시 일본의 군대가 호남으로 진격해 왔을 때, 구례현감 이원춘(李元春, 1554~1597)이 8월 16일 남원성 전투에서 전사하였다. 이후 9월에 구례의 왕득인(王得仁, 1556~1597)이 의병을 모아 일본군과 싸웠으나, 11월에 석주관 전투에서 모두 전사하였다. 왕득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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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사 화상 승□에게 부치는 글1798년(정조 22) 화엄사 대웅전 수리 당시 천정에서 ‘기서화엄사화상승□(寄書華嚴寺和尙僧□)’ 격문(檄文)이 발견되었다. 이 문서는 1597년 정유재란 당시 구례의 석주의병소에서 왕의성(王義成), 이정익(李廷翼), 한호성(韓好誠), 양응록(梁應祿), 고정철(高貞喆), 오종(吳琮)의 6인의 이름으로 작성되어 화엄사 스님에게 보낸 글이다. 문서에는 자신들이 의병을 일으킨 이유와 함께 응변(應變, 사변에 대한 대책을 세우는 것)의 절박함을 적었고, 화엄사 스님에게 군량과 승군의 지원을 요청하는 내용이다. 실제로 당시 화엄... -
각황전 중창 이야기각황전 중창 설화는 숙종(肅宗, 재위 1674~1720)대 왕실의 지원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기반하여, 다양한 유형으로 전승되고 있다. 기본적인 서사는 각황전 중창 배경, 신이한 화주자 선발, 화주자의 신분, 시주자 선발 조건, 시주자의 신분, 사망과 환생, 환생국의 후원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황전 중창 설화는 화엄사 인근의 지리적 요소를 활용하여 사실성을 더한 점이나 공주나 왕자, 황제 등 신분이 높은 사람의 불치병을 고친다는 ‘금척설화’의 소재를 차용한 점, 신이한 현상, 환생 등 불교적 색채가 어우러져 민간으로 ... -
벽암 각성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 스님은 법명이 각성(覺性), 호가 벽암(碧巖), 속성이 김씨(金氏)이다. 스님의 일생은 화엄사에 건립된 국일도대선사비명(國一都大禪師碑銘)과 백곡 처능(白谷處能, 1617~1680) 스님의 『대각등계집(大覺登階集)』에 기재된 행장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각성 스님은 1575년(선조 8) 12월 정해(23일)에 출생하고, 10세에 설묵(雪默) 스님을 스승으로 모셨으며, 15세에 보정(寶晶) 스님께 구족계를 받았다. 스님은 임진왜란 때 해전(海戰)에 참전하였고, 병자호란 때에는 항마... -
계파 성능계파 성능(桂坡聖能, 생몰년 미상)은 법호가 계파, 법명이 성능이다. 1699년 화엄사 장륙전 중건을 시작해 1702년에 완공하였다. 1706년에는 통도사에서 석가여래영골사리탑비를 건립하고, 계단탑을 증축하였다. 1711년(숙종 37) 팔도도총섭(八道都摠攝)이 되어 북한산성(北漢山城)을 축성하였다. 저서로 『북한지(北漢誌)』가 있다. 이 책은 1745년(영조 21) 성능 스님이 도총섭의 직에서 물러날 때 산성(山城)에 관한 일 14조(條)를 지지(地誌)의 형태로 기록한 것이다. 그 내용은 북한산과 산성, 그 일대의 사찰... -
각황전 건축각황전은 대웅전과 직각으로 배치되어 있는 화엄사의 두 주불전 중 하나이다. 석축의 조성수법을 보았을 때, 대웅전 영역보다 각황전 영역이 먼저 조성되었고, 후대 사역이 확장되는 과정에서 대웅전과 다른 건축물이 배치된 것으로 추정된다. 각황전의 왼쪽편에는 영산전으로도 불리는 봉향각이 자리하는데 이 건물이 각황전의 노전이다. 각황전은 전면 7칸, 측면 5칸의 다포를 올린 중층건축물로 지붕은 겹처마에 팔작지붕이고 지붕가구는 상층지붕 기준으로 1고주 7량이다. 대규모 석축으로 대지를 조성하고 건물의 어칸 중심과 석등, 석축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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