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문
○下全羅監司鄭彦慤書狀, 【其狀曰: "海南縣竄逐罪人梁允溫, 以罪重人, 不自畏懼, 偃然坐于官舍至爲過甚。 允溫以逆賊同謀之人, 網漏之言, 曾已聞知。 近考道內守令等受由置簿冊, 則允溫名下, 乙巳年二月二十九日, 古阜地亡妻歸葬, 又於乙巳七月二十三日, 京畿地亡妻歸葬受由。 已葬之妻, 欺冒道主, 再度受由, 無緣上京, 至爲綢繆。 臣巡到求禮縣, 其時隨陪律生朱萬亨、急將奴億連、典吏金積等推問, 則朱當亨招內: ‘前縣監梁允溫, 乙巳年亡妻歸葬受由, 八月初二日, 本縣起發, 同月十二日入京。 十三日尹任家入內, 終日言話, 十九日, 又到尹任家, 竟日相話, 夜深乃還。 二十一日, 尹任家歸, 到午後還來本家, 卽時下來。 一時輜重棄置, 隨後下來, 發京日乘昏到宿良才驛。 急急馳來, 二十九日南原地, 忠順衛尹伯衡茅亭止宿, 三十日還官。 及聞京中之事, 心不在此, 而黃芚寺上歸, 留二日下京。 其後或川邊或野次, 常常早去暮還’ 云。 億連招辭同。 金積招內: ‘縣監其時上京, 留連還官卽時, 衙內下人等, 潛相涕泣, 見人則抆淚而止’ 云。 尹任家歸到, 夜深乃還, 必有謀逆。 八月二十二日, 尹任謀逆事覺, 其前一日, 允溫歸到任家, 獨身推出, 夜宿良才驛, 奔忙馳還。 尹任八月二十八日賜死, 九月十二日, 依律凌遲, 妻子緣坐, 允溫則八月三十日, 到衙。 其時尹任及其壻尹興禮, 時未被誅, 而心不在此, 山野橫行, 至於奴僕亦抆淚揮涕, 則與尹任同心謀逆, 被誅疑慮, 逃避設計, 明白無疑。 如此大逆之賊, 至今共戴天日, 臣民所共憤云云。"】 于政院曰: “罪人梁允溫拿來推鞫。”
※출처: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번역문
명종 6년(1551) 3월 24일 임자 3번째기사
전라 감사 정언각의 서장에 따라 양윤온을 잡아다 추국케 하다
전라 감사 정언각(鄭彦慤)의 서장 【*】 을 정원에 내려주면서 일렀다.
“죄인 양윤온(梁允溫)을 잡아다가 추국하라.”
【*서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해남현(海南縣)에 유배된 죄인 양윤온은 죄가 무거운 사람으로서 스스로 두려워할 줄 모르고 편안하게 관사(官舍)에 앉아 있으니 허물이 지극히 심합니다. 윤온(允溫)은 역적과 공모한 사람인데도 법망에서 벗어났다는 말을 이미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근래에 도내(道內) 수령들의 수유 치부책(受由置簿冊)을 상고해 보니, 윤온의 이름 밑에 을사년 2월 29일에 고부(古阜) 땅으로 죽은 아내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갔다 했고, 또 을사년 7월 23일에 경기(京畿) 땅으로 죽은 아내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휴가를 받았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이미 휴가를 받고 장사 치른 아내의 일로 도주(道主)를 속여 두 번이나 휴가를 받아 가지고 사유없이 상경(上京)한 것은 지극히 치밀한 방법이었습니다. 신이 구례현(求禮縣)에 순도(巡到)하여 그때 수행했던 율생(律生) 주만형(朱萬亨)과 급장노(急將奴) 억련(億連) 및 전리(典吏) 김적(金積) 등을 추문하였습니다. 주만형의 초사(招辭)에 ‘전(前) 현감 양윤온이 을사년에 아내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휴가를 얻어 8월 2일에 본현(本縣)을 출발하여 그달 12일에 입경(入京)하였습니다. 13일에 윤임(尹任)의 집에 들어가서 온종일 이야기하였고 19일에 또 윤임의 집에 가서 종일토록 이야기하다가 밤이 깊어서야 돌아왔으며 21일에 윤임의 집에 갔다가 오후에 본가로 돌아온 즉시 내려왔는데 그 때의 행담(輜重)은 버려두었다가 뒤에 내려왔고 서울을 떠나던 날, 어둠을 타고 양재역(良才驛)에 도착하여 잠을 잤습니다. 그리고 급히 달려 내려왔는데 29일에 남원(南原) 땅에서는 충순위(忠順衛) 윤백형(尹伯衡)의 모정(茅亭)에서 자고 30일에 관아(官衙)로 돌아와 서울에서 일어난 일을 듣고는 마음이 들떠서 황둔사(黃芚寺)에 가서 이틀밤을 자고 돌아왔습니다. 그 뒤로는 늘 냇가나 들판으로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돌아오곤 하였습니다.’고 하였는데, 억련의 초사도 그와 같았습니다. 김적의 초사에는 현감이 그때 상경하여 머물러 있다가 관아로 돌아온 뒤로 하인들이 몰래 서로 울다가 사람들이 보면 곧 눈물을 훔치며 울음을 그쳤다고 하였습니다. 윤임의 집에 갔다가 밤이 깊어서 돌아온 것은 역모가 있었음이 틀림없습니다. 8월 22일에 윤임의 역모가 발각되었는데 그 하루 전날 윤임의 집에 갔다가 홀몸으로 빠져 나와 그날 밤 양재역에서 자고 황급히 달려 돌아간 것입니다. 윤임이 8월 28일에 사사(賜死)되고 9월 12일에 형률(刑律)에 따라 능지 처참(凌遲處斬)되었으며 그 처자는 연좌되었었는데 양윤온은 8월 30일에 관아에 도착했습니다. 그때는 윤임과 그 사위 윤흥례(尹興禮)가 아직 죽지 않았는데도 그의 마음이 들떠서 산으로 들로 마구 돌아다닌 것이며 노복들도 눈물을 뿌렸으니 그가 윤임과 마음을 같이하여 모의하였고 죽음을 당할까 염려되어 도피할 계획을 한 것이 명백하며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이와 같은 큰 역적과 더불어 지금까지 같은 하늘아래 살고 있으니 신민이 함께 분개할 바입니다……."】
※출처: ‘조선왕조실록’, 국사편찬위원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