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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고승전-부휴 등계 존자전

원문
曹溪宗師浮休登階尊者傳 諱善修 姓金 古帶方熬樹人 父積山母李氏 無子禱于路傍古石無竭 一夕夢有神僧 授一圓珠 呑之有妊 嘉靖二十二年中宗三十八年癸卯二月戊子生 孩時不喜肉 丱歲啓父母曰 浮生滚冗 吾將出世 辭入頭流山 從信明長老剃謁芙蓉和尙學 爲人長身豊頰 唯左手失適 書無不讀 筆鍾王法 嘗一衲者索師數字 過京都 遇漢人能書者 示之 久曰 雖古不易得 必手瘢道人揮也 宣廟二十五年壬辰 島夷侵疆 師栖德裕山避鋒 有賊十數出 師叉手立賊作揮刃勢 師怡然 賊大奇之 羅拜而散 師如伽耶 適天將李宗城 入海印 一見師 輒忘去 臨別贈一詩 爲千里面目 師移九千洞 誦圓覺 有一巨蟒暴階 師跂足㚄其尾 俛首而去 夢有翁致拜曰 蒙師說法已離苦 其神異類此 光海時師在頭流 爲狂僧所誣繫獄 光海洞其非罪 翌招入內 詢道要大悅 賜紫衲念珠厚賚 又設齋奉恩寺 命師爲證 萬曆四十二年甲寅 師年七十二 自曹溪之七佛 擬啓手足 翌年秋七月示疾 召上足碧嵓付法曰 吾意在汝 欽哉 至十一月一日 沐浴訖 喚侍者 索紙筆 書一偈曰 七十三年遊幻海   今朝脫殻返初源 廓然寂空元無物   何有菩提生死根 偈畢 泊然而逝 報年七十三 坐夏五十七 闍維收靈骨 樹塔于松廣海印七佛百丈四處 追加弘覺登階者(立碑于松廣寺)。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번역문
조계종사 부휴 등계 존자전(曹溪宗師浮休登階尊者傳) 휘는 선수(善修)이고 속성은 김씨(金氏)이다. 옛날 대방(帶方, 남원)의 오수(熬樹) 출신이고, 아버지 이름은 적산(積山)이다. 어머니 이씨는 아들이 없어서 길가의 남근바위(古石)를 향하여 오랫동안 기도를 드렸다. 어느 날 저녁 꿈에 신승(神僧)이 둥근 구슬을 하나 주었는데, 그것을 받아 삼키고는 임신을 하여 가정 22년(중종 38년) 계묘년(1543) 2월 무자일에 낳았다. 어려서부터 고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8, 9세 무렵에 부모님께 다음과 같이 말씀드렸다. “뜬세상을 헛되게 사느니 저는 장차 세속을 벗어나고자 합니다.” 부모님을 하직하고 두류산에 들어갔다. 신명(信明)에게서 머리를 깎고, 부용 영관(芙蓉靈觀) 화상을 참문하여 불학을 배웠다. 다른 사람들보다 키가 크고 우람하였지만 오직 왼손만큼은 자유롭지 못하였다. 읽지 않은 책이 없었고, 글씨는 해서체(鍾王法)를 익혔다. 일찍이 어떤 납자가 선사가 쓴 몇 글자를 얻어서 서울을 지나가다가 글씨에 능숙한 중국인을 만나서 선사의 글씨를 보이자 그 사람이 오랫동안 보다가 말했다. “이것은 예로부터 쉽게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틀림없이 한쪽 팔이 불편한 수행자(道人)가 쓴 것이다.” 선조 25년 임진년(1592)에 섬나라 오랑캐(島夷)가 강토를 침범하자 선사는 덕유산으로 칼날을 피하여 주석하였다. 이때 도적 10여 명이 출현하였는데, 선사가 차수하고 서 있으니 도적이 칼을 휘두르는 시늉을 하였다. 그럼에도 선사가 태연한 모습을 보이자 도적들은 그것을 무척 훌륭하게 생각하고는 줄지어서 예배를 드리고는 흩어져 버렸다. 선사는 가야산으로 갔다. 그때 마침 명나라의 장군 이종성(李宗城)이 해인사에 들어와서[1]1595년 선조 28년 11월의 일이다. 선사를 언뜻 보고 나서는 쉽사리 그곳을 떠나지 못하였다. 이별에 즈음하여 시 한 수를 지어 주어 천 리까지 원정을 나온 장군의 면목을 세워 주었다. 선사가 무주 구천동으로 옮겨서 『원각경(圓覺經)』을 읽고 있었는데, 그때 큰 이무기 한 마리가 갑자기 계단에 나타났다. 선사가 다가가서 이무기의 꼬리를 밟았는데, 이무기는 고개를 숙이더니 그곳을 떠나 버렸다. 꿈에 어떤 노인이 감사의 예배를 드리고는 말했다. “선사의 설법을 듣고는 고통에서 벗어났습니다.” 선사의 신이한 행적이 이와 같았다. 광해군 시대에 선사가 두류산에 주석하고 있을 때였다. 어떤 미친 승의 무고로 인하여 투옥되었는데, 광해군이 선사의 죄가 없음을 분명히 알고서 다음 날 궁궐로 초대를 하였다. 이에 불도의 종요(宗要)를 묻고는 크게 기뻐하여 자납가사와 염주 등을 후하게 내려 주었다. 또한 봉인사(奉印寺)에서 재를 시설하고는 선사를 명하여 증명법사로 모셨다. 만력 42년 갑인년(1614, 광해군 6) 선사의 나이 72세 때 조계산에서 칠불사로 가서 장차 입적할 곳으로 삼고자 하였다. 이듬해(1615, 광해군 7) 가을 7월에 병을 보였고, 상족(上足)인 벽암 각성(碧巖覺性, 1575~1660)을 불러서 정법안장을 전수하고 말했다. “내 뜻은 그대한테 있으니 잘 받들어라.” 11월 초하루에 이르러 목욕을 마치고는 시자를 불러서 종이와 붓을 찾아서 다음과 같은 열반게송을 하나 지었다. 七十三年遊幻海   칠십삼 년의 꿈같은 바다에서 노닐다가 今朝脫殻返初源   오늘 아침 몸을 벗고 근원으로 돌아가네 廓然寂空元無物   확연하게 공적하여 본래 일물도 없는데 何有菩提生死根   어찌 깨달음과 생사의 뿌리가 있으리오 게송을 마치고 조용하게 입적하였다. 보령은 73세이고, 법랍은 57년이다. 다비를 마치고 영골을 수습하여 송광사·해인사·칠불사·백장사 등 네 군데에 부도탑을 세우고, 홍각등계(弘覺登階)라는 이름을 가호(加號)하였다.(비는 송광사에 건립하였다.) ※출처: ‘불교기록문화유산 아카이브’, 불교학술원
관련주석
  • 주석 1 1595년 선조 28년 11월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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