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問曰: "汝與金履容酬酢之說, 直告。"
供曰: “金履容果來見, 而蓋年前冷井洞 鄭來謙家, 屢次相逢者也。 金履容問於臣曰: ‘求禮花嚴寺僧允藏, 曾以其寺藏置《鄭鑑錄》之罪, 配黑山島, 而吾素知其人, 能文善誦經矣。’ 臣曰: ‘《鄭鑑錄》, 吾雖未目見, 而聞香嶽之言洋海者, 則其中有曰: 「我國歷六百年後, 有百年干戈之說, 而《眞凈秘訣》, 與《鄭鑑錄》相符云。 所謂三家, 卽鄭、金、劉三姓, 而百年干戈, 吾輩生前, 似無此慮」 云。’ 則金履容亦聞而喜之矣。 至於坤帝玄神等說, 臣果有酬酢, 而洪福榮, 以其妻之沮戲下鄕, 故有此祈禱之事矣。”
※출처: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번역문
정조 9년(1785) 3월 16일 을축 1번째기사
문광겸·홍복영·이율 등을 정국하다
묻기를,
“네가 김이용(金履容)과 주고받은 말을 바른대로 고하라.”
하니, 공초하기를,
“김이용은 과연 와서 만났는데, 대개 몇 해 전에 냉정동(冷井洞) 정내겸(鄭來謙)의 집에서 여러 차례 서로 만났던 사람이었습니다. 김이용이 신에게 묻기를, ‘구례(求禮) 화엄사(花嚴寺)의 중 윤장(允藏)이 일찍이 그 절에 《정감록(鄭鑑錄)》을 숨겨둔 죄로 흑산도(黑山島)에 귀양갔는데, 나는 본래부터 그 사람이 문장에 능하고 경서를 잘 외운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말하기를, 《정감록》을 나는 비록 직접 보지 못하였으나, 향악이 문양해에게 말하는 것을 들으니, 그 가운데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6백 년이 지난 뒤에 1백 년간 전쟁이 있게 된다는 말이 있는데, 《진정비결(眞淨秘訣)》과 《정감록》은 서로 맞아 떨어진다고 하였으며, 이른바 세 집이라는 것은 곧 정가·김가·유가인데 1백 년 동안 전쟁을 하더라도 우리들 생전에는 그럴 염려가 없을 것 같다.’라고 하니, 김이용도 또한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심지어 땅임금[坤帝]이니 현신(玄神)이니 하는 따위의 말에 대해서도 신이 정말로 주고받은 말이 있었는데, 홍복영(洪福榮)은 자기 아내가 시골로 내려가는 것을 저지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기도한 일이 있었습니다.”
하였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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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통사-혜암윤장이능화(李能和, 1869~1943)의 『조선불교통사(朝鮮佛敎通史)』 하편, 선원소류번안호단(禪源溯流飜案護短) 조에 수록된 ‘상현왈(尙玄曰)’의 일부이다. 내용은 혜암 윤장(惠庵允藏, 생몰년 미상) 스님이 화엄사에서 강단을 열자 40리 근방의 대중 1,500명이 그를 따랐는데, 전라도 관찰사의 무고로 제주도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가 문도들의 상소로 풀려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정조실록』 9년(1785) 3월 16일 을축일 첫 번째 기사에서는 스님이 일찍이 『정감록』 사건에 연루되어 흑산도로 유배를 간 일이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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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암 윤장혜암 윤장(惠庵玧藏, 생몰년 미상) 스님은 법호가 혜암, 법명이 윤장으로 18세기에 활동하였다. 스님의 법맥은 조관 용담(慥冠龍潭, 1700~1762)→혜암 윤장→기암 이준(畸庵以懏)→제월 의경(霽月義敬)→응암 치영(應庵致永)→진응 혜찬(震應慧燦, 1873~1941)→철운 종현(鐵雲宗玄)으로 전승되었다. 해남 대흥사에 주석하다가 화엄사로 옮겨 강단을 열었으며, 이때 40리 근방 1,500명의 대중이 스님을 따랐다고 한다. 스님은 추파 홍유(秋波 泓宥, 1718~1774)스님과 교유하며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이는 『추파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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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암집-사면 후에 혜암 화상에게 부쳐 드림「사면 후에 혜암 화상에게 부쳐 드림」은 경암 응윤(鏡巖應允, 1743~1804) 스님이 혜암 스님께 보낸 칠언사운(七言四韵) 시로 『경암집(鏡巖集)』 권상에 수록되어 있다. 혜암 스님은 1785년 전라도 관찰사로부터 『정감록(鄭鑑錄)』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받아 투옥되었다가 풀려났다. 경암 스님의 시는 이 사건 이후에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원문 赦后寄呈惠庵和尙 覔道安禪是化城 歸家須上白牛程 風濤險域挺身入 雨露恩天信步行 老病已催餘一事 慈悲倘許濟羣生 深心報佛窮塵刹 時論無端責利名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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